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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28년(1998)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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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절후 신명의 생애 : 이세적(李世勣)

이세적(李世勣)

 

            

               

  밀이 반역죄로 죽임을 당하게 되어, 임금이 사신을 보내 밀의 죄상을 들추어 보이게 했다.

  세적이 밀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 지내고자 하니 임금이 허락했다. 세적은 밀을 위하여 상복을 입고 장례기간이 끝나 탈상했다.

  얼마 있다가 두건덕(竇建德)에 의해 함정에 빠져 아버지를 인질로 맡겨 두고 다시 여양땅을 지키러 가게 되었다.

  3년 만에 스스로 혐의를 풀고 돌아왔다. 진왕(秦王)을 좇아 동도(東都)를 정벌할 때에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동쪽으로 땅을 다스림이 호뢰(虎牢)에까지 이르렀고, 정주사병(鄭州司兵) 심열(沈悅)을 항복 시켰다.

  건덕을 평정하고 세충을 포로로 잡아 군대를 정비하고 돌아 왔다.
  진왕은 상장군(上將軍)이 되고 세적은 하장군(下將軍)이 되어 둘 다 황금갑옷을 입고 군용수레를 타고서 종묘에서 승리를 고했다.

  아버지 개 또한 명주로부터 배구(裵矩)와 함께 입조(入朝)하여 본래의 관직을 회복 받았다.

  또 임금을 좇아 유혹달과 서원랑을 격파하고 여러 차례 좌감문대장군(左監門大將軍)으로 옮겨졌다.

  원랑(圓郞)이 다시 반란을 일으키자, 임금이 세적을 하남(河南)지역 대총관(大總管)으로 임명하여 그들을 평정케 했다.

  조군왕(趙郡王) 효공(孝恭)이 부공석을 평정할 때에, 세적을 파견하여 보병 일만 명을 거느리고 회수(淮水)를 건너 수양(壽陽)지역을 정벌케 하고, 강(江) 지역 서쪽의 성벽을 공격하자, 풍혜량(馮惠亮) · 진정통(陣正通)이 차례로 무너지고 공석은 평정되었다.
  태종이 즉위하자 병주도독(幷州都督)을 배수하고, 실제 봉읍 구백 호를 하사했다.

  정관(貞觀) 3년에 통막도(通漠道)의 행군총관이 되어 운중(雲中)지역을 벗어나 돌궐과 싸워 돌궐족을 몰아냈다. 병사를 거느리고 이정의 군대와 통합했다.

  세적이 이에 말하길『힐리(詰利)가 만일 사막을 건너 구씨(九氏) 족에게로 도망가면 잡을 수가 없게 되고, 우리가 만약 군비를 대략 갖추어 그들에게 진격하면 싸우지 않고도 사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정(靖)이 크게 기뻐하며 자기와 뜻이 합치된다고 여기니, 이리하여 계책이 결정되었다. 정이 군대를 이끌고 밤중에 출발하니 세적이 군사를 출동 시켜 뒤를 좇았다.

  힐리가 사막으로 도망가고자 하였으나, 세적의 군대가 미리 사막 입구에 주둔해 있었으므로 건너지 못했다.

  이에 추장이 부락 오만을 거느리고 세적에게 항복해 왔다.
  임금이 세적에게 광록대부(光祿大夫)를 배수하고 병주(幷州) 대도독부 장사(長史)로 가게 했다.

  부친상이 끝나 탈상하고 환궁하자, 영(英)으로 옮겨 봉했다.

  병주를 다스린 16년 동안 위엄 있고 엄숙하다는 칭송을 들었다.

  임금이 일찍이 말하길『양제(煬帝)는 인재를 선발해 그로 하여금 변방을 지키도록 하지 않고, 중원 땅을 수고롭혀 긴 성을 쌓아 이로써 오랑캐를 방비했다.

  지금 짐은 세적을 등용해 그로 하여금 병주를 지키도록 하였는데 돌궐족이 감히 남침하지 못하니, 능력 있는 관리가 성(城)보다 훨씬 낫도다!』라고 하였다.

  세적을 불러들여 병부상서(兵部尙書)로 삼고자 했는데, 궁궐에 도착하기도 전에 설연타(薛延陀)의 아들인 대도설(大度設)이 팔만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이사마(李思摩)를 침략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임금이 조서를 내려 세적을 삭방도(朔方道)의 행군총관으로 삼으니, 날쌘 기병 육천 명을 거느리고 가서 도설청산(度設靑山)을 격파하고, 명왕(名王) 한 명을 목베고 포로 오만 명을 사로잡았다. 이 공로로 세적의 아들 중 한 명이 현공(縣公)으로 봉해졌다.
  진왕(晉王)이 황태자가 되자, 세적에게 첨사(詹事)를 배수하고 우위솔(右衛率)을 겸직하게 하였으며, 얼마 후에는 동중서문하삼품(同中書門下三品)이 되게 했다.

  임금이 말하길『우리 아이가 동궁(東宮)으로 즉위하는데, 그대가 오랜 장사(長史)였으므로 궁궐 일을 맡기는 것이니, 폄점을 당한다고 의심하지는 마시오.』라고 했다.

  세적은 충성을 다 바쳤고, 임금은 그에게 큰 일을 맡길 만 하다고 생각했다. 일찍이 급작스러운 병에 걸렸는데, 의원이『수염을 태운 재로 치료할 수 있다.』라고 하자, 임금이 곧 스스로 자기의 수염을 잘라 약에 섞도록 했다.

  병이 낫자 세적이 입궐하여 임금에게 감사를 드리는데, 머리를 수 없이 조아려 피가 흘렀다. 그러자 임금이『나는 나라를 위하여 한 일이니 무에 감사할 것이 있나?』라고 말했다.

  그런 후에 세적을 궁궐에 머물도록 하고 연회를 벌렸다.
  임금이 좌중을 돌아보며 말하길『짐이 가족을 생각해 보면, 어려서부터 고아로 그대를 바꿀만한 사람이 없다. 공은 옛날에 이밀을 저버리지 않았으니 어찌 짐을 저버리리요?』라고 했다.

  세적이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인하여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흘려 맹세했다. 이윽고 세적이 대취(大醉)하자, 임금이 친히 옷을 벗어 세적을 덮어주었다. 임금이 병이 들자 태자에게 일러 말하길『너는 세적에게 은혜를 베푼 적이 없다 이제 내가 일로써 세적을 내칠 테니, 내가 죽은 후에 곧 그를 복야(僕射)로 임명하거라. 그러면 세적은 필시 목숨을 바쳐 너를 섬길 것이다.』라고 했다.

  그리고는 세적을 첩주도독(疊州都督)으로 임명했다.
  고종이 즉위하자, 세적을 불러들여 낙주자사(洛州刺史)와 낙양궁(洛陽宮) 유수(留守)를 맡도록 임명하고,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동중서문하(同中書門下)로 진급 시키고, 조정의 기밀에 참여케 한 뒤 마침내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로 임명했다.

  영휘(永徽) 원년(元年)에 복야(僕射)직을 그만두기로 청하자 허락했다. 그러나 여전히 개부의동삼사의 자격으로 정사에 참여케 했다.

  영휘 4년에 칙명을 내려 사공(司空)으로 진급 시켰다.

  애당초 태종 때에 이미 능연각에 세적의 초상화를 그려 놓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고종이 다시 그의 형상을 그리도록 명령을 내리고는 직접 서문을 썼다.

  또 작은 말을 타고 동쪽 누대와 서쪽 누대를 출입 할 수 있도록 하고 하급관리로 하여금 하루 한 사람씩 이세적을 배웅하고 전송하게 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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