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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53년(2023)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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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 속 이야기 : 음식 준비에 담긴 정성

음식 준비에 담긴 정성



교무부 김현진




  도전님께서 “우리의 일은 모두 정성으로 이루어지는 것”01이라고 하신 만큼 정성은 우리의 수도 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이다. 이러한 정성은 늘 끊임없이 조밀(調密)하고 틈과 쉼이 없이 오직 부족(不足)함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이른다.02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의 수고로움을 견뎌내고 꾸준히 참된 마음으로 노력해야 하는데 이를 제대로 실천하기 쉽지 않다. 그렇다면 상제님 재세 시 사람들은 어떻게 정성을 들였을까? 정성은 일상의 모든 측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정성 들이는 대상이나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에서 『전경』에는 음식으로 정성 들이는 일화들이 있다. 당시 상제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상제님께서 자기 집에 오시면 음식을 정성껏 대접하였다. 또한, 종도의 집에서 공사 보실 때는 그 집에 사는 종도가 음식을 준비하여 공사를 받들었다. 이 글에서는 음식을 준비하는 그들의 자세에서 드러나는 정성이 우리의 수도 생활에서 어떤 의미로 다가올 수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솥을 팔아서까지 음식을 대접하고자 한 김형렬 종도


  김형렬(1862~1932)은 금구 환평에서 살다가 하운동 제비창골, 다시 청도리로 이사하면서 상제님의 천지공사 기간 지극정성으로 상제님을 모셨다.03 김형렬은 살림이 풍족하지 않아 식량이 떨어질 때가 많았는데, 특히 상제님께서 오실 때 대접할 것이 없어 괴로워하였다.04 이때 상제님께서는 “개문납객(開門納客)에 기수기연(其數其然)이라 하나니 사람의 집에 손님이 많이 와야 하나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이후로 김형렬은 괴로운 마음을 덜어내고 상제님께서 오실 때마다 정성을 다해 모셨다.
  상제님께서는 여러 종도의 집에 두루 다니면서 공사를 보셨다. 대원사에서 천지공사를 마치시고 객망리와 하운동을 왕래하실 때 김형렬의 집에 자주 가셨다. 특히 1902년쯤에 김형렬은 막내아들의 출산으로 먹여 살려야 할 자녀가 6명이나 되었다. 그해 여름은 1901년부터 계속된 극심한 흉년으로 먹을 것이 귀할 때였다.05 이러한 시기에 그는 불평을 품기보다 오히려 가뭄으로 채소의 수확량이 줄어 대접할 것이 없는 것을 걱정하였다. 이후 그는 보리밥을 공양하며 상제님을 모시고 있었다. 추석이 다가오자 상제님께 좋은 음식을 대접하기 위해 쇠솥을 팔고자 하였다.(예시 86절) 당시 가정에서 솥은 중요한 요리도구이자 가족의 안녕을 지켜주는 재물신으로 인식되고 있었음에도06 상제님을 위하는 지극한 마음으로 그리하였다. 이후 김형렬은 2년 연속 흉년에 추위까지 겹친 그해 겨울에도 상제님을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이렇게 김형렬이 남달랐던 것은 없는 살림에도 가진 것을 내놓으며 희생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도전님께서 “우리는 돈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정성이 필요하다”07라고 하셨듯이, 김형렬은 상제님을 모심에 있어서 자신의 안위보다 부족한 것을 걱정하면서 정성 들이고 또 정성을 들이려는 참된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제님께서도 “네가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나를 좇고 금전과 권세를 얻고자 좇지 아니하는도다”(교운 1장 7절)라고 하셨던 것으로 보인다.




