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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37년(2007)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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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의 발자취를 찾아서(6) : 상제님께서 최제우에게 천지대도를 내리시다

상제님께서 최제우에게 천지대도를 내리시다

 

 

글 교무부

 

  원시의 모든 신성(神聖)·불·보살 등이 모여 인류와 신명계의 겁액(劫厄)을 구천에 하소연하자, 상제님께서는 서양 대법국 천계탑에 내려와 천하를 대순(大巡)하시고 우리나라에 이르시어 금산사 미륵금불(彌勒金佛)에 30년 간 임어해 계시다가 최제우(崔濟愚, 1824~1864)에게 세상을 구할 큰 도[제세대도(濟世大道)]를 계시하시게 된다.

  그러나 과거 이마두(마테오리치)도 동양에 지상천국을 세우고자 하였으나 ‘유교’의 폐습을 넘지 못해 실패하고는 오히려 동양의 문명신을 거느리고 서양으로 가버린 적이 있었고, 진묵도 ‘유학자’ 김봉곡에 의해 한을 품게 되어 동양의 모든 도통신을 거느리고 서양에 건너가 버린 사례가 있었던 것과 같이, 최제우도 ‘유교’의 전헌(典憲 : 법 또는 규범)이라는 큰 장벽을 넘지 못해 상제님께서 주신 대도의 참뜻을 밝히는 데 실패01하고 만다.02 여기에서 ‘유교의 전헌’이라 하면 당시 시대를 지배하던 이념인 성리학의 질서가 뿌리내린 사회 상황을 의미한다.

  어쨌든 최제우가 상제님으로부터 세상을 구할 큰 도를 받았다는 사실은 그가 비범한 인물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니, 이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최제우는 1824년 10월 28일, 지금의 경주시 월성군 현곡면 가정리에서 태어났다. 초명은 복술(福述) 혹은 제선(濟宣)이고, 자는 도언(道彦)03, 호는 수운(水雲)이다. 그의 아버지는 영남 일대에서 유학자로 명성이 높은 근암공 최옥이었고, 어머니는 재가녀(再嫁女)인 곡산 한씨 부인이었다. 최제우는 어려서는 아버지로부터 유학을 배웠고, 장성한 뒤에는 어지러운 세상을 구하려는 높은 뜻을 지니고 가르침을 얻고자 10년간 전국을 돌아다녔다. 그러나 이미 나와 있는 유불선의 가르침들로는 혼란한 세상을 구할 수 없음을 깨닫고, 31세 되던 해인 1854년에 처가가 있던 울산 여시바윗골로 들어가 초가삼간을 짓고 새로운 진리를 찾기에 몰두하였다.

 

▲ 최제우가 태어난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 생가터. 최제우가 20세 때 일어난 큰 화재 때문에 모두 소실 되어 빈 터로 남아있다가, 1971년 그 자리에 귀부와 이수를 갖춘 5미터 높이의 유허비를 세웠다.

 

 

  그러던 중 1855년 3월, 금강산에서 왔다는 한 이름 모를 승려로부터 『을묘천서(乙卯天書)』를 얻고는, 유학을 바탕으로 한 사색에서 벗어나 직접 하늘에 기도하는 방법으로 구도 방향을 바꾸게 된다. 최제우는 1856년 양산 통도사 내원암에서의 49일 기도를 시작으로04, 다음해에는 적멸굴(寂滅窟)에서 49일 기도를 드렸다. 1859년에는 처자를 거느리고 고향인 경주로 돌아와 구미산 용담정(龍潭亭)05에서 수련을 계속했다. 그리고 도를 깨닫지 않으면 다시는 세상으로 나가지 않겠다는 뜻의 ‘불출산외(不出山外)’를 써 붙이고, 어리석은 세상 사람을 구제하겠다는 결심을 더욱 굳게 다지기 위해 이름도 ‘제선(濟宣)’에서 ‘제우(濟愚)’로 고쳤다. 해가 바뀌자 ‘도의 기운을 길이 보존함에 사특한 것이 들어오지 아니하고, 세간의 뭇사람들과 같이 돌아가지(어울리지) 않으리라(道氣長存邪不入 世間衆人不同歸)’는 입춘시를 벽에 써 붙이고 하루에 子時·寅時·午時 세 차례에 걸쳐 청수를 떠놓고는 혼신의 힘을 다해서 구도에 열중하였다.

