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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25년(1995)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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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의 일대기 : 천하광구의 大道

천하광구의 大道


         

<증산의 생애와 사상에서 요약>

 

▲ 시루산 전경

 


  상제님께서는 본가에 돌아오자 부친으로부터 선령들의 공명첩(空名帖)을 받아 갖고 모두 불사르셨다.

  이것은 낡은 것을 불사르고 새 것을 맞이하는 개벽이다. 묵은 것은 이제 새 것으로 바뀌는 것이다. 집안의 식구들이 신위를 모시고 옛 것만을 자랑으로 삼는 것은 지난 날의 일이고, 선령들의 공명을 등에 업고 있으면 당사자도 따라서 공명을 세운 자가 되는 것은 앞날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양반의 기운은 묵은 기운이고, 새로운 기운은 척을 푼 곳에서 솟는 것이다. 공명첩은 조상의 뼈를 울거먹는 것이고, 공대(恭待)와 공손(恭遜)을 모르고 자랑과 교만과 멸시의 표본인 것이다. 공명첩을 불사르신 것은 이 세상에서 미천(微賤)을 없애고, 억눌린 자를 풀어놓아 상등인(上等人)으로 높이는 첫 공사였다.
  상제님께서는 신축년 겨울에 본댁에서 또 하나의 공사를 행하셨는데, 창문에 종이를 붙이지 않고, 부엌에 불을 지피지 않고, 홑옷으로 식음을 전폐하기를 아흐렛 동안을 계속하셨다. 이 동안에 동리 사람이나 집안 식구들이 그 방 앞으로 드나들지 못하고, 들에 새들도 날아 들지 못했다.
  그제야 상제님께서는 모든 공사에 필요한 고통스러운 일들을 마치셨다.

  그러나 정씨 부인께서는 이러한 사정을 알지 못했다. 어느날 부인은 남편이 되고 아버지가 되어 주기를 간곡하게 바랬다. 『이제 그만 돌아 다니시고 집에서 남과 같이 재미있게 살림이나 하사이다』고 아내로서 호소했다. 인간으로서 삶에 지친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한 여인의 남편이나 한 집안의 가장으로 머무르실 수가 없었다. 『그렇게 적은 말이 어디에 있소. 천하를 위하려는 사람은 개인의 집 일을 돌보지 않소. 제갈량(諸葛亮)이 성공하지 못한 까닭은 뽕나무 8백 그루와 박전(薄田) 십오경(頃)을 아꼈던 데에 있었소』라고 설유하시고, 『그런데 어찌 천지를 바로 잡고 세계의 창생을 건지려는 나더러 가사에만 머물러 있으라고 권하시오』하셨다.
  해는 바뀌어 임인년이 되었다. 강세하신지 三十三년. 이 해에 전주부중과 전주 우림면 하운동(夏雲洞) 사이를 왕래하시면서 약제를 쓰지 않고, 병마에 시달리는 생민들을 돌보셨다. 그 길목은 한 사람이 겨우 걸을 정도로 좁고 나무수풀이 길가에까지 우거져 있는 벽촌이다. 이슬만 내려도 길은 질퍽해져서 행인들의 발걸음을 무겁게 했다. 장마철이라도 되면 길은 개울이 되고 만다.
  이 벽촌에 김형렬이 살고 있었다. 그는 이전부터 상제님과 지면이 두터웠다. 동학란이 일어났을 때 상제님을 한적한 곳으로 인도하였다. 상제님께서 광구천하의 공사를 펴신다는 말을 전해 듣고, 형렬은 상제님께서 자기 집에 계셔 주시기를 간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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