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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25년(1995)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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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절후 신명의 생애 : 淸明절후 관장하는 이정(李靖)

淸明절후 관장하는

이정(李靖)

 

노년에도 왕명받들어 변방 평정, 고구려 정벌시 병든 몸으로 忠誠心보여

 

               

  『정은 기병 삼천으로 오랑캐 땅에서 피를 흘리고 싸워 마침내 정양(定襄)을 탈취하였으니, 예부터 이러한 장수는 있지 않았다. 족히 내 위수(渭水)지역에서의 수치를 씻을 만 하도다!』 힐리는 도망가서 철산(鐵山)에다 보루를 짓고, 사신을 보내어 사죄하며, 자기 나라를 가지고 태종에게 항복해 들어오기를 청했다. 태종이 정을 정양도(定襄道)지역의 총관(總管)으로 삼아, 그들을 가서 맞이하도록 했다. 또 홍노경(鴻盧卿)인 당검(唐儉)과 장군 안수인(安脩仁)을 파견하여 그들을 위로하도록 했다. 정이 부장군인 장공근(張公謹)에게 말하기를『임금님의 사신이 당도하면 오랑캐들이 필시 안심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만 명의 기병에게 이십일간의 양식을 주어 백도(白道)로부터 그들을 공격케 하면, 반드시 우리들이 승리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공근이 답하기를『임금님께서 이미 그들의 투항을 허락하여 약속하셨으며, 사신들이 그곳에 있으니 어찌 하겠습니까?』라고 했다. 정이 말하기를『기회를 놓쳐서는 안됩니다. 한신(韓信)이 제나라를 격파할 수 있었던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또한 당검(唐儉) 같은 무리가 아까울 게 뭐가 있소?』라고 했다. 병사들을 재촉하여 질주해 나가면서 도중에 만나는 정찰병이나 순라병들을 모두 포로로 잡아 좇게 하여, 적의 요새로부터 7리 밖에 떨어지지 않았을 때에야 적군이 비로소 깨달아, 우왕 좌왕 진지가 무너졌다. 적군 만여 명을 목베고 남녀 십만 명을 포로로 잡고 그 아들 첩라시(疊羅施)를 사로잡고 의성공주(義成公主)를 죽였다. 힐리는 도망쳐 달아났는데, 대동도(大同道) 행군총관인 장보상(張寶相)이 사로잡아 임금에게 바쳤다. 이리하여 음산(陰山)으로부터 북으로 대새막에 이르기까지의 영토가 개척되었다. 임금은 이 때문에 천하에 대사면을 내리고 백성들에게 닷새 간 먹고 즐길 음식을 하사했다.
  어사대부(御史大夫) 소우(蕭瑀)가 정을 탄핵하여, 군사를 거느리는데 규율이 없고 병사들을 풀어 노략질을 했으며 보물을 잃어버렸다고 말했다.

