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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ㆍ도인 이야기 : 남궁두(南宮斗) (1526∼?)
-海東편-
남궁두(南宮斗) (1526∼?)
때는 조선조 중엽, 지금의 전라북도 옥구군(沃溝郡)의 임피(臨陂)에 남궁두라는 부호가 살고 있었다. 나이 서른에(1555년 명종 10) 진사가 되어 서울에 살고 다만 애첩 하나를 시골집에 두어 농장을 경영하게 했다. 그런데 그 애첩이 남궁두의 당질과 눈이 맞아 간통하였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남궁두가 여러 번 타일렀으나 잘못을 고치지 않자 화가 난 그는 화살로 두 사람을 쏘아 죽이고 죄를 참회하기 위하여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남궁두는 아무런 대꾸 없이 듣고 있었지만 이 말에는 뜨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기의 과거를 마치 본 것처럼 말하고 있지 않는가? 그 날 밤 남궁두는 젊은 중의 침실로 찾아가 사실대로 고하고 정중하게 가르침을 청하였다. 그랬더니 『저는 다만 관상을 볼뿐입니다. 나의 스승께서는 천문, 지리, 관상, 의술 등 여러 방면에 통달하시어 그 사람의 근기에 따라 가르치십니다. 그 분을 만나보십시오. 그분은 무주 치상산(雉嘗山:적상산을 말함)에 계십니다.』하였다. 혹시 하는 마음으로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니 우뚝 솟아 있는 산봉우리 아래 초가 한 채가 절벽을 의지하여 서있었다. 한 늙은 스님이 홀로 앉아 있는데 모습이 마치 마른나무 껍질 같았다. 다 헤어진 장삼을 걸치고 나와 『화상(和尙)의 풍골과 신수가 훤하니 보통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어찌 이런 곳까지 오시었소?』라고 묻는 것이었다. 남궁두는 꿇어 앉아 『우둔한 저는 별 재주가 없습니다. 스승님께서 이인(異人)이라는 말을 듣고 한가지 재주라도 배워 세상에 써 보고자 불원천리하고 스승님을 찾아 2년 동안 헤매던 끝에 가까스로 이곳을 찾게 되었습니다.』하였다. 그러나 그 선사는 『나는 산 속에서 이미 늙어 죽을 날만 기다리는 사람인데, 무슨 재주가 있겠소』하면서 거절하였다. 남궁두는 무수히 절하면서 간절하게 부탁하였으나 선사(仙師)는 방문을 굳게 닫고 다시 나타나지를 않았다. 남궁두는 행랑아래에 엎드려 새벽이 될 때가지 애원하였다. 남궁두는 너무 기뻐 일어나 절하였다. 『그것이면 족합니다. 다른 것을 배워서 무엇에 쓰겠습니까?』스승은 다시 말하였다. 『모든 도술은 무엇보다도 먼저 정신을 모은 뒤에야 이룰 수 있다. 하물며 혼백을 단련하고 마음을 취정(娶精)하여 신선이 되고자 함에 있어서랴! 정신을 모으는 데는 잠을 자지 않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 좋으니 먼저 잠을 자지 않도록 해라.』 『아, 드디어 나도 신선의 관문에 들어서는구나!』남궁두는 감격하였다. 그러나 이 마음이 실패의 원인이 될 줄이다! 욕심이 생기자 몸 내부의 금빛 기운이 머리 위로 솟구치는 것이 아닌가! 남궁두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풀쩍 뛰어 올랐다. 옆에 있던 스승이 지팡이로 머리를 치며 『아아! 아깝다. 성공치 못했구나!』하고서는 편안하게 앉게 하고 기를 안정시켜 몸을 조리 시켰다. 『몇 백년 만에 세상에서 보기 드문 너를 만나 신선의 가르침을 전하였으나 전생의 업보 때문인지 잘 되지 않았구나. 그러나 네가 비록 신선의 반열에 들지는 못했으나 항상 근신하고 여태까지의 공부방법으로 정진한다면 지상선(地上仙)은 될 수 있다. 나와의 인연은 다한 것 같으니 그만 하산하도록 하여라』스승의 이 말에 남궁두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허균과 남궁두는 몇 십일 동안 교분을 맺었는데, 어느 날 남궁두는 홀연히 떠나 그 후로 자취를 알 수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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