여름에 식혜를 준비한 황응종 종도


  상제님께서는 공사에 주로 고기와 술 그리고 단술(식혜)을 사용하셨다.08 고기와 술은 대부분 주막에서 구입하셨는데,09 종도들에게 준비를 명하신 적도 있었다. 박공우에게 공사에 쓰일 술을 빚어놓으라고 하셨고,10 식혜의 경우 박장근에게 1번, 황응종에게 2번 담그라고 하셨다. 이 중에서 겨울에 먹는 식혜를 제철이 아닌 여름에 준비하라고 하셨던 황응종의 사례를 살펴보고자 한다.
  상제님께서는 1908년 여름 어느 날 황응종의 집에서 산하의 대운을 거둬들이는 공사를 보실 때 식혜를 사용하셨다.11 이 당시는 식혜를 만드는 것이 쉽지 않았다. 우선 공사가 이루어진 1908년은 식혜의 주재료인 쌀의 수확이 좋지 않았고12 1년 중 쌀값이 제일 비싼 여름이었다.13 또한, 식혜는 만드는 과정에서 정성이 많이 들어가고 쉽게 상하여 제사나 명절 중에서도 겨울에 주로 만들어 먹던 음식이었으므로 여름에 만들어 먹지 않는 음식이었다.
  식혜는 되게 지은 고두밥에 보릿가루로 만든 엿기름물을 넣어 삭히는 음식으로 정성이 많이 들어갔다. 당시는 엿기름가루를 만드는 데에만 2~3일이 걸렸다. 엿기름가루는 보리를 싹 틔워 말린 후 디딜방아나 돌절구에 넣어 일일이 사람의 손으로 찧어내는 정성이 필요하였다. 이후 고두밥을 짓는 것 또한 쉽지 않았다. 식혜의 맛을 위해 쌀은 당시 주로 먹던 현미쌀에서 좀 더 도정을 해야 했다. 쌀을 더 깎아내기 위해 손으로 일일이 공(功)을 더 들였고 도정된 쌀은 더운 여름날 뜨거운 불 앞에서 장작을 때어가며 찌는 인내가 필요하였다. 고슬고슬한 고두밥을 지어 엿기름물과 섞어 50~60℃의 따뜻한 온도에서 밥알이 삭혀지면 완료되었다. 이렇게 완성된 식혜는 공사에 쓰이기 전까지 계속 살피며 상하지 않도록 한 번씩 끓이는 정성이 필요하였다.
  황응종은 상제님을 따르기 전에 객망리 강씨가에 딸을 시집보낸 적이 있어 강씨 문중 사람들과 친분이 있었다. 그는 상제님의 부친과 동년배였으니 당시 60세가 넘은 나이였다.14 그러한 노인이 가족들과 힘을 합쳐 식혜를 만들기는 여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와 가족들은 식혜를 만드는 동안 불평, 불만을 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상제님께서는 부인 정씨가 불만을 품고서 올린 의복을 입지 않으신 것처럼15 불평, 불만이 깃든 것은 취하지 않으셨는데 황응종이 만든 식혜는 공사에 잘 쓰셨기 때문이다.