  드디어 1860년 4월 5일, 마음이 섬뜩해지고 몸이 떨리는 가운데 신령스러운 기운이 내리면서 “두려워 말라. 두려워 말라. 세상 사람들이 나를 상제라 하거늘 너는 상제를 알지 못하느냐.”06은 말씀이 들리며, 상제님07을 뵙게 된다.08 최제우는 상제님께 왜 자신에게 나타나신 것인지 그 연유를 물었고, 상제님으로부터 “내가 열심히 노력하였으나 특별히 이룬 공이 없다.09 그러므로 너를 세상에 내어 이 법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려하니 의심치말고 의심치말라. 내게 영부(靈符)가 있다. 그 이름은 선약(仙藥)이고 그 모양새는 태극이요 다른 모양새는 궁궁(弓弓)이다. 나로부터 이 영부를 받아 사람들을 질병에서 건지고 또한 주문을 받아 나를 위하도록 사람들을 가르치면 너 또한 장생하여 세상에 덕을 펴리라.”10은 말씀을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거의 1년 동안 지속적으로 상제님으로부터 가르침을 꾸준히 받았다.11

 

▲ 최제우가 『을묘천서』를 받은 울산시 유곡동 여시바윗골의 초가. 여우가 바위 위에 자주 나타난다고 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으며, 건물은 최근에 다시 복원된 것이다.

 

 

▲ 최제우가 득도하기 전인 1857년 7월에 33세의 나이로 49일간 기도를 한 적멸굴. 양산 내원사 근처에 있다.

 

 

▲ 용담정.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 산63번지 소재

 

 

  최제우는 상제님으로부터 받은 가르침을 천도(天道) 혹은 무극대도(無極大道)라고 부르며, 스스로 “(상제님으로부터 받은)나의 도는 지금도 옛날에도 들어본 적 없는 일이요, 지금에도 옛날에도 견줄 데가 없는 법이다.(吾道今不聞古不聞之事 今不比古不比之法)”12라고 하여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전혀 새로운 진리라고 하였다.

  1861년 6월, 드디어 최제우는 상제님의 제세대도를 사람들에게 알리기 시작하였다. 세상 모든 사람은 적서(嫡庶)나 반상(班常)이라는 신분에 관계없이 누구나 군자가 될 수 있다는 만민평등의 가르침은 당시 혼란한 사회 속에서 새로운 삶의 질서를 고대하던 사람들로부터 적극적인 호응을 받았다. 훗날 최제우의 사상을 이어 받을 최시형(崔時亨, 1827~1898)과 같이 글을 모르는 하층민들도 최제우를 많이 따랐다고 한다.13

  최제우에게 천령(天靈)이 강림했다는 소문이 돌고 많은 사람들이 용담정에 모여들자 경상도 지방의 유학자들은 자연 이를 주목하게 되었다. 최제우를 따르는 사람들이 당시 신분 계급사회를 부정하고 새로운 시대[개벽(開闢)]가 도래함을 믿으며 영부와 주문을 수련도구로 사용한다는 점 때문에, 고루한 유학자들(특히 그 일대에는 퇴계학파들이 많았음)은 최제우를 사회질서를 무너뜨리고 사술(邪術)을 부리는 이단자로 몰기 시작하였다. 특히 그들은 최제우의 부친 근암공을 당대의 유학자로 존경하고 있었기 때문에, 최제우의 이러한 반성리학적 행동을 더더욱 용서할 수 없었다. 결국 유학자들은 최제우를 죽이기 위하여 그가 당시 탄압 받고 있던 서학(西學)을 신봉한다고 모략하기 시작하였다.

