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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39년(2009)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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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典經』속 역사인물 : 맹자(孟子)

맹자(孟子)

 

                                                                                                 글 교무부

   

  맹자(孟子, B.C.372년경~B.C.289년경)는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추(鄒)나라 사람으로 자(字)는 자여(子輿, 또는 子車)이고, 이름은 가(軻)이다. 그가 태어난 곳은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추현(鄒縣)이었다고 전한다. 그의 생몰연대와 가계(家系)는 정확하지 않으며 대략 주열왕(周烈王) 4년에 태어나서 주난왕(周王) 26년까지 살았다.

  맹자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교육에 대한 관심이 지극한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처음 맹자와 그의 어머니는 공동묘지 근처에서 살았는데, 맹자는 매일 묘지에서 행해지는 장례의식을 흉내내었다. 이것을 본 맹자의 어머니는 맹자의 앞날을 깊이 염려하여 시장 근처로 이사를 갔다. 그러자 맹자는 물건 파는 상인들의 모습을 따라하며 노는 것이었다. 그래서 맹자의 어머니는 글 읽는 소리가 들리고 예법을 가르치는 학교 근처로 옮기기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맹자는 제기(祭器)를 배열하고 예(禮)를 갖추는 의식을 따라하며 놀았다. 맹자의 어머니는 안심하고 비로소 그곳에 정착하였다. 이와 같이 맹자의 어머니가 자식의 교육을 위해 세 번 이사하였다는 것에서 맹모삼천(孟母三遷)이라는 말이 생겼다.

  그렇게 성장한 맹자는 후에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문인으로부터 10여 년간 공부하였으며 공자의 사상을 충실히 받들게 되었다.

  한편 맹자가 살던 전국시대(戰國時代)는 천자, 제후, 대부로 이어지던 주(周)나라의 봉건주의가 무너지고 제후들이 무력으로 패권(覇權)을 다투던 시기로 당시 전국칠웅(戰國七雄)01으로 불리는 제후국들은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위하여 침략과 전쟁을 일삼았다. 그와 같은 혼란 속에서 사대부들은 권세(權勢)와 부(富)를 탐했고 백성들은 굶주림과 죽음을 면하기에 급급했다.

  이러한 시기에 각국에서는 허다한 사상가들이 나타나 각자의 주장을 관철(貫徹)시켜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으려고 동분서주(東奔西走)하였다. 이 시기를 제자백가(諸子百家) 시대(時代)라 한다. 하지만 성인의 사상을 근본으로 삼아 인심을 바로 잡으려 했던 맹자는 백가(百家)의 학설들이 오히려 세상을 더욱 혼란스럽게 하는 또 다른 하나의 요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백가의 학자들 중에서 특히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을 비판하였다.

  양주는 위아설(爲我說; 오직 자기만을 위하는 마음)을 주장하였는데, “내 몸의 털 하나를 뽑아 온 천하가 이롭게 된다 하더라도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한 양주의 학설을 비판하였다. 당시의 혼란한 시대상으로 볼 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위아설은 일면 당연한 일이었으나 다만 맹자는 그 극단적인 이기주의를 비판한 것이다.

  그리고 묵자는 겸애설(兼愛說;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는 것)을 주장하였는데, 만약 묵자의 차별없는 사랑을 실천하려 한다면 현실적으로 남의 부모와 내 부모를 똑같이 사랑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자신의 부모를 남의 부모처럼 보게 되어 부자(父子) 간의 천륜(天倫)을 버려야 한다. 이에 대하여 맹자는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는데, “묵씨는 겸애하니 이는 아버지가 없는 것이며, 아버지가 없고 군주가 없으면 이는 금수(禽獸)이다.”라고 하였다. 유가(儒家)는 내 부모를 섬기는 것을 미루어서 남의 부모에까지 미치도록 하는 차별적인 사랑을 가장 현실적이며 타당한 덕목으로 보았다. 그러나 맹자의 비판처럼 아버지가 없다는 것은 자식의 도리를 다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자식의 도리를 다할 수 없으면 천륜에 위배되고 그것은 금수와 같다는 것이다. 맹자는 이러한 묵자의 차별 없는 사랑의 비현실적인 면을 강하게 비판한 것이다.

  맹자는 무력에 의한 정치인 패도(覇道)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주장하였다. 왕정(王政)이란 요순(堯舜) 이래 성왕(聖王)이 세상을 다스리던 법을 말한다. 맹자는 공자가 주장한 인(仁)에 의(義)를 더하여 백성을 근본으로 삼아 제후들의 무제한적인 이욕(利慾)의 폐해를 경계하였다. 그가 주장하는 인의는 『맹자』 첫 머리에 양혜왕(梁惠王)과의 대화에서 이(利)에 대한 집착이 옳지 못함을 지적한 부분에서 잘 나타난다.

 

 


  “선생께서 천리(千里)를 멀다 않고 이렇게 오셨는데 무엇으로 이 나라를 이롭게 해 주시겠습니까?”
  “왕께서 하필이면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단지 인의(仁義)가 있을 뿐입니다.”

  “왕께서 이익을 생각하면 대부(大夫)들은 내 집안을 이롭게 할 것을 생각할 것이고, 사(士)ㆍ서인(庶人)들은 내 몸을 이롭게 할 것만 생각하게 되어 상하가 서로 이(利)를 취한다면 나라가 위태로울 것입니다.”