49일 동안 떡을 찐 김형렬의 여동생


  행록 1장 29절에서 이선경의 장모이자 김형렬의 여동생16이 49일 동안 정성을 들인 것은 상제님께서 직접 정성 들여보라고 하신 사례이다. 상제님께서 김형렬 여동생의 남편인 이환구에게 49일 동안 정성을 들일 수 있느냐고 물으셨고 부부의 다짐을 받으셨다. 이후 김형렬의 여동생은 매일 목욕재계하고 떡 한 시루씩 쪄서 공사 일에 준비하였는데 떡을 찌기 위해서는 많은 정성이 필요했다.
  김형렬의 여동생이 찐 시루떡의 종류는 알 수 없지만, 당시 순결하고 신성한 것으로 여겨져 의례 행사의 필수음식으로 쓰였던 백설기를 기준으로 살펴보고자 한다.17 당시 쌀은 풍·흉년의 여부와 상관없이 귀하였다. 김형렬 여동생은 떡을 매일 한 시루씩 쪘는데 시루의 크기를 몰라 쌀이 얼마나 들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대신 조선 시대 유일한 여성 실학자 빙허각 이씨가 1809년에 엮어낸 『규합총서』에 멥쌀 1되와 찹쌀 1되가 필요하다고 하였으므로 이를 기준으로 살펴볼 수 있다. 쌀 2되는 대략 3.2kg로 매일 이 정도의 쌀이 들었으면 49일 동안 전체적으로 대략 150kg이나 되는 쌀이 들어감으로 정성 들이는 여건이 쉽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18
  떡은 만드는 과정에서도 정성이 많이 들어갔다. 시루떡은 대개 쌀가루와 고물을 얹어 만들었는데 쌀가루만으로 하기도 하고 고물은 콩이나 팥 등을 첨가하여 만들기도 하였다. 먼저 떡을 만들기 위해서 쌀을 깨끗이 씻어 6시간 이상 충분히 불려야 했다. 그런 다음 소금 간을 하고 가루를 내었다. 불린 쌀은 믹서에 갈아도 여러 번을 갈아야만 곱게 갈 수 있었는데 당시는 디딜방아나 절구로 일일이 빻아야 했다. 쌀을 불린 후 깁체(비단으로 만든 체로 고운 가루를 치는 데 쓴다)에 내리고 입자가 큰 것은 다시 절구에 넣어 빻아 깁체에 거르는 작업을 여러 번 반복하였다. 곱게 빻아진 가루에 물을 내려 수분을 넣어준 뒤 그것을 또다시 깁체에 걸러 곱게 하여 시루에 얹고 솥과 시루 사이에 김이 새지 않도록 시룻번이라 하여 밀가루로 반죽한 것을 틈 사이에 붙인 뒤 불을 붙여 떡을 쪘다. 이를 49일 동안 해야 했으니 다음 날 찔 떡을 위해 다시 쌀을 불리고 가루 낼 준비를 해야 했으므로 49일 내내 온전히 떡 찌는 데에 정성을 다 쏟아야만 했다고 볼 수 있다.




  김형렬 여동생은 이런 상황이 여러 날이 반복되자 심히 괴로워 불평을 품게 되었다. 그날 한 짐 나무를 다 때어도 떡이 익지 않자 매우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상제님께 사과한 후에 비로소 떡이 잘 익어 있었다. 이때 여동생이 비록 불평을 품었지만 “한 짐 나무를 다 때어도 떡이 익지 않아”라는 것을 보았을 때 떡을 찌는 행동은 계속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불평에 관해 도전님께서는 “불평이 많이 일어나면 예가 빠지고 만사불성이 된다” 19라고 하신 만큼 그릇된 일임을 알 수 있다. 이를 살펴본다면 정성에 있어서는 올바른 마음이 중요하며 참된 마음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여동생은 한결같이 정성을 들여 49일을 마치니 상제님께서 친히 부엌까지 가셔서 치하하셨고 그녀는 오히려 정성의 부족을 송구히 여겼다. 이에 상제님께서는 성심(誠心)이 신명에게 사무쳐 오색 채운이 달을 끼고 있다고 하시며 그녀의 정성을 칭찬하셨다. 상제님께서는 김형렬의 여동생이 비록 중간에 불평을 품었지만 허물을 깨닫게 하시어 상제님께 사과하고 다시 정성을 들일 기회를 주셨다. 여동생이 남은 기간 지극 정성으로 떡을 올려 49일을 마쳤음에도 지난날의 잘못을 생각하고 죄송스럽게 여기니 상제님께서 위로까지 해주신 것이다.
  상제님께 좋은 음식을 대접하기 위해 솥까지 판 김형렬과 여름의 더위에도 공사에 쓰일 식혜를 만든 황응종, 떡을 찌다 힘들어 불평을 품었지만 다시 마음을 고쳐먹고 49일간 떡을 짓는 일을 완성한 김형렬의 여동생까지 모두 음식을 준비함에 있어 정성을 다한 사례들이다. 이들의 성심이 신명에게 사무칠 수 있었고 공사에 쓰일 수 있었던 것은 음식을 갖춤에 있어 참된 마음을 가지고 지극한 정성을 다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도전님께서도 “정성이 들어가면 생각지도 않게 일이 되고 일이 확대돼서 원래 계획대로 마무리가 지어지더라. 오로지 정성이 모였을 때 그렇게 된다”20 라고 하셨다. 앞의 일화들에서 살펴본 음식에 대한 정성은 상제님을 모시며 상제님의 공사를 받드는 일로써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들이 음식 준비를 통해 보여준 정성을 되새기고 혹시라도 내 마음이 타성에 젖었는지 스스로 가다듬으며 수도인으로서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은 어떨까 한다.






