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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37년(2007)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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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기행문 : 천년 세월에도 변함없는 산천

천년 세월에도 변함없는 산천

 

 

글 중앙종의회 의장 정대진

 

  2006년 10월 19일 중국 상해로 향하면서 무한의 황학루(黃鶴樓)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절로 뛰는 걸 어쩔 수 없었다. 이런 설레임은 부산 부전회관을 출발해 김해국제공항에 도착한 이후에도 계속됐다. 12시 10분 이륙한 비행기는 불과 1시간 20분 만에 상해 포동공항에 안착했다. 상해는 중국의 세 번째 큰 도시로 인구는 서울의 두 배인 2000만 명에 달한다.

  상해는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몇 년 전 중국을 방문한 김정일이 아시아에서 제일 높은 동방명주탑(東方明珠塔 : 468m)에 올랐다가 남긴 ‘천지개벽’이란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공항에서 포동지구로 달리는 차창 밖으로 펼쳐진 풍경은 뉴욕의 맨하튼에 버금가는 마천루였다. 1990년까지 논이었던 곳은 88층짜리 하얏트 호텔이 들어섰고 건축 중인 또 다른 건물은 101층이라는 말에 빠른 변화를 실감했다. 그런 고층 빌딩이 무려 160개나 된다고 하니 개혁과 개방의 상징도시로 용틀임하고 있는 상해는 ‘상전벽해의 도시’임에 틀림없었다.

 

 

 

  동방명주탑 밑에 있는 상해 역사박물관을 둘러본 뒤 홍교공항에서 무이산(武夷山)으로 가는 비행기에 탑승했다. 문득 무이구곡시(武夷九曲詩)의 ‘구름다리를 한 번 지나니 소식이 없더라(虹橋一斷無消息)’ 는 구절이 떠올랐다. 옥황상제님께서 한번 무지개 다리를 딛고 가신 후로 소식이 없었다는 뜻으로, 주회암(朱晦菴)도 구곡시를 옥황상제님 도수에 맞추어 절묘하게 지었으니 주자도 도통을 하신 분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몇 백 년 후에 무극(無極)의 대도(大道)가 열릴 것을 어떻게 알았으랴’ 하는 의문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10월 20일 오전 7시 30분에 일어나 빵과 흰죽으로 요기를 마치고 무이산에서 가장 큰 바위굴인 수렴동(水簾洞)을 구경했다. 수렴동의 까마득한 절벽 아래에 있는 삼현사(三賢祠)를 둘러보고 서둘러 숭양계(崇陽溪) 구곡(九曲)으로 향했다.

  강물은 평온했다. 아가씨가 모는 통대나무 배에 몸을 의지한지 얼마 되지 않아 ‘4곡’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야말로 칼로 자른 듯한 천인단애(千斷崖)의 절벽이었다. 정상의 큰 바위와 거대한 호수 같은 강이 어울려 한 폭의 동양화를 연출하고 있었다.

  이어 ‘5곡’으로 가는 뱃전에서 또다른 정상부분에 큰 바위 두 개, 또는 세 개가 보였다. 뱃사공 아가씨에게 바위의 이름을 물으니 모자바위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이윽고 도착한 ‘5곡’에도 호수의 우측에 엄청나게 큰 암석으로 된 바위산이 4개 있는데 갱의대(更衣臺)라고 씌어져 있었다.

