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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37년(2007)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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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종 : 통감(通鑑)

통감(通鑑)

 

 

글 연구위원 이승목

 

“시속에 어린 학동에게 통감을 가르치는 풍습이 생겼나니 이것은 어릴 때부터 시비로써 성품을 기르려는 것이니 웅패의 술이로다. 어찌 합당하다 하리오.”(교법 2장 25절)

 

  『통감(通鑑)』은 중국 북송(北宋)의 사마광(司馬光 : 1019~1086)이 지은 것으로, 주(周)나라 위열왕(威烈王)이 진(晉)나라 3경(卿: 韓·魏·趙氏)을 제후로 인정한 기원전 403년부터 5대(五代) 후주(後周)의 세종(世宗) 때인 960년까지 1,362년 간의 역사를 1년 단위로 엮어서 총 294권으로 편찬한 것이다. 이 책은 정사(正史)는 물론 실록(實錄)·야사(野史)·소설(小說)·묘지류(墓誌類) 등 322종의 각종 자료를 참고하여 저술되었으며,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처럼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기술하는 편년체 방식을 취하고 있다. 신종(神宗)은 사마광으로부터 이 책을 받아본 후 많은 신하들에게 읽기를 권하였고, 서문(序文)과 함께 『자치통감(資治通鑑)』이라는 제목을 내려 주었다. 후대에 이르러 이 책의 이름은 줄여서 『통감』으로 불리게 되었다.

  사마광이 이 책을 저술한 것은 역대의 사실(史實)을 밝혀 정치의 규범으로 삼고, 왕조 흥망의 원인과 대의명분을 밝히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그는 단순히 사실을 나열하기보다는 위정자의 옳고 그름을 따져 후대에 올바른 정치의 교훈으로 남기고자 하였다. 특히 그는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기사에, ‘신광왈(臣光曰: 신 사마광이 말하기를)’이라는 독특한 형식으로 자신의 논평을 남기기도 했다.

  『통감』이 우리나라에 전해진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주자학이 들어온 고려 말에 함께 소개되었으리라고 추측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통감』이 아닌 『통감절요(通鑑節要)』가 먼저 전래되었다. 『통감절요』는 『통감』이 너무 방대해 쉽게 읽을 수 없었기 때문에 송(宋)나라 휘종 때 강지(江贄: 호 소미(少微))가 이것을 취합하고 요약하여 50권에 담았던 책이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것을 보면, 태종은 『통감절요』를 보고 얻은 교훈을 신하들에게 이야기한 일이 있고, 세종은 『통감절요』를 활자화해서 간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 초기 무렵에는 『통감절요』의 수요층이 왕실 아니면 몇몇 사대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16세기 말엽에 이르러서는 과거시험의 정식 과목으로 채택되면서 서당에서의 필수 교과 과목으로 편입된다.

  『통감절요』가 채택되기 전의 서당교육을 보면, 8~14세 사이의 학동들은 『천자문(千字文)』을 시작으로 『동몽선습(童蒙先習)』, 『명심보감(明心寶鑑)』, 『소학(小學)』 등을 익히는 것이 관례였다. 이 과목들은 충효를 중심 덕목으로 내건 윤리교육과 위기지학(爲己之學 : 자기 수양을 위한 학문)의 바탕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통감절요』의 교육목적은 기존 서당에서 가르치는 교과목과는 그 성격이 달랐다.

  『중종실록』에 따르면 심정(沈貞: 1471~1531)은 “문리(文理)가 통달한 뒤에야 의리(義理)를 쉽게 알 수 있으므로, 나이가 어릴 때는 먼저 사학(史學)을 배워야 문리에 쉽게 통달하며, … 문리를 통달하고 나면 의리를 쉽게 알아서 덕성이 절로 진취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항(李恒: 1499~1576)도 “사학은 경서(經書)에 비해보면 말단이지만, 『통감절요』에는 격절(激切: 언론이 과격하고 절실함)한 일이 많이 있어서 문리가 쉽게 통달하나 경서는 의리가 깊어서 쉽게 알 수 없으므로, 사학을 먼저 읽어서 문리에 통달하고 나면 경학도 크게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위 두 사람 의견의 공통점은 어린 학동들에게 먼저 『통감절요』를 읽히게 하면 글의 뜻을 이해할 수 있는 힘, 즉 문리를 기를 수 있으므로 다른 유학의 경서들을 공부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서당에서는 어린 학동들이 문리가 트여 총명해지도록 이 책을 가르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다.

  그렇지만 모든 일에 밝음이 있으면 어둠도 있듯이 어린 학동들에 대한 이런 교육 풍습은 후대에 들면서 점점 더 병폐로 작용하게 된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조선의 아이들은 모두 소미(少微)선생의 『통감절요』만을 가지고 삼백 일의 양식을 삼는다. 평생 독서는 다만 이 한 질뿐이다. 그 뜻도 옛적 치란(治亂)의 원인을 알아내는 것과 상하득실(上下得失)을 터득하는 것만 담겨있을 뿐인데, 떠받들기를 육경(六經: 시경·서경·역경·예기·악기·춘추)처럼 하고 존중하기를 오전(五典: 군신유의·부자유친·부부유별·장유유서·붕우유신)처럼 하니 이 무슨 뜻에서인가! 중국 내에서 이름을 날리는 이들도 모두 『통감』이 무슨 책인지 모르더라. 이를 보면 중국에서도 없어진 지 오래된 것인데, 어찌 조선에 들어와 이같이 어지럽혀 끝내 헛되이 일생을 보내게 하는지 모르겠다.”며 지나치게 편중된 교육 세태를 비판했다. 곧 어린 학동들이 『통감절요』의 공부에만 치중해, 명분을 앞세워 난신적자(亂臣賊子)를 가려내고 누가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는 소양을 기르는 데 치우쳐 있었던 교육풍토를 지적했던 것이다.

  이로 볼진대 상제님께서 “어릴 때부터 시비로써 성품을 기르려는 것이니 웅패의 술이로다. 어찌 합당하다 하리오.”라고 하신 바와 같이, 수도인들도 시시비비(是是非非)를 따지는 것보다는 덕성(德性)을 함양하는 공부에 더 매진하고 진력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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