01 「도전님 훈시」 (1989. 5. 30).
02 『대순진리회요람』, p.16.
03 신상미, 「상생의 길: 김형렬 종도의 행적」, 《대순회보》 108 (2010), p.107.
04 대순종교문화연구소, 『증산의 생애와 사상』 (서울: 대순진리회출판부, 1994), p.234.
05 “전라북도 관찰사 조한국(趙漢國)이 상소하기를, 올해는 극심하게 가뭄이 들어 일종의 재앙이 든 운수를 겪고 있습니다.” 『승정원일기』 고종 38(1901) 음력 8월 19일; “전라북도 관찰사 조한국이 상소하기를, 농사가 흉년이 들어 진정(賑政)이 바야흐로 시급하니, 납부해야 할 자들은 떠돌아다니며 구걸하는 형세가 아니면 생활이 극도로 곤궁한 상황입니다.” 『승정원일기』 고종 39(1902) 음력 7월 20일. 
06 「솥」, 『한국민속대백과사전』 참조.
07 「도전님 훈시」 (1989. 4. 12).
08 공사 1장 6절.
09 당시는 고기를 보관할 수 있었던 냉장고가 없었기에 가축을 키우는 주막에서 직접 잡아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은 주 산업이 농업이었으므로 소의 잦은 도살을 금하는 우금정책을 실시하여 명절이나 특별한 날에만 잡았다. 일부 도심지에서는 이 정책이 잘 지켜지진 않았지만, 농사를 많이 짓는 농지 주변에서는 소를 잘 잡지 않았다. 술의 경우는 종류에 따라 숙성기간이 달라 늘 술이 준비되어있던 주막에서 구입하여 사용하셨던 것으로 보인다. 김대길, 『시장을 열지 못하게 하라』 (서울: 가람기획, 2000), pp.301-305, p.310 참조.
10 공사 3장 20절.
11 이 공사는 황응종의 집에서 행해졌다. 공사에 쓰인 음식은 대체로 공사가 행해지는 집에서 준비하였다. 공사 3장 7절 참조; 종단역사연구팀, 「전경 지명 답사기: 고부 와룡리」, 《대순회보》 196 (2017), p.38.
12 전북 정읍 주변인 부안군 이도면에 여러 해 흉년이 들었다는 내용이 있는 걸로 보아 당시 작황의 상황도 좋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대한매일신보》 1910. 4. 26.
13 전성호, 『장서각 수집 물가사 자료 해제 및 통계』 (서울: 민속원, 2008), p.256 참조.
14 종단역사연구팀, 앞의 글 p.38.
15 행록 2장 12절.
16 김형렬의 여동생과 이환구 사이에는 3남 4녀가 있었다. 그중 장녀 이대순(李大順)의 남편이 이선경(李善慶)인데, 『전경』 행록 1장 29절의 49일 정성 이야기는 김형렬 여동생의 맏사위 이선경의 구술에 의해 채록된 것으로 보인다. 이환구는 결혼하고 처가가 있는 하운동에서 살다가 얼마 후 자신의 고향인 부안군 성근리(現 전북 부안군 동진면 하장리 성근마을)로 갔다고 한다. 대순종교문화연구소, 「상제님의 발자취를 찾아서: 김형렬의 여동생이 들인 49일간의 정성」, 《대순회보》 93 (2009), p.16.
17 최순자, 『한국의 떡』 (서울: 한국외식정보, 2006), p.70.
18 빙허각 이씨, 『규합총서』, 윤숙자 엮음 (서울: 도서출판 시루, 2003), p.180.
19 「도전님 훈시」 (1989. 1. 12).
20 「도전님 훈시」 (1990. 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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