  또 한 곡, 두 곡 지나더니 ‘9곡’이라고 강벽에 새겨져 있고, 그 아래에는 코[鼻]바위가 우뚝 서 있었다. 암반으로 첩첩이 쌓여 태산 같은 산봉우리를 이룬 무이구곡산은 2003년도에 가본 금강산보다 더 험준한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사진 : 무이산 절경

 

 

  배는 계속해서 물위를 미끄러져 갔다. ‘6곡’도 신선이 사는 선경의 세계인 듯 계곡 양쪽을 막은 높은 절벽은 여전했다. ‘3곡’을 지나 옥녀봉(玉女峯)을 만났는데 무이산에서 가장 수려하다. 그 앞은 ‘2곡’이었다. 계곡을 지나 또다시 넓은 호수와 같은 곳을 만나니 그 건너편에 모자바위와 제왕바위, 왕관바위 등이 나타났다. 곧이어 만난 ‘1곡’에는 구곡계라고 새긴 큰 글씨가 인상적이었다. 총 1시간 50분 동안의 ‘그림같은 29㎞’ 구곡여행은 평생 잊지 못 할 추억거리를 안겨주었다.

  선착장에 내려 무이궁으로 갔다. 무이고대명인관에 들어서니 신농씨를 비롯한 송·당·명대의 유명한 분들의 그림이 걸려있었다. 입구의 좌측에는 송대의 주희 선생이 직접 심었다는 송계(宋桂)라는 수령 900년의 계수나무가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10월 21일 오전 6시에 일어나 식사를 한 뒤 천유봉으로 버스를 타고 가던 도중 무이서원에 들렀다. 내부에는 학달성천(學達性天)과 이학정종(理學正宗)이라는 현판이 걸려있었다. 주자 성리학의 종산답게 공자와 주자를 모시고 유생들이 앉아 강의 듣는 전시물도 눈에 띄었다.

  이윽고 도착한 천유봉 입구 절벽에는 벽립만인(壁立萬)이라 쓰여져 있어 ‘절벽의 고산’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입구에서 가마를 타고 천유봉까지 돌계단으로 된 험한 길을 올랐다. 정상에 이르는 2.5㎞구간에는 오르는 관광객과 내려가는 관광객이 뒤엉켜 복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마침내 천유봉 정상에 오르니 발 아래 만학천봉의 천인단애한 산봉우리들이 자신을 좀 봐달라는 듯 하늘을 향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무이구곡의 대나무배가 아주 작게 보였다. 그 많은 배들은 강물을 흘러 9곡에서 1곡까지 갈 것이다.

  무이산봉의 만학천봉도 아름다운 경치지만 굽이굽이 흐르는 협곡의 구곡강도 얼마나 아름다운가. 옛날 주자 선생이 후세의 세계, 즉 미래를 예측하는 통찰력이 얼마나 대단하였기에 이 강으로 정역 세계의 변화를 알았는지, 도통한 주자 선생 생각에 잠시 옷깃을 여미었다. 가히 주자 선생은 성리학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다.

  가마꾼의 독촉으로 하산한 뒤 대홍포(大紅袍)를 파는 무이산 대홍포 다원을 돌아봤다. 대홍포는 홍콩에서 2kg당 200위안에 경매되는 중국 명차로 움이 돋을 때 적색으로 나온다고 해서 홍포로 이름 지어졌다.

  “무이산아, 부디 이 늙은이를 한 번 더 불러다오.” 하문(厦門)으로 가기 위해 무이산을 떠나려니 발걸음이 무거워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언제 다시 이곳을 찾아올 수 있을 것인가 생각하니 설움에 복받쳐 가슴이 아팠다. 나의 7대조 명암 선생은 무이산을 한번도 직접 와보시지도 않았음에도 무이구곡시(武夷九曲詩)를 지으셨다. 또 주희 선생의 그림을 그려 벽에 붙이고 아침ㆍ저녁으로 알현했었다. 책에서만 보았던 무이구곡을 75세가 되어 처음 찾았으니 어찌 감회가 새롭지 않으랴.

  하문공항에 당도해 버스로 복건성(福建省)의 하문시에 들어섰다. 하문은 대만의 금문도와 불과 600m밖에 안 된다.