 

 


  맹자가 이렇게 말한 것은 극단적인 이(利)의 추구가 세상을 어지럽힌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왕도(王道)의 실천을 위한 실제적인 정책으로 농사에 힘쓰게 하는 것과 학업을 장려할 것을 들고 있다. 조세와 형벌을 가볍게 하고 농사짓는 시기에 전쟁을 피하여 백성의 안정된 생활을 보장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교육을 진흥케하여 인륜도덕(人倫道德)의 도리를 밝혀 “산 사람을 부양하고 죽은 사람을 장사지내는 데 유감없이 하는 것”을 강조하고 이것을 왕도정치의 시작이라 하였다.

  맹자는 사람의 성품을 선하다고 보고 그것을 물에 비유하여 설명하였는데, “사람의 본성이 선한 것은 물의 성질이 아래로 내려가려는 것과 같다”고 보았다. “물에 힘을 가하여 억지로 방향을 바꿀 수 있으나 그것은 물의 본성이 아니다.”고 하면서 인간을 적극적으로 신뢰하는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사람이 제 마음을 다하면 자기의 본성을 알게 되고 자기의 본성을 알면 하늘을 알게 된다.”고 주장하며 사람의 성품이 본래 하늘로부터 부여된 천성임을 말하였다. 그가 말하는 성선(性善)은 인륜의 합리적 근거이며 동시에 실천도덕과 수양(修養), 그리고 올바른 정치의 기초 근거이기도 했다.

  그리고 맹자의 성선설은 모든 사람에게 불인지심(不忍之心)이 있다는 것을 근거로 한다. 이것은 남에게 잔인하게 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불쌍하게 생각하는 측은지심(側隱之心), 부끄럽게 생각하는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하여 남에게 주려는 사양지심(辭讓之心), 그리고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 시비지심(是非之心)의 사단(四端)으로 구체화되었다.

  맹자는 사단을 인간 본성의 단서 혹은 발단으로 설명하였다. 맹자는 사람의 마음을 완전한 도덕심(道德心)으로 함양하기 위해서 끊임없는 수양(修養)이 필요함을 주장했다. 맹자는 “우주만물의 도가 모두 나의 본성 속에 갖추어져 있으므로 항상 안으로 자신을 반성하여 살피고 성실하게 하라.”고 말하며 인간의 본성은 선한 것이며 악(惡)을 행하는 것은 본심이 외물(外物)에 의해서 가려지기 때문이라고 역설하였다. 따라서 그의 수양론은 타고난 덕성을 계발하고 연마하여 외물(外物)에 의해 가려진 마음을 찾는 데 있었다.

  이러한 수양의 구체적인 방법으로 사단과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를 것, 그리고 욕망(慾望)을 적게 가질 것과 지언(知言)02의 능력을 기를 것을 제시하였다. 사단의 마음을 발전시키면 선(善)을 행하는 능력이 강대해져서 물욕(物慾)의 침해를 배제하는 훌륭한 현인(賢人)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호연지기는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찬 지극히 크고 강한 원기(元氣)를 뜻하며, 의(義)와 도(道)에 짝지어 함양되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옳은 일을 계속해서 행함으로써 얻어지는 공명정대한 기(氣)이다. 이 경지에 도달하면 천지에 부끄러움이 조금도 없으며 부귀(富貴)ㆍ빈천(貧賤)도 그 마음을 움직일 수 없고 위세로도 그 기개를 굽힐 수 없는데, 그런 사람을 대장부(大丈夫)라고 하였다.

  공자에서 시작된 유가(儒家)는 나라를 안정시키고 세상을 구하겠다는 취지를 갖고 있었는데, 맹자 또한 유학의 이론을 학문으로서만 그치지 않고 적극적인 정치적 주장으로 세상을 안정시킬 것을 생각하였다. 그래서 양(梁)나라, 제(齊)나라 등 여러 나라를 주유하며 자신의 포부를 펼치고자 하였으나 그의 사상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혼란한 세상에 자신의 뜻을 펼치기 어렵다고 생각한 맹자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만장(萬章) 등의 제자들과 『시경』ㆍ『서경』, 그리고 공자(孔子)의 사상을 정리하여 『맹자』 7편을 저술하였다.

  맹자 이후 유학은 전국시대 중ㆍ후기에 이르러서는 영향력 있는 학파가 되었다. 그러나 맹자의 운명은 역사의 복잡한 변천과정을 거치면서 여러 차례 부침(浮沈)을 겪었다. 그가 죽고 천여 년이 지난 송대(宋代)에 와서야 이정(二程)03ㆍ주희(朱熹) 등의 도학자들에 의해 『맹자』는 『논어』와 함께 정식으로 경(經)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원나라 문종(文宗) 원년(1330년)에 맹자는 “추국아성공(鄒國亞聖公)”에 봉해졌다.

맹자의 사상은 공자를 이은 것으로 인간 본성의 긍정적인 믿음을 기반으로 성인(聖人)의 학문을 전하려 한 것이었다. 그의 사상 중에 사단이나 호연지기 등은 시대를 넘어 수양(修養)의 지침이 되고 있다. 맹자는 하늘이 인간에게 부여한 선(善)을 회복하게 하는 것을 자신에게 부여된 대임으로 자각한 사상가로 그의 사상은 아직도 우리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01 칠웅: 진(秦), 초(楚), 연(燕), 제(齊), 조(趙), 위(魏), 한(韓)

02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서 그 잘못을 판단하는 능력으로서 사람의 마음을 해치는 네 가지 말인 피사(辭, 편벽된 말)ㆍ음사(淫辭, 방탕한 말)ㆍ사사(邪辭, 간사한 말)ㆍ둔사(遁辭, 회피하는 말)를 가려내어 그것에 주관이 흔들리지 않는 것을 말한다.

03 북송시대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인 정호(程顥)ㆍ정이(程) 형제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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