 

▲ 남원 선국사의 은적암터. 원래 암자 이름은 적밀암이었으나 최제우가 은적암으로 바꾸어 불렀다. 지금은 건물이 없어지고 터만 남아있다.

 

 

▲ 최제우의 묘소 건너편에 보이는 마을이 그가 태어난 가정리이다.

 

 

  최제우는 이러한 오해를 불식시키고 자신의 참뜻을 알리기 위하여 「포덕문」과 「안심가」를 연달아 지어 배포하였는데, 「포덕문」의 “안타까워라! 지금 사람들은 시운의 흐름을 알지 못하고 내가 하는 말을 듣고 집에 들어가면 그르게 여기니…”라는 구절은 당시 그의 심정을 잘 나타내고 있다.

  10월이 되자 관가도 최제우에게 가르침을 펴는 것을 중지하라고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최제우는 용담정을 떠나 1861년 11월 남원의 은적암으로 피신하여 겨울을 나게 된다. 이곳에서 그는 또다시 「논학문」을 지어 자신의 도는 동학(東學)이며 서학과 비슷하지만 그 이치가 서로 완전히 다름을 거듭 천명(闡明)하였다.

  다음해인 1862년 3월, 최제우가 경주로 돌아오자 동학에 입교하는 사람들이 더욱 늘어 1863년에는 신도가 3,000여 명에 육박하였다. 그러나 7월부터 상주지역의 성리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지금 이 요망한 마귀와 같은 흉측한 무리들이 하는 짓은 분명 서학을 개두환명(改頭幻名)한 것’이라고 하면서 “동학이 선악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죽쟁이풀과 같은 것으로 이곳에 들어와 자라고 있으니 넝쿨째 뽑아버려야 한다.”며 관이 나서서 엄벌을 할 것을 주장하면서, 조직적으로 동학배척운동을 일으켰다. 결국 최제우는 그해 11월 왕명으로 경주에서 체포되었고 1864년 1월 대구감영에서 심문받다가 3월 좌도난정(左道亂正)14의 죄목으로 대구장대(大邱將臺)에서 효수형(梟首刑)에 처해지니, 그때 나이 불과 41세였다.

  선천 세상의 운이 다했음을 알고 새 시대를 열 새로운 진리를 간구하다가 상제님께 제세대도를 받은 최제우! 그러나 그는 이렇게 유교라는 큰 장벽을 넘지 못하고 제세대도의 참뜻을 밝히는 데 실패하고야 말았다. 이제 상제님께서는 세상을 구원하시는 대역사(大役事)를 직접 펼치시기 위하여 인간의 몸으로 친히 이 땅에 강세하시기에 이르렀다.

 

 

▲ 관덕정순교기념관. 이곳에서 과거 천주교인들이 많이 처형을 당하였으므로, 천주교에서 그 부지에 기념관을 건립하였다. 최제우가 참형을 당함 관덕당(觀德堂) 형장(대구장대)도 바로 이곳이다.

 

 

 

 


01 교운 19

02 훗날 상제님께서 불선(佛仙)뿐만 아니라 유()의 정수도 걷어 후천 문명의 기초를 세우셨으나, 그 당시 유교의 폐해가 워낙 심하다 보니 유()를 부유(腐儒 : 생각이 낡고 완고하여 실제 생활에 아무런 구실도 못하는 학문)라고 말씀하시기도 하셨다. ‘상제께서 보경에게 유 불 선(儒佛仙) 세 글자를 쓰게 하고 정좌하여 눈을 감고 글자 하나를 짚게 하시니 보경이 불자를 짚자 상제께서 기쁜 빛을 나타내시고 유자를 짚은 종도에게 유는 부유라고 일러주셨도다.’(교운 16)

03 훗날 자()를 성묵(性默)으로 바꾸었다.

04 내원암에서의 공부는 47일째 되는 날 숙부가 돌아가신 것을 느끼게 되어 49일을 마치지 못하고 중도에 그만두게 된다.

