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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ㆍ도인 이야기 : 김시습(金時習)
-海東편-
김시습(金時習) (1435∼1493)
<교무부>
김시습은 서울 성균관 부근에서 태어났는데 생이지지(生而知之)의 자질이 있었다 할 만큼 천품이 영민하였다. 태어난지 여덟 달 만에 스스로 능히 글자를 깨우쳤으므로 친척 어른인 집현전 학사 최치운(崔致雲)이 보고 기이하게 여겨 이름을 시습이라고 지어주었다. 세상에 전해오기를 매월당이 태어날 때에 성균관 사람들이 모두 공자(孔子)가 반궁리 김일성(김시습의 부친)의 집에서 태어나는 꿈을 꾸어 이튿날 그 집에 가 물어보니 매월당이 태어났다고 하였다. 또는 매월당의 어머니는 태몽에 공자께서 집으로 오신 것을 맞이하였다고 한다. 윤춘년의 《매월당 선생전》에 수록되어 있는 김시습이 세 살 때 지었다는 다음과 같은 시(時)를 보면 그의 천재성을 짐작할 수가 있다. – 비가 아니오는데 천둥소리 어디서 나는가? 누런 구름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진다. (無雨雷聲何處動 黃雲片片四方分) – 훈련원도정 남효례(南孝禮)의 딸과 혼인한 후 삼각산 중흥사(重興寺)로 들어가 공부를 계속하였는데 21세때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소식을 듣고 보던 책들을 모두 모아 불사른 뒤 스스로 머리를 깎고 산사를 떠나 전국 각지를 유랑하였다. 그의 문학과 사상을 전해주는 자료로는 《매월당집》과 《금오신화》가 있는데 매월당은 근본사상을 유교에 두고 한편으로 불교의 교리를 좋아하여 그것을 유가의 사상으로 해석하고자 한 사람으로 세간에 알려졌을 뿐 신선술(神仙術)을 체득한 도인(道人)의 한 사람으로서, 해동도가의 중추적인 역할을 한 사실에 대해서는 역사 속에서 크게 드러나지 않았다. 세속적인 관점에서 보면, 김시습의 일생은 불우한 것이었다.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이라는 비정한 정치사에 염증을 느끼고 미친 듯 시를 읊으며 마음 내키는 대로 떠돌아 다니며 한 세상을 희롱하였다. 10대에는 학업에 전념하였고 20대에 소오산수(嘯傲山水)하며 천하를 돌아 다녔으며, 30대에는 고독한 영혼을 이끌고 수도(修道)로 인생의 터전을 닦았고, 40대에는 더럽고 가증스러운 현실을 냉철히 비판하고 행동으로 항거하다가 50대에 이르러서는 초연히 낡은 허울을 벗어버리고 정처 없이 떠돌아 다니다가 마지막으로 찾아 든 곳이 충청도 홍산의 무량사(無量寺)였다. 『김시습은 홍천의 무량사에서 죽었는데 임종 때 화장하지 말라고 유언했다. 절의 중들이 절 옆에 일시로 매장했다가 3년 후에 완장(完葬)하기 위해 열어 보았더니 얼굴색이 살아 있는 것 같아서 사람들이 모두 시해선(尸解仙)이 되었다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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