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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26년(1996)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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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절후 신명의 생애 : 단지현(段志玄)

단지현(段志玄)

 

 

충절과 용맹으로 임금보필

장군의 기품 천하에 떨쳐

          

          

  단지현은 제주(濟州) 임치(臨淄) 사람이다. 아버지 언사(堰師)는 수(隋)나라 때 태원(太原)의 사법서좌(司法書佐)를 지냈다. 의병을 좇았는데 관직이 영주자사에 이르렀다. 지현(志玄)은 자질이 뛰어났고 어려서부터 부모에 의지하지 않았고 여러 번 법을 범했다.
  대업(大業) 말년에 아버지를 따라 태원에서 빈객으로 있었는데 사나운 성격으로 인해, 모든 불량소년들이 그를 두려워 하니 이로써 진왕(秦王)이 그를 알게 되었다. 고조(高祖)가 군사를 일으키자 지현은 병사 천 명을 데리고 그를 좇아, 우령대도독부군두(右領大都督府軍頭)를 배수받았다. 곽읍(藿邑)과 항군을 함락시키고, 영풍창(永豊倉)을 공격할때에는 최선봉에 섰다.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를 지냈다. 유문정(劉文靜)을 좇아 굴돌통(屈突通)을 동관(潼關)에서 막았다.
  문정이 상현화(桑顯和)에게 습격을 당하고 군사들도 지치게 되자 지현은 용맹스런 기병들을 거느리고 적진으로 말을 달려 적병 십여 명을 죽였는데, 와중에 화살에 맞았음에도 참고 이야기하지 않고 여전히 꿋꿋이 돌격하였고 이에 적진이 혼란해지자 아군이 편승하여 크게 떨쳐 싸웠다. 굴돌통이 패하여 도주하다가 여러 부하장수들과 함께 조상(稠桑)에서 잡혔다. 이렇듯 포로를 많이 잡아 낙유부(樂遊府)의 거기장군(車騎將軍)이 되었다.
  고조를 좇아 왕세충(王世充)을 토벌하는데 적진에 너무 깊이 들어가 말이 넘어지자 적에게 사로잡히게 되었다. 두 명의 적병이 지현의 상투를 잡고 장차 낙수(洛水)를 건너려 함에 지현이 갑자기 몸을 날려 배 위로 뛰어 오르자 두 사람은 모두 강물로 떨어졌다.

  이리하여 그들의 말을 빼앗아 타고 돌아오는데 말 뒤쪽에 있었던 적의 기병 수백 명이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 두건덕(竇建德)을 격파하고 동도(東都)를 평정하여 진왕 막부의 우이호군(右二護軍)으로 승진되었다.
  은태자(隱太子)가 일찍이 금과 비단으로 그를 유혹하였는데 거절하고 수락하지 않았다. 진왕이 즉위하자 거듭 좌요위대장군(左堯衛大將軍)으로 승진하고 번국공(樊國公)으로 봉해졌는데 식읍이 900호에 달했다.
  황제의 명령으로 병사들을 거느리고 청해(靑海)에 가서 토곡혼(吐谷渾) 목마를 빼앗았는데 그곳에서 머물러 놀다가 면직되었다. 얼마 안 있어 복직되었다.
  문덕황후(文德皇后)의 장례식 때에 우문사급(宇文士及)과 함께 병사들을 거느리고 장무문(章武門)을 지켰는데 태종이 밤에 사신을 이 두 장군의 처소로 보냈다. 사급은 문을 열고 이 사신을 안으로 들일려고 하였으나 지현이 막아서며 말하길『군문(軍門)은 밤에 여는 것이 아닙니다.』사신이 왕의 친서를 보였는데도 지현은『밤이라서 진위를 가릴 수 없습니다.』하며 끝내 안으로 들이지 않았다. 날이 밝자 황제가 감탄하며 말하길『진짜 장군이로구나. 주아부(周亞夫)는 저리 가라군!』그리하여 포국공(褒國公)으로 임명하고 진군대장군(鎭軍大將軍)도 겸직하도록 했다.
  정관(貞觀) 16년에 지현이 병에 걸리자, 황제가 병상(病牀)에 가 울면서 말하길『그대에게 오품(五品)의 관직을 내리겠노라.』지현이 머리를 조아려 감사하고 그 직을 동생에게 줄 것을 청하니 동생 지감(志感)이 좌위랑장(左衛郞將)을 배수 받았다. 지현이 죽자 황제가 통곡을 하였다.
  그에게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 양주도독(楊洲都督)을 내리고 소릉(小陵)에 안장했다. 시호를 장숙(壯肅)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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