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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27년(1997)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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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절후 신명의 생애 : 당검(唐儉) 神明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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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검(唐儉) 神明열전

 

               

           

  당검(唐儉)의 자(字)는 무약(茂約)으로 병주군(幷州郡) 진양현(晉陽縣) 사람이다.

  조부 당옹(唐邕)은 북제(北齊)때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지냈다. 부친 당감(唐鑒)은 수(隋)나라 때 융주자사(戎州刺史)로 고조(高祖)와 친하여 일찍이 군위(軍衛)를 모두 관장했다.

  그래서 당검은 평소에 진왕(秦王)과 교유(交游)하며 함께 태원(太原)에서 살았다.
  당검은 성격이 호방하고 얽매이는 것이 없었으나, 어버이를 섬김에는 효성스럽다고 알려졌다.

  수(隋)의 정세가 점점 어지러워지는 것을 보고 몰래 진왕(秦王)에게 대계(大計)를 세우도록 유세하였다.

  고조(高祖)가 일찍이 그를 불러 물으니, 당검이 대답해 말하기를 『공께서는 날로 궁정에서 두각을 나타내시고, 또 성씨(姓氏)가 도참(圖讖)의 예언과 들어맞으니, 이는 천하 사람들이 오랫동안 바라던 일입니다. 만일 바깥으로 호걸들을 규합하고, 북쪽으로 오랑캐들을 불러 모으고, 오른쪽으로 연(燕)나라와 조(趙)나라의 세력을 거둬들이고, 황하를 건너 남하하여 진(秦), 옹(雍) 지역에 근거지를 두신다면, 이는 탕왕(湯王), 무왕(武王)의 업적과도 같게 될 것입니다.』
  고조가 말하길 『탕왕과 무왕의 업적에 어찌 다다를 수 있겠는가? 하지만 지금 바야흐로 난리가 극심하고, 사람마다 개인의 이익을 꾀하려 하니, 그대가 이런 폐단을 바로 잡고자 하는 것이라면 내가 그대를 위해 생각을 한번 해보겠소.』

  그리하여 대장군의 막부가 설치되자 기실참군(記室參軍), 위북도(渭北道) 원수사마(元首司馬)를 배수받았다. 고조를 좇아 수도를 평정하고 상국부기실(相國府記室)로 진창군공(晉昌郡公)이 되었다.

  무덕(武德) 초년에 내사사인(內史舍人)으로 승진되었다가, 중서시랑(中書侍郞), 산기상시(散騎常侍)로 옮겨졌다.

  여숭무가 하현(夏縣)에서 반란을 일으켜 유무주(劉武周)와 연합하자, 황제는 영안왕(永安王) 효기(孝基), 독고회은(獨孤懷恩), 우균(于筠) 등에게 병사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라고 명령을 내리고는, 당검(唐儉)을 적중에 사신으로 보냈다. 마침 효기 등이 무주에게 잡혀 포로가 되자, 당검도 함께 잡혔다.

  당초에 회은이 포주(蒲州)에 주둔하여 몰래 그의 장수 원군실(元君實)과 모반하려 하였는데, 마침 모두 적중에 있는 상태였다.
  군실이 은밀히 당검에게 말하길 『독고회은이 장차 병사를 일으켜 대사(大事)를 도모하려 하는데, 주저하며 아직 거사하지 않은 까닭에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소위 결단을 내려야 할 때 용단을 내리지 못하여 수난을 당한다는 것은 바로 이 경우입니다.』

  얼마 후에 독고회은이 포위망을 뚫고 돌아가자 황제가 다시 명령을 내려 포주(蒲州)를 지키도록 하였다. 군실이 말하길 『독고회은이 난을 평정하고 돌아가 다시 황하에 주둔하면 어찌 임금을 죽이려 하지 않겠습니까?』 당검은 그가 난리를 일으킬까 두려워 몰래 유세양(劉世讓)을 황제에게 보내 그들의 음모를 폭로하도록 하였다.

  마침내 고조가 포진(蒲津)에 행차하여 배를 타고 중류에 이르렀는데 세양을 만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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