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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20년(1990)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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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 언덕(言德)과 무자기(無自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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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言德)과 무자기(無自欺)

 

『말은 마음의 외침이고 행실은 마음의 자취로다』

 

    

고남식 <교령>

 
실천적 각성
  우리 도인들은 상제님 도주님의 진리에 따라 수도하는 사람들이다. 이는 상제님께서 천지 ・ 우주 세계를 조화하시고, 도주님께서 종통을 계승하시어 우리가 상제님에 의해 새롭게 지어진 우주의 법리에 우리의 몸과 마음을 맞추어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음에 대한 확고부동한 믿음에서 나온 결과이다. 이것은 곧 대순진리가 이제까지 인류 역사상에 출현했던 어떠한 진리보다 넓고 심오하며, 현재인류, 우주가 처한 제반 어려움을 극복하고 새로운 우주, 새로운 인류 세계를 조화할 수 있는 유일한 진리에 대한 자각을 의미한다.
  실로 우리의 도는 『천지신명이 모여 상제가 아니면 천지를 바로잡을 수 없다 하므로』(공사 1-9) 상제께서 강세하시어 천지공사를 역사하셨고 이의 결과로 나타난 것으로 『옛날에도 지금도 없으며 남이 것을 계승함도 아니요, 운수에 있는 일도 아니요, 오직 상제께서 지어 만드신』(공사 1-2) 것이다. 상제께서는 시루산에서 공부하시다가 이따금 우시기도 했고(행록 2-9), 화천하시기 직전에는 『이제 온 누리가 멸망하게 되었는데 모두 구출하기 어려우니 어찌 원통하지 않으리오』하시며 크게 슬퍼하셨다.(행록 5-24) 여기서 상제께서 강세하신 목적과 인류를 구하고자 하신 심정을 가슴 저리게 느낄 수 있게 된다. 또 상제께서는 『너희들은 손에 살릴 생자를 쥐고 다니니 득의지추가 아니냐. 마음을 게을리 하지 말지어다. 삼천(三遷)이라야 일이 이루어지느니라.』(예시 87)라고 하심으로써 도인들에게 주어진 의무와 책임, 역할을 밝혀주셨다. 우리 도인들에게는 상제님에 의해 주어진, 마땅히 해야만 하는 본분과 책임이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도를 믿고 닦아 나가는 과정에서 과연 어떻게 해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즉 실천적 각성의 문제이다. 『운수는 열려도 자신이 감당치 못하면 본 곳으로 되돌아 가기도하고 혹 다른 사람에게 옮겨지기도 하리라. 잘 믿을지어다』(교법 2-38)라는 말씀을 보면, 상제께서 부여하신 일을 감당할 만한 노력과 실천의 중요성이 깊이 느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를 위해 항시 상제님의 말씀에 비추어 우리들 자신을 반성하고, 새롭게 발전해 나가야 할 것이다. 『나의 말이 곧 약이라. 말로써 사람이 마음을 위안하기도 하며 말로써 사람의 마음을 거슬리게도 하며 말로써 병든 자를 일으키게도 하며 말로써 죄에 걸린자를 풀어주기도 하니 이것은 나의 말이 곧 약인 까닭이니라. 충언이 역이로되 이어행(忠言逆耳利於行)이라. 나는 허망한 말을 아니하나니 내말을 믿으라』(교법 2-1) 『대인의 말은 구천에 이르나니 또 나의 말은 한마다도 땅에 떨어지지 않으리니 잘 믿으라』(교법 2-2) 『나이 말은 늘지도 줄지도 않고 여합부절이니라』(교법 3-3) 이상의 말씀은 상제께서 밝혀주신 진리와 그 실천덕목에 대한 진실한 믿음과 그 이행을 강조하신 것이다. 그 실천덕목 중에서 언덕(言德)의 의미와 본질을 간단히 생각해 보았다.


