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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19년(1989)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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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보 1면 종무원장 말씀 생애와 사상(13) 종단소식 논문 문단 천계탑 대진연합회 내가 본 대순진리회 알립니다

내가 본 대순진리회 : 종교인에게 바라는 삶의 태도

종교인에게 바라는 삶의 태도

        

대순진리회에 대한 판단과 관심의 기준은 내게 있지 않고 대순진리회 자체에 있는 것.

 

 

서울대학교 종교학교수 정진홍

        

  불행히도 나는 대순진리회를 잘 알지 못한다. 주장의 내용, 의례적 실천, 공동체적 모습이 언뜻 언뜻 눈에 뜨이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하나의 정리된 체계로 서술하기에는 나는 너무 아는 것이 없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사회에 구체적으로 현존하는 「종교」일 뿐만 아니라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종교의 현존의 의미를 천착해야 하는 것은 상식인의 당연한 태도여야 되리라고 생각한다.

  나 자신이 아무런 정리된 이해를 가지고 있지 못하면서 이러한 당위를 주장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우리들 모두가 지니고 있는 종교에 대한 태도이다. 우리는 이상스럽게도 종교에 대한 두 가지 태도를 무감각하게 지니고 있다. 하나는 비종교인의 자리에서 종교를 맹목적으로 평가절하 하려는 태도이다. 종교는 비과학적이라든지, 구시대의 유물이라든지, 일종의 강박적 노이로제라든지, 착취의 수단이라든지 하는 주장들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견해들은 비록 그 주장들의 부분적 진실성을 부정할 수 없다 하더라도 그것을 종교에 대한 온전한 인식이라고 여기기에는 그 삶의 태도 자체가 너무 진지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종교는 비과학이 아니라 과학을 수용하면서도 그것을 넘어서는 의미의 세계이다. 또 종교는 역사발전의 어느 단계의 현상이 아니라 인간의 의식에 이미 내재되어 있는 본연적인 삶의 태도이다. 뿐만 아니라 종교는 심리적인 현상만으로 환원시킬 수 없는 윤리적 태도나 역사적 결단 등을 아울러 지니고 있다. 더구나 종교를 계급간의 착취수단으로 단정하는 것은 특정한 시대, 특정하게 제도화된 종교가 지녔던 가시적인 사회기능의 부분적 진술을 통하여 종교전체를 일반화하려는 논리적 모순을 그것 자체 안에 이미 지니고 있어 이를 추종하는 것은 처음부터 지적(知的) 부정직(不正直)을 범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종교를 거의 단세포적 반응을 통하여 평가절하 하려는 것은 종교에 대한 태도가 문제가 아니라 그런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삶에 대한 태도 자체가 의문시 되지 않으면 안될 그런 문제를 지닌다. 그러므로 종교에 대한 이러한 상식 이하의 태도를 우리는 깊이 성찰할 필요가 있다.
  또 다른 하나의 태도는 종교를 이미 가지고 있는 종교인의 경우이다. 물론 이 때 그 종교인들이 자기가 선택하고 결단한 종교에 대하여 자기를 봉헌하고 그 종교의 가르침과 제반 규범을 준수하며, 그 궁극적 진리에 의하여 살아가려 노력하면서, 자기 종교를 절대시하는 것은 당연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종교인은 마땅히 그래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맥락에서 종교인의 태도는 아주 특이한 모습을 띄게 된다. 자기 종교와는 다른 종교를 무조건 그른 종교라고 여기는 태도가 그것이다.

  이 문제는 상당히 심각한 것이어서 오늘날의 종교자체를 중대한 위기에 몰아 넣고 있다. 이 문제는 두 가지 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는, 다름을 그름으로 여기는 인식자체의 문제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다름은 현상적 지각에서 말미암은 것이고, 그름은 가치판단에 근거한 규범적 요청에서 비롯한 귀결이다. 따라서 그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다름이 존중되고, 그 다름에 대한 충분한 인식이 이루어질 때 겨우 가능한 것이 옳음 또는 그름의 판단이다. 그러므로 다름에 대한 인식 없이 그름이라는 판단에 이르는 것은 그것 자체가 도덕적으로 규탄 받아야 할 성숙하지 못한 인식 태도이다.

  그런데도 다르다는 생각에 직접적으로 그것을 그르다고 판단하는 것은 독선적인 배타, 곧 지적 기만이고, 의도적 폭력일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러므로 다름 곧 그름이라는 등식은 전혀 인식론적 차원에서나 실천적 차원에서나 그 정당성을 승인 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종교인의 종교에 대한 태도에서 이 같은 모습을 너무 흔하게 만나곤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태도를 거의 자연스럽게 살게 하는 그 깊은 뿌리는 무엇일까?
  둘째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문제이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자기 종교가 절대적이라는 신념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하나의 종교인이 자기 종교를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면 그것 자체를 비난할 근거는 없다. 하지만 그런 태도 때문에 결국 다름을 그름으로 등식화 해버리는 과오를 범하게 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 절대성의 개념을 좀 더 밝힐 필요가 있다.

