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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26년(1996)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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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수 신명의 생애 : 경감(耿弇) 神明열전

경감(耿弇) 神明열전

 

                 

             

  경감의 자는 백소(伯昭), 부풍군(扶風郡) 무릉현(茂陵縣) 사람이다. 그 조상들이 무제(武帝)년간에 관리로서 2천석(石) 이상의 녹봉을 받는 사람들을 이사케 했을 때 거록(鉅鹿)으로부터 이사를 와 무릉에 살게 되었다. 경감의 아버지 황(況)의 자(字)는 협유(俠游)로 경서에 밝아 랑(郞)이 되었으며, 왕망(王莽)의 종제(從弟) 왕급(王伋)과 함께 안구선생(安丘先生)에게서 노자(老子)를 배웠다. 이런 인연으로 후에 삭조(朔調)의 군수가 되었다. 경감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아버지의 업(業)을 익혔는데, 군위(郡尉)가 기병들을 훈련시키느라 깃발을 세우고 북을 치며, 말 타고 화살 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을 보고는 군대의 일을 좋아하게 되었다.
  왕망이 패하고 갱시가 즉위하였을 때 갱시 휘하의 여러 장수들이 각 구역을 관할하면서 너 나할 것 없이 위세와 권력을 멋대로 휘둘러 군수나 현령들을 걸핏하면 갈아치웠다. 경감의 아버지 경황도 왕망에 의해 군수가 되었기에 심기가 편할 수가 없었다. 이때 경감의 나이가 스물 하나였는데 이에 경감은 주서(奏書)를 들고 갱시에게로 가 재물을 바치고 자구책을 마련하는 것이 좋겠다고 얘기했다.
  경감이 송자(宋子)에 이르렀을 때 왕랑이 성제의 아들 자여(子與)를 사칭(詐稱)하면서 한단(邯鄲)에서 군대를 일으켰다. 이에 경감을 따르던 관리 손창(孫倉)과 위포(衛包)가 도중에 공모(共謀)하여 말하길『유자여(劉子與)는 성제의 정통인데 이 길 포기하여 그에게로 가지 않고 멀리 어디로 갈 것인가?』라 하였다.