언덕, 그 진정한 의미
  말은 인간이 가진 의사소통수단 중에 가장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눈짓, 손짓, 표정 등 행동으로 직접 의사표시를 하는 경우는 그 전달수준에 한계가 있고 말이나 글로 보완되지 않으면 완전하게 의사를 전달할 수 없다. 또 글이란 것은 전달범위가 넓으나 어느 정도 지식을 갖추어야 원활하게 사용할 수 있다. 이것은 즉각적・충동적・일회적일 수가 없기 때문에 대체로 신중하게 사용되고 회수할 수도 있는 것이어서 생활상에 큰 무리가 없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말이란 것은 누구나 자유자재로 쓸 수 있고, 즉각적・직접적・충동적・일회적이기 때문에 경솔하게 사용하기 쉽고 무심코 던진 한 마디는 다시 쓸어 담을 수도 취소할 수도 없어 큰 문제점이 종종 생긴다. 그렇기 때문에 일상생활에서 가장 척의 불씨가 쉬운 것이 말이고, 또한 화합이 수단으로 가장 수월한 것도 바로 이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속담이 있는 것처럼 말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즉 인간 대 인간, 그리고 그러한 개개인의 인간이 집단적으로 모여 형성된 사회에서 말의 쓰임새는 바로 행・불행과 화합・반목의 실마리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말」에 「덕」을 붙이는 것이 곧 언덕(言德)이다. 『상제께 김갑칠이 항상 응석하여 고집을 부리나 상제께서 잘 달래어 웃으실 뿐이고 한 번도 꾸짖지 아니하시니 그는 더욱 심하여 고치지 않는도다. 형렬이 참지 못해 「저런 못된 놈이 어디 있느냐」고 꾸짖으니 상제께서 형렬에게 이르시기를 「그대의 언행이 아직 덜 풀려 독기가 있느니라. 악장제거 무비초 호취간래 총시화(惡將除去無非草 好取看來總是花)라, 말은 마음의 외침이고 행실은 마음의 자취로다. 남을 잘 말하면 덕이 밀려서 점점 큰 복이 되어 내 몸에 이르나 남을 헐뜯는 말은 그에게 해가되고 남은 해가 밀려서 점점 큰 화가 되어 내몸에 이르니라」고 하셨도다』(교법 1-11) 이 내용에 따르면 말과 행동은 그 근원처가 바로 마음(心)이고, 언덕을 잘 가지면 그 덕이 나에게 되돌아오고 그 반대는 결국 그 반대의 결과를 낳게 된다. 『뱀도 인망을 얻어야 용이 되나니 남에게 말을 좋게 하면 덕이 되느니라』(교법 1-26)라는 말씀에서 재차 언덕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그러나 이러한 말씀은 까닭 없이 남을 칭찬하고, 무조건 높이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 사람이 실행하느냐에 개의치 말고 있는 그대로 일러주라』고 하신 것처럼 어디까지나 언덕이란 경위와 이치를 근본으로 하여 공명정대해야 하는 것이다. 공치사는 상대를 허영과 자만에 빠뜨려 결국 곤경에 처하게 만든다. 충언이 귀에는 거슬리나 행동과 처사에 도움이 된다는 말을 다시 한번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또한, 남을 비방하는데 대해서 『사람마다 제 노릇 제가하는 것인데 제 몸을 생각지 못하고 어찌 남의 시비를 말하리오』라고 깨우쳐 주신 것(교법 1-20), 그리고 『나를 모르는 자가 항상 나를 헐뜯나니 내가 만일 같이 헐뜯어서 그것을 갚으면 나는 더욱 어리석고 용렬한 자가 되니라』고 하신 것(교법 1-27)은 까닭 없이 나와 상관없는 일로 마음을 흩트려 남을 비방하지도 말고, 설사 남이 나를 욕하는 것도 그 자신이 이미 나를 모르고 비방하는 한계성을 노출시키고 있는 것이니 그것을 애써 반박하여 다투지 말라는 말씀이다. 그러면 언덕을 잘 가질 수 있는 근본은 무엇일까.