  임금이 천천히 말하기를『수(隋)의 사만세(史萬歲)는 달두(達頭)칸을 격파했는데도 상을 받지 못하고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짐은 그렇게 하지 않으리라. 공의 죄를 사면해 주고, 공의 업적을 기록하겠다.』라고 하였다. 이에 정을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로 승진시키고, 비단 천 필을 내리고, 식읍을 늘려 500호에 이르도록 해주었다. 얼마 있다가 말하길『예전에 그대를 참소하는 이가 있더니, 짐은 이제야 깨달았도다.』라고 하며, 비단 이천 필을 더 내리고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로 옮겨 주었다.
  정은 정사(政事)에 참여하여 의논할 때마다 조심조심 마치 말을 못하는듯하여, 침착하고 후덕하다는 칭송을 들었다. 이때에 열 여섯 도(道)에 사신을 파견하여 풍속을 순찰하게 했는데, 정이 기내도(機內道) 대사(大使)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마침 발에 병이 나서, 늙어 귀세해 달라고 임금에게 간청했다. 임금이 중서시랑(中書侍郞)인 잠문본(岑文本)을 보내 성지(聖地)를 내려 말하길『자고로 부귀로운 데도 멈출 곳을 아는 자는 대개 적었으니, 아무리 질병으로 고생을 하고 있더라도 오히려 힘써 벼슬길에 나아가고자 하지요. 그런데 지금 공께서는 법도를 이끌어 내시니, 짐이 깊이 하례하오. 공의 미덕을 완성시켜 일대의 사표가 되게 하고자 하니, 공의 말씀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소이다.』하고 하였다. 이에 검교특진(檢校特進)을 배수하고, 집으로 돌아갈 때에 천 종류의 예물을 하사하고, 여기에 타는 말 두필을 덧붙여 내렸다. 봉록과 하사품, 국가 관직과 소속 관리 등도 모두 폐하지 않았다. 만약 병이 조금이라도 차도가 있으면, 사흘에 한번이라도 문하중서(門下中書)에 나와 정사를 잘 다스리도록 보살피게 했다. 덧붙여 만수무강 하라는 지팡이 영수장(靈壽杖)을 하사했다.
  얼마 지나서, 토곡혼(吐谷渾)이 변방에서 도적질을 하였다. 임금이 시종신하에게 말하기를『정이 능히 다시 일어나 장수가 될 수 있을까?』라고 하였다. 정이 와서 방현령을 보고 말하길『내가 비록 늙었지만 이번 일만은 감행하겠소.』임금이 기뻐하여 서해도 행군대총관(行軍大總管)으로 삼고, 임성왕 도종(任城王 道宗)·후군집(候君集)·이대량(李大亮)·이도언(李道彦)·고증생(高甑生)등 다섯 총관의 군대를 모두 정에게 예속시켰다. 군대가 복사성(伏俟城)에 주둔해 있을 때에 토곡혼이 그들의 풀 무더기를 다 불태우고 퇴각하여 대비천(大非川)에 보루를 쌓았다. 장군들은 의논하여, 봄풀이 아직 싹트지 않았으니 말들이 허약한 상태라 전쟁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정은 적진으로 깊이 들어가는 계책을 쓰기로 결정했다. 마침내 적선산(積石山)을 넘어 수십 차례 큰 싸움을 벌인 끝에, 많은 수를 죽이고 사로잡았으며 그 나라를 왕폐케 하니, 사람들은 대부분 항복하고 토곡혼 복윤(伏允)은 근심스레 얼굴을 찡그린 채 스스로 목을 매 죽었다. 정은 새로 대녕왕(大寧王) 모용순(慕容順)을 세우고 돌아왔다. 고증생(高甑生)의 군대가 염택도(鹽澤道)로부터 약속보다 늦게 도착하자, 정이 약속을 적은 문서를 보이며 그를 힐책했다. 서울로 돌아온 후, 증생은 이를 원한으로 삼아 광주장사(廣州長史) 당봉의(唐奉義)와 함께 정이 반란을 꾀했다고 고발했다. 유사(有司)가 진상을 조사했는데 그러한 사실이 없자, 증생등을 무고죄로 다스렸다. 그러나 정은 대문을 굳게 닫아걸고 자숙하며, 손님이나 친척의 방문을 일체 사절하고 돌려보냈다. 위국공(衛國公)으로 고쳐 봉해졌다. 정의 아내가 죽자, 임금은 조서를 내려 무덤을 옛날 위청(衛國公) 곽거병(藿去病)의 고사대로 하도록 하고, 철산(鐵山) 적석산(積石山)의 형상을 본뜬 궁궐을 지어 정의 업적으로 드러내도록 하고,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로 진급시켰다.
  임금이 장차 요나라를 정벌하려할 때에, 정을 불러들여 말하길『공은 남으로는 오(吳)를 평정하고 북으로는 돌궐을 격파했으며 서로는 토곡혼을 토벌했는데, 오직 고구려만은 아직 복종시키지 못했으니, 정벌할 뜻이 있소?』라고 물었다. 정이 대답하기를『예전에는 천자의 위엄을 빌어 촌척(寸尺)의 공이나마 세울 수 있었으나, 지금은 늙고 또 병들었습니다. 그래도 폐하께서 정녕 버리지 않으신다면, 병도 저절로 나을 듯 합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임금은 정의 노쇠함을 가엾이 여겨, 쫓아 토벌하러 가겠다는 뜻을 허락하지 않았다.
  무덕(武德) 23년에 병이 위독해 지자, 임금이 정의 집에 친히 납시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길『공은 짐의 평생의 친구며 또 국가에 공적을 세운이요. 지금 병세가 이와 같으니, 짐은 그대를 위해 걱정하고 있소.』라고 했다. 죽으니 79세였다. 사도(司徒)와 병주도독과 깃털 덮개, 북과 피리를 하사하고, 소릉(昭陵)에서 장사 지냈다. 시호를 경무(景武)라 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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