 

▲ 사진 : 삼협댐

 

 

  10월 22일 하문빈관 호텔 인근의 천왕전(天王殿) 사찰과 고랑도(鼓浪島)를 둘러보고 돌아온 뒤 호북성(湖北省) 무한시의 황학루로 가기 위해 하문공항으로 갔다. 하문에서 무한공항까지는 1시간 20분 걸렸다. 기내에서 외부로 나오다 마주친 대형 황학루 사진에 가슴이 뛰었다. 마침내 무한의 명물 황학루를 보게 되는구나 감개무량했다.

  먼저 삼협댐 관광을 위해 고속도로 300km구간을 네 시간 달린 끝에 댐 입구에 도착했다. 1인당 200위안씩 입장료를 낸 뒤 댐 선착장까지 가는데 또 한 시간이 걸렸다.

  10월 23일 오전 6시 30분에 일어나 선상에서 조반을 먹고 삼협댐 관광에 나섰다. 2층 선상에서 바라본 풍경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끝없이 펼쳐진 호수와 협곡을 이룬 댐 주위는 모두 험준한 산악지형이고 특히 집들이 산재한 산위의 마을은 인상적이었다. 이 산에서 저 산으로 연결된 거대한 철교와 호수를 수놓은 수백 척의 대형 선박이 어울려 더욱 장관이었다. 제방 길이 2,300여m, 높이 185m인 삼협댐의 수면 높이는 156m이고 수심은 약 100m이며 제일 깊은 곳은 무려 140여m에 달한다. 양자강을 막아 거대한 댐을 건설해 세계인을 놀라게 하고 수력 발전, 홍수 예방은 물론 세계적 관광지의 ‘일석삼조’를 거두었으니 중국의 저력은 대단하다.

  선상에서 바라본 협곡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산봉우리가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곳에 지어진 수많은 집들의 정체가 궁금해 안내인에게 물으니, 댐을 건설하며 산위로 집단 이주시킨 농민들의 집이라고 한다. 농민들은 그곳에서 고구마, 옥수수, 감자, 참깨, 콩 등 여러 농사를 짓고 있으며 특히 귤도 많이 생산하고 있었다.

  1협곡에서 2협곡으로 접어드니 강안이 아주 협소해졌고 무명봉의 연속이었다. 산봉우리가 너무 많아 봉우리마다 일일이 이름을 달지 않았다는 말에 전적으로 수긍했다. 양쪽 협곡에는 죽림이 우거져 있었다. 죽엽이 많아 옛날에는 팬더가 많이 살았다고 한다. 2협곡 중간의 커다란 동굴 윗쪽은 신농(神農)씨가 사다리를 걸고 이산 저산 다니며 농사를 지었다는 신농계(神農溪)였다.

  장강 삼협 신농계의 선착장에서 목선으로 갈아탔다. 토족이라는 소수민족이 키를 잡고 3명이 노를 저어 상류로 갔다. 토족 아가씨는 이곳 산의 높이가 3,000m라고 설명했다. 그곳엔 5~6층 규모의 아파트가 즐비하고 경사진 밭에는 고구마를 심은 곳이 많았다. 밭의 넓이는 대략 열 평에서 적게는 반 평이었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횡으로 된 우리나라의 밭골과 달리 신농계 밭골은 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렇게 험준한 산비탈에서 어떻게 농사를 짓고 있는지 농민출신인 나도 상상을 초월하는 농사법인 것 같았다. 신농씨가 사다리를 타고 이 산 저 산으로 다니면서 농사를 지었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윽고 다시 처음에 탔던 신농계 1호선을 타고 양자강으로 되돌아왔다.

  삼협댐 양쪽 해발 2,000m의 산을 가로질러 건설한 장대한 홍교(무지개다리)를 보니 무이구곡시의 ‘홍교일단무소식(虹橋一斷無消息)’이라는 구절이 떠올라 중국 대륙의 광활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층암절벽의 천인단애한 암벽은 소설 등 책 속에서 어렴풋이 알았지만 ‘앞을 보아도 절경, 뒤를 돌아보아도 기경’인 수백m의 절벽은 처음 보는 터였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유현덕(본명 유비)이 살다가 또 서거한 백제성(白帝城)은 산 정상에 자리 잡고 있었다. 백제묘문을 거쳐 유비와 제갈공명, 관운장, 장비 등이 모셔져 있는 것을 본 뒤 제갈공명이 하늘의 천기를 살폈다는 관성정(觀星亭)을 유심히 살폈다.