  
언덕은 무자기에서
  앞에서 악장제거 무비초 호취간래 총시화(惡將除去 無非草 好取看來 總是花)라. 말은 마음의 외침이오 행실은 마음의 자취로다…』(교법 1-7)에 나타나듯이 말은 곧 마음의 소리가 바깥으로 분출되어 나오는 것이므로 언덕의 근원은 바로 마음(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언덕을 잘 가지려면 바로 마음이 먼저 바로서야 한다. 즉 우리의 목적 중의 하나인 무자기(無自欺)에 점차 가까이 갈수록 언덕이 향상될 것은 당연하다.
  중요한 것은 먼저 내 마음을 바로 세우는 것(正心)일 것이다. 왜냐하면 경위와 이치를 밝히고 이행하는 일은 먼저 내가 올바르게 서 있어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기울어져 있으면 아무리 상대의 언행과 처사가 옳아도 옳게 보일 수 없고 온갖 사물과 일들도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판단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마음(心)을 거울 혹은 렌지에 비유한다면, 거울이 깨끗하지 못할 경우 아무것도 밝게 비출 수 없고, 제대로 사물을 투영하여 바라볼 수 없을 것인 즉, 항시 상제님의 말씀과 도주님의 이법, 도전님 훈시를 모시고, 직접 실천 수도하는 과정에서 점차 부족함을 보완해 가야 하리라고 생각된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치 않을 경우, 발전은 있을 수 없다. 무자기는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이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을 속이고 자신에게 속는 경우를 끊임없이 경험하게 된다. 자신의 마음의 깊이와 넓이가 달라짐에 따라 그 이전의 자신은 가식과 허영, 자만, 자존으로 무장되어 있었다는 것이 발견되고, 이러한 과정은 계속 반복된다. 그러므로 『죄가 없어도 항시 죄가 있는 것처럼 조심하라』는 상제님의 말씀에서 느껴지듯이 자신의 부족함을 갈수록 세밀하고 치밀하게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근본적으로 자신을 성찰 하는 부단한 노력 속에 전개된다.
  나의 생각만 옳다고 느끼고 남의 생각은 무시하는데서 또 내주장이 항시 남의 주장보다 뛰어나다는 자만심에서 결국 남을 무시하게 되어 언덕을 잃게 된다. 모든 일을 내 중심이 아니라 상대방 중심으로,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해야, 겸허하고 성실한 자신의 본질을 회복하고 무자기에 가까이 접근해 갈수 있을 것이다. 또 이를 통해 올바른 언덕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믿음과 실천・수행에는 자기 부정의 고통이 따른다. 자기 잘못을 수긍하고 인정해야만, 그것을 보완 발전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실로 마음을 간직하기란 죽기보다 어려우니라』(교법 2-6)란 말씀처럼 일심(一心), 정심(正心), 진심(眞心), 성심(誠心)을 계속 유지・지속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천지 종용지사(天地 從容之事)도 자아유지하고(自我由之)하고 천지분란지사(天地 紛亂之事)도 자아유지 하나니……』(교법 3-27) 즉, 모든 것을 자신의 허물과 잘못으로 느끼고, 자신을 합리화하지 않는 가운데 무자기의 마음이 싹트고, 그럼으로써 언덕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상생화합이 우주에 영향을
  우리의 도는 인간이 사사롭게 만든 사도(邪道)가 아니라 구천상제님께서 천지신명(天地神明)을 대동하여 우주의 병겁을 소멸하고 질서를 바로잡는 공사(公事)로서 성립된 신도(神道)이므로, 이 도(道)를 수행하는 의미도 다른 일들과는 상당히 큰 차이점을 나타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의 수도는 단순히 한 개인의 일정한 경지를 성취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상제께서 짜 놓으신 후천선경으로의 우주완성과 인간완성의 도수에 따라, 하늘과 땅과 사람이 모두 혼연일체로 성숙,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늘・땅・사람이 막혀 있는 한계상황에서 삼계(三界)가 하나로 조화되게 하는 수도인 것이다.
  『선천에서는 인간 사물이 모두 상극에 지배되어 세상에 원한이 쌓이고 맺혀 삼계를 채웠으니 천지가 상도를 잃고 갖가지의 재화가 일어나고 세상은 참혹하게 되었도다. 그러므로 내가 천지의 도수를 정리하고 신명을 조화하여 만고의 원한을 풀고 상생의 도로 후천의 선경을 세워서 세계의 민생을 건지려 하노라……』(공사 1-3)에 나타나듯이 선천에서는 상극으로 인해 막힘이 있고 재화가 생겼으므로 상생의 법리로서 이를 치유한다고 하셨다. 우리의 도는 하늘・땅・사람이 혼연일체 된 도이므로 인간적 차원에서의 상생・화합 곧 하늘과 땅, 전 우주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언덕(言德)을 잘 가지라』는 상제님의 말씀은 단순히 인간적 차원의 윤리를 의미하는 것만은 아닌 것이다. 즉 무자기를 근본으로 언덕을 잘 가져 척을 짓지 않고, 대화로서 상호이해를 도모하는 것은 곧 인간 개개인, 사사물물의 해원을 넘어서 우주의 전체적인 해원의 한 바탕이 되고 우주 질서 확립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수도는 나 자신은 물론 전 우주의 척을 푸는 일이며 전 우주의 해원과 완성을 위한 것이다. 인간은 수도를 거쳐 인존으로 완성됨으로서 천지인(天地人)이 함께 완성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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