05 용담정은 본래 퇴락하여 쓸 수 없게 된 작은 사찰이었다. 최제우의 할아버지가 이 사찰을 사들여 정자로 삼았고, 최제우의 아버지인 근암공 최옥도 이곳에 머물며 제자들을 가르쳤다. 최제우는 이곳에서 상제님으로부터 제세대도를 계시 받았다.

06 동경대전』 「포덕문

07 최제우는 하느님에 대한 호칭으로 세 가지를 사용하고 있다. 처음 계시를 받을 때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상제님이라고 하였으며, 자신을 따르는 농촌교인들이 이해를 잘 할 수 있도록 원래 우리 민족의 최고신 관념인 하느님’(훗날 1920년 이후로 천도교에서는 이 명칭을 한울님으로 바꿔 사용함)을 사용하기도 하였고, 18614월에 주문을 지으면서는 천주(天主)’라는 호칭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최제우가 사용한 천주라는 용어는 당시 박해를 받던 천주교에서의 최고신인 천주와 말이 같았기 때문에 서학 즉 천주교를 한다는 오해를 사는 빌미가 되었다. 오늘날에도 일부 천주교 사람들은 최제우가 천주교의 천주를 받아들인 것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다.

08 최제우는 처음 계시를 받을 때 네가 지금 그릇된 세상을 건지고 도탄에 빠진 창생을 살리고자 하는 그 마음은 아름다우나 그 뜻을 이루고자 하면 반드시 가져야 할 것이 있으니, 그것은 금력(金力)과 권력(權力)이니라. 돈이 없으면 이 세상을 건지지 못할 것이요, 권력이 없으면 이 세상을 다스리지 못할 것이니 그러므로 내가 너에게 백의재상(白衣宰相)을 주어 천하를 다스리게 하리라.”는 상제님의 말씀을 들었다. 이에 최제우는 이 세상은 돈과 권세로써 망하게 되었는데, 이제 다시 부귀(富貴)로써 세상을 건지라 하시니 사나운 것으로 사나운 것을 바꾸는 것이라 저는 이를 원하지 않습니다.”고 하였다. 다시 상제님께서 네가 부귀를 원치 않으면 권모술수로써 세상을 건지라.”고 말씀하셨고, 이에 최제우는 이 세상은 권모와 간교로써 망하였는데, 어찌 작은 꾀로써 백성을 속여 일시의 편안을 도모하겠습니까. 저는 이를 원치 않습니다.”고 대답하였다. 또 상제님께서는 그렇다면 나에게 조화의 술법이 있으니 이것으로써 세상을 건지라.”고 하셨고, 최제우는 이것은 이치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만물이 이미 무위이화의 이치로 자라고 사는데 어찌 이치에 어긋나는 술법으로써 세상을 건지겠습니까. 이것도 원치 않습니다.”고 말하였다. 이렇게 최제우는 상제님으로부터 제세대도를 받기 전에 세 번에 걸친 시험을 받았다고 한다.(대선생문집참고)

09 원문은 여역무공(余亦無功)’으로서, 신성··보살 등의 하소연으로 천하를 대순하시던 상제님께서 선천의 참혹한 실상을 보시고 세상이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된 데 대해 한탄하시며 하신 말씀으로 여겨진다.

10 동경대전』 「포덕문

11 정규훈, 한국의 신종교, 서광사, 2001, p.21

12 동경대전』 「논학문

13 당시 하루 약 100여 명의 사람들이 용담정을 방문했고 포교 시작 후 1년이 지나자 최제우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의 수가 1000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당시 최제우가 병에 걸린 사람들에게 자를 종이에 써주고는 그것을 태워 마시게 하였더니 병이 낫는 일이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영부가 효험을 나타내는 사례가 늘자 민중들의 최제우에 대한 믿음이 급속도로 확산되어 초기 동학의 교세가 신장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최제우에 따르면 모든 사람에게 다 영부의 효력이 있는 것은 아니고 영부를 받은 사람이 얼마나 성실하게 신을 공경하느냐에 따라 달려있다고 한다.

14 사학(邪學)으로 정도(正道)를 어지럽힘. 당시 유학에서는 이단 혹은 사학(邪學)을 좌도(左道)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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