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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27년(1997)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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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절후 신명의 생애 : 추분(秋分)절후 관장하는 정지절(程知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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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분(秋分)절후 관장하는 정지절(程知節)

 

                

                

  정지절(程知節)은 본명이 요금이며 제주(濟州) 동아(東阿) 사람이다. 말 타고 창 쏘는 데에 뛰어났다. 수(隋) 말엽에 공향에서 도적 떼가 일어나자 지절(知節)이 병사 수백 명을 모아 고을을 지켰다. 후에 이밀(李密)을 섬겼다. 이밀은 병사 팔천 명을 뽑아 네 명의 표기장군(驃騎將軍)에게 예속시키고 이를 다시 좌·우로 나누어 스스로를 보위케 하였는데 늘 상『이로써 백만 군대를 당해낼 수 있다.』라고 말하곤 하였다. 지절은 표기군(驃騎軍)중의 한 부대를 맡았는데 임금의 총애가 특히 두터웠다. 왕세충(王世充)이 이밀과 싸울 때에 지절은 내기군(內騎軍)을 맡아 북망(北邙)지역에 진영을 쳤고 단웅신(單雄信)은 외기군(外騎軍)을 맡아 언사(偃師) 지역에 진영을 쳤다. 세충이 웅신(雄信)을 습격하자 밀(密)이 지절과 배행엄(輩行儼)을 보내 돕도록 했다. 행엄이 날아온 화살에 맞아 말에서 떨어졌는데 지절이 그를 구하러 달려나가 적병 수명을 죽여 물리치고 행엄을 끌어안고 쌍말을 몰아 달려 나왔다. 추격병이 창으로 찌르려 하자 지절은 그 창을 빼앗아 찍어버리고 추격병을 죽여 위기를 모면했다. 후에 이밀이 패배하자 세충의 포로로 잡혔는데 세충의 위인 됨을 싫어하여 진숙보와 함께 탈출하여 진왕부(秦王府)의 좌삼통군(左三統軍)을 배수 받았다. 왕을 좇아 송금강(宋金剛), 두건덕(竇建德), 왕세충(王世充)을 무찌르고 아울러 좌일마군총관(左一馬軍總管)을 맡았으며 적의 깃발을 빼앗고 적의 성에 제일 먼저 오른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기에 그 공로로 숙국공(宿國公)에 봉해졌다.
  정관(貞觀) 7년에 은태자(隱太子)의 참소를 받아 강주자사(康州刺史)로 폄직되었는데 진왕(秦王)에게 아뢰어 말하기를『대왕께서 오른팔 왼팔과 같은 신하를 없애 버리신다면 비록 몸을 오래도록 보전코자 하신들 가능하겠습니까? 지절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감히 대왕의 곁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일이 평정되자 태자의 우위솔(右衛率)을 배수 받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무위대장군(右武衛大將軍)으로 옮겨졌는데 실제 봉토가 칠백 호에 달했다. 정관(貞觀)중에 노주도독(蘆洲都督) 좌령군대장군(左領軍大將軍)을 역임했으며 노국(盧國)으로 고쳐 봉해졌다.
  현경(顯慶) 2년에 총산도(蔥山道) 지역의 행군대총관(行軍大總管)을 배수받고 하로(賀魯)를 토벌했다. 군대가 달돈성에 주둔해 있을 때에 오랑캐 수 천 명이 나와서 항복하였고 지절이 그 성주를 잡아죽이니 하로가 이 때문에 멀리 달아나게 되어 군대가 돌아온 후 연루되어 면직 당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주자사(岐州刺史)로 다시 임명되었다. 늙음을 이유로 사양했다. 죽어서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익주대도독(益州大都督)이 증수되었고 소릉(昭陵)에서 장사지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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