  10월 24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일찌감치 아침을 먹고 하선 수속을 마친 뒤 버스에 앉으니 아침 7시였다. 마침내 꿈에도 그리던 중국 강남 3대 누각 중 하나인 황학루(黃鶴樓)를 찾아갔다. 잘 가꾸어진 정원 주위에는 모택동의 초상화와 사정(詞亭)이, 그리고 그 건너편에는 옛날 유명한 중국 시인들의 시문이 일행을 맞이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원래 이곳은 신(辛)씨 여인이 운영했던 주점이었는데, 어느 날 찾아온 한 도사가 그녀를 위해 벽에 한 마리 학을 그려 주면서 학이 내려와 도와줄 것이라고 일러 주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손님들이 끊이지 않았고 장사가 잘 됐다. 10년이 지나 도사가 다시 찾아와 피리를 불고는 노란 학에 걸터앉아 하늘로 올라갔다. 이에 신 씨 여인은 이 일을 기념하기 위해 이곳에 누각을 짓고 황학루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 황학루

 

 

  황학루 앞의 기석관(奇石館)에 들르니 신기한 괴석들이 1백여 점이 전시되어 있었다. 누각 아래의 각필정(筆亭)은 시선이라 불리우는 이백(李白)이 황학루에 시를 한 수 읊으러 왔다가 최호(崔顥)가 쓴 시에 감탄하여 “더 수정할 것이 없는 시” 라 외치며 붓을 던져버린 곳으로 유명하다.

 

옛 사람 황학 타고 이미 가버려/ 땅에는 쓸쓸히 황학루만 남았네/

한번 간 황학은 다시 오지 않고/ 흰구름 천년을 유유히 떠 있네/

개인 날 강에 뚜렷한 나무 그늘/ 앵무주(鸚鵡洲)에는 봄 풀들만 무성하네/

해는 저무는데 고향은 어디인가/ 강의 물안개에 시름만 깊어지네

 

  최호가 지은 시를 읊으며 황학루를 둘러보았다. 옛 건축 설계사들의 안목도 뛰어났던 듯, 황학루의 층수는 외부에서 보면 5층이지만 5층에서 도보로 아래로 내려오니 10층이었다. 5층의 내부는 벽화와 단청이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고 서쪽은 무창진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동쪽에는 북경에서 연결된 철로가 보이고 서쪽에는 양자강이 흐르는데 그 건너편에는 한양과 무한 제일장강대교가 보였다. 4층 내부는 고(古) 황학루의 벽화와 봉황 목조각 외에 다수의 목조각이 있었다. 고 황학루의 벽화는 청나라 때의 유명한 화가가 그린 귀중한 벽화다. 황학루는 1983년도에 신축되었으며 뱀[巳]산 위에 세워졌다. 3층의 내부는 옛 중국의 악비인·송상문ㆍ맹호연ㆍ이태백ㆍ최호ㆍ왕유ㆍ유우석ㆍ백거이ㆍ두목 등 유명한 역대 시인들의 벽화로 가득했고, 2층에는 당ㆍ송ㆍ원ㆍ명나라와 청대에 걸쳐 황학루의 중건 모습과 현대 황학루의 모형도가 있었다. 무한(武漢)의 역사적 유물인 황학루를 정부 차원에서 중건하면서 국가 최고 지도자가 현지를 답사한 뒤 대지를 정했다는 말을 들으며 역사적인 유물을 숭상한다는 것은 본받을 만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006. 1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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