  우리는 흔히 절대성을 양적인 개념으로 이해한다. 그것은 당연히 「하나」여야 한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종교의 현존은 절대성이 둘, 또는 셋이 되는 것이고, 결국 그래서 절대성은 여럿 중의 하나가 되어 참된 하나일 수 없다는 데서, 다른 종교의 현존자체를 부정하거나 그른 것으로 판단해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종교적 절대성이란 어떤 객체적 현상의 양적 절대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가시적인 주장이나 제도, 혹은 역사적 전승체를 절대시하는 것도 아니고, 그 신앙의 대상을 객관적으로 절대시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사실들이 절대적인 것으로 수용되게 된 것은 실은 자신의 경험의 절대성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실제 삶을 살펴보면 경험의 절대성은 모든 사람들의 삶 속에 제각기 다 담겨 있는 것인데도 결코 상호 갈등 하거나 충돌하지 않고 공존한다. 다만 그 경험을 가시적인 것으로 만들어 객체적 절대성으로 주장할 때부터 문제는 야기되는 것이다. 물론 삶의 경험이 구체화되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객체화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경험의 절대성이 그 객체화 된 사물의 절대성과 이어지는 것은 또 하나의 필연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때 야기될 갈등이나 충돌은 그 객체화 된 현상의 차원에서 두려고 하면 되지를 않는다. 오히려 그 갈등만이 증폭될 뿐이다. 이때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그것이 경험의 절대성에서 비롯한 것임을 터득하면서 그 문제를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여기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한다고 해보자. 그 남자에게 그 여자는 절대적인 여자이다.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경험적 절대성이 그 여자의 객체적 절대성으로 주장되어 이 세상에 여자란 그 여자 밖에 없다고 일컬어진다면 그것은 다른 말이 필요 없는 그저 우스운 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여자의 절대성이 사랑하기 때문에 지녀지는 절대성임을 스스로 깊이 터득하고 있다면 다른 남자가 자기의 사랑하는 여인을 그 나름대로 절대적이라고 여기는 일조차도 그윽하게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공감조차 가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성을 양적 개념으로 환원하여 객체화 시키려는 것이 옳은 절대성의 개념일 수 없음을 짐작할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절대성이라는 개념이 단원문화의 전통 속에서 형성된 것이라는 사실을 유념하면서 그 개념어의 용례를 성찰할 필요가 있다. 절대라는 개념이 인간의 의식에 본유적(本有的)인 것이라는 사실이 아직 부정되지는 않고 있다. 그러나 그 문화적 용례는 대체로 단원문화에서 다시 말하면 다원사회가 아닌 문화적 풍토 속에서 등장하고 정립된 것이었음이 점차 분명해지고 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사는 현실은 철저히 복합적이고 그만큼 다원적이다. 그렇다면 이 상황적 맥락에서의 절대라는 개념의 사용은 지극히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절대성은 상재적 절대성이라는 역설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러한 사실들을 조금만 염두에 둔다면 종교인의 종교에 대한 배타 독선적인 태도의 과오는 명확해진다. 그것은 결국은 자기 종교에 대한 배신에 이르는 오히려 반종교적인데 귀착하고 말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태도를 가지게 되면 포교도 선교도 불가능하지 않겠느냐는 반론이 가능하다.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역시 다원상황 속에서의 선교나 포교를 어떻게 재정의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현대의 사회에서 종교의 포교는 자기 종교를 강요하는 것일 수도 없고 권유하는 것일 수도 없다. 가능한 것은 오직 자기 종교의 가르침을 그대로 살면서 당해 사회와 역사를 위한 긍정적인 몸짓으로 그 주장을 실천하는 증언이 있을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종교인의 종교에 대한 태도가 어떻게 잘못을 범하고 있고 어떻게 다듬어져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은 굳이 되 서술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서두에서 밝힌 대로 나는 대순진리회를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가능한 한 그 종교에 대한 편견을 지니지 않는 것이 마땅한 도리일 뿐만 아니라, 그 종교의 참됨과 그렇지 않음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그 종교자체의 가르침을 그들 스스로 실천하고 잇는가 하는 그 여부에 있다고 굳게 믿고 잇다.

  이를테면 해원상생을 가르친다고 했을 때, 나는 그 가르침의 정당성 여부를 논의하고 싶지는 않다. 무릇 어떤 논리로 무엇을 주장하든 일단의 신도를 거느리고 있고 역사 속에서 현존하고 있으며 그렇게 제도적 실체로 있을 수 있는 종교가 불의나 그릇됨을 교리화 할 까닭은 없는 것이다. 모든 종교의 가르침은 늘 그것 자체로 진리이다. 그 표현이나 당대적 적합성의 차이는 있어도 본질적으로 그 주장의 진실성은 여일하다.

  그렇다면 해원상생의 진리성을 묻는다는 것은 지극히 비현실적이다. 중요한 것은 그 주장의 삶을 어떻게 대순진리회가 살고 있느냐 하는 그 현실성이다.

  그러므로 나 자신의 대순진리회에 대한 판단과 관심의 기준은 내게 있지 않다. 대순진리회 자체 안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나는 대순진리회의 「실체」를 그 현실적인 증언의 차원에서 살피며 내 판단을 형성해 갈 것이다.

  그런데 나 자신이 본 대순진리회는 他宗團과는 달리 相生을 펴서 많은 발전을 해온 것으로 알고 있다. 한번 좀더 깊은 관심을 갖고 보아야 할 민족 종단이다.

  사상은 세계적 가르침을 승화한 우주적 가르침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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