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여름 그리고 가을
이현주 <선무ㆍ잠실2방면>
봄, 그리고 옛날일거야. 원시적으로 직립보행을 하면서 머리를 처음 들었지. 하늘이 진했지, 키 큰 녹색 고사리들과 어울려 넘실거리던 거기. 지금처럼 업장으로 변형된 얼굴은 없었어.
또 한생에 기억나는 것은 장군들이 군사를 이끌고 밥 먹듯이 전쟁하던, 끝도 없이 기막히던 시절 자욱한 포연과 고함소리, 어린 병사들. 칼들이 춤추는 슬로우 모션. 내가 죽었든, 많이 죽였든, 어쩔 수 없었어! 뱀 머리가 깨어졌다 해도.
육체를 가지면 새로 시작할 수 있었어. 다 잊어도 되는 건 꿈이었을까. 원혼들은 용납하지 않았을거야. 나도, 내게 세상살이란 환한 새벽시장, 아니면 홍수 때 떠내려가는 세숫대야며 냄비 같은 것
선천의 상극시대 윤회는 충분한가, 업장은 눈덩이처럼,
세상에서 큰 뜻 펴시던 조상신들로 밀려 들어 온 道에는
천상에서 뵈었던 구천상제께서 여름 가을
삐걱이는 오두막을 허물어내신다. 가장 좋은 설계도로 가장 좋은 오동나무로
가장 크신 어른께서 신명 나게 지으신다. 흰 페인트 통을 들고 나도 서고 싶은 꿈. 나를 하나 바칠 곳이 없어 슬프지 않았던가. 군자는 넓은 길로 찾아 가며, 구도자는 험한 길로 방향을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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