  경감이 칼을 어루만지며 이르길『자여는 도적들에 의해 피폐되어 마침내는 항복한 포로가 되고 말았소. 나는 장안(長安)으로 가서 제후들과 함께 어양(魚陽), 상곡(上谷)의 병마(兵馬)로 진영을 가다듬게 하고 다시 태원(太原), 대군(代郡)으로 나와 몇 수 십일이 걸려서라도 돌기(突起)들을 징집하여 오합지졸들 깔아뭉개기를 마른 나뭇가지 꺾고 썩은 고기 잘라내듯 해버릴 것이오. 그대들이 거취(去就)를 어떻게 해야 잘 하는 것인지를 모르는 것을 보니 족멸(族滅)이 멀지 않은 듯하오.』라고 했으나 손창과 위포는 끝내 따르지 않고 왕랑에게 투항했다.
  경감이 도중에 광무가 노노(蘆奴)에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북으로 말머리를 돌려 광무를 배알했는데 광무가 그를 머물게 하여 문하리(門下吏)로 삼았다. 경감이 호군(護軍) 주우(朱祐)에게 말하기를 돌아가 군대를 징발하여 한단을 평정해보겠다고 했다. 이 말을 광무가 전해 듣고 웃으면서 말하길『어린 아이가 큰 뜻을 품고 있구먼.』하며 기특하다고 했다. 이로 인해 자주 불러들여 격려하고 위로했다.
  경감이 광무를 따라 북행(北行)하여 기(機)에 이르렀을 때 한단으로부터 온 군대가 당도하게 되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이에 광무는 남쪽으로 되돌아가고자 하여 관속(官屬)들을 불러 대책을 논의했다. 이때 경감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우리의 군대가 남쪽으로부터 올라왔는데 다시 남쪽으로 내려간다는 것은 안될 일입니다. 어양태수(漁陽太守) 팽총(彭寵)은 공(公)의 읍인(邑人)이고 상곡태수(上谷太守)는 저의 아버지입니다. 이 두 군(郡)에서 징병하여 활 잘 쏘는 병사 만여 기(騎)만 확보하면 한단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광무의 관속들은 진정 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죽더라도 오히려 남쪽으로 머리를 돌려야 하는 것이거늘 어찌 적들의 포대기 속으로 들어간단 말인가?』라 하였다. 광무가 경감을 가리키며 이르길『저 사람이 우리의 북행을 주도할 것이다.』라고 하여 군영의 북행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기(機)에서 반란이 일어나 광무는 어쩔 수 없이 남쪽으로 내려가게 되었고 관속들은 각기 흩어졌다. 경감은 상곡군의 창평현(昌平縣)으로 가 아버지를 찾아뵙고 부탁하기를 구순을 동쪽으로 보내 팽총과 약조를 맺게 하고 각기 돌기(突起) 2천 필(匹)과 보병 천명씩을 거느리고 오도록 했다. 마침내 경감은 경단(景丹)과 구순 및 어양의 군대를 합군하여 남행을 개시했다. 지나가면서 왕랑 휘하의 대장(大將), 9경(九卿), 교위(校尉) 이하 4백여 급(級)을 격참하여 인수(印綬) 125개, 부절(舵節) 2개를 획득하고 3만여 명의 목을 베었다. 이리하여 탁군(檻郡), 중산(中山), 거록(鉅鹿), 청하(淸河), 하간(河間) 등의 군(郡)에 딸린 스물 두개의 현(縣)을 평정시키고 광아(廣阿)에서 광무에게로 향했다. 이때에 광무는 막 왕랑을 공격하려고 하였는데 두 군(郡)의 군대가 광무를 구원하러 온다는 전갈이 있자 왕랑의 진영이 매우 두려워하였다. 얼마 안 있어 경감 등이 군영으로 가 광무를 배알했다. 광무가 경감 등을 접견하며 이르길『어양, 상곡의 사대부들과 함께 대공(大功)을 이루어주길 바라오.』하고는 배알하러 온 장수들을 편장군(偏將軍)으로 삼고 돌아가 군대를 이끌고 오도록 했다. 또 광무는 경감의 아버지 경황에게 대장군과 흥의후(興義候)라는 직책과 호(號)를 부여하고 경황 스스로가 편장(偏將)과 비장(裨將)을 둘 수 있도록 했다. 경감 등은 마침내 광무를 따르며 한단을 함락시켰다.
  이때 갱시가 대군(代郡)의 태수 조영(趙永)을 불렀으나 경황이 조영에게 부름에 응하지 말도록 권고하고 그를 광무에게로 보냈다. 광무가 조영을 보내 군(郡)의 태수직을 다시 맡도록 하여 조영이 대군으로 돌아갔으나 대군에서는 장영(張曄)을 시켜 성을 장악하고 모반하였다. 게다가 흉노가 오환적(烏桓賊)을 불러들여 원군(援軍)으로 앉혀두고 있었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광무는 경감의 아우 경서(耿舒)를 복호장군(復胡將軍)으로 삼아 장엽을 치게 하여 이겼다. 이에 조영은 다시 태수가 되었다. 이때 오교적(五校賊) 20여만이 북쪽에서 상곡(上谷)을 노략질하고 있었는데 경황과 경서 부자가 연병(連兵)하여 공격하였다. 도적들은 패하여 경계 밖으로 달아났다.
  갱시가 광무의 위세와 명성이 날로 성(盛)함에 군신(君臣)들이 의아해 하며 염려하고 있음을 알고 사신을 보내 광무를 소왕으로 옹립했다. 그리고는 광무로 하여 공(功)이 있는 휘하 장수들을 이끌고 장안으로 돌아갈 것을 종용했다. 한편으로 묘증(苗曾)을 유주목(幽州牧)으로 보내고 위순(韋順)은 상곡태수로, 채충(蔡充)은 어양태수로 각각 보내어 북부지방을 통할하도록 시켰다. 이때 광무는 한단궁(邯鄲宮)에 머물면서 온명전(溫明殿)에서 줄곧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경감이 광무의 거실로 들어가 해지기를 기다렸다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작금에 갱시가 실정(失政)하여 군신들은 음란(淫亂)하며, 장수들은 기내(機內)에서 날뛰고 귀척(貴戚)들은 도성(都城) 안에서 휘저으며 다니고 있습니다. 천자(天子)의 명(命)이 성문을 나설 수 없음에 각 지역의 목(牧)이며 태수들이 제멋대로 하여 백성들은 좇을 바를 알지 못하고, 사인(士人) 또한 감히 안위(安位)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도적들이 재물을 노략질하고 부녀를 겁탈하는가 하면 패물을 가진 자는 살아서 돌아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백성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마음으로 빌고 있습니다. 다시금 왕망의 시절을 생각해 보십시오. 또, 동마적(東馬賊), 적미적(赤眉賊)의 무리조차 수십만에 달하는데 성공(聖公)께서는 그 정도의 군대도 이룰 수 없는 형편이니 그 파국이 멀지 않았습니다. 공(公:광무)께서는 앞서 남양(南陽)에서 거사(擧事)하여 백만대군을 깨뜨리셨으니 이제 하북(河北)을 평정하신다면 천부(天府)의 땅을 수중에 넣는 셈이 될 것입니다. 의(義)로써 평정하는 것임에 외침이 있으면 응하는 소리가 있을 터, 천하라도 능히 격문을 돌려 평정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천하는 지중(至重)하므로 타성(他姓)으로 하여 얻게 해서는 아니 됩니다. 듣자니 사신이 서방(西方)으로부터 와 병사(兵事)를 멈추도록 한 것 같은데 따르지 마셔야 합니다. 지금은 관리와 병사들이 많이 죽어 군원(軍員)이 부족한 듯하니 바라건대 제가 유주(幽州)로 돌아가 정병을 크게 징발한 뒤에 대계를 의논했으면 합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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