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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단 역사 : 도주님의 부친, 복우(復宇) 조용모(趙鏞模)

도주님의 부친, 복우(復宇) 조용모(趙鏞模)


-무극도 창도 전후 시기의 행적을 중심으로-



교무부 이정만


▲ 도주님 생가터와 회문리, 2018년 11월 5일 촬영


부친(휘 용모)은 조부(祖父)의 유의(遺意)를 승봉(承奉)하여 그 아우(휘 용의ㆍ용서 二인)와 반일운동(反日運動)에 활약하시다. (『대순진리회요람』, p.11)


一九○九년 … 부조전래의 배일사상을 품으신 도주 조정산께서는 … 부친 숙부 등과 같이 만주 봉천지방으로 망명하시어 동지들과 구국운동에 활약하시다. (『대순진리회요람』, pp.11-12)
 
도주께서는 … 청조(淸朝) 말기에 조직된 보황당원(保皇黨員)이란 혐의를 받고 북경(北京)에 압송되었다가 무혐의로 풀려난 엄친
01(도주님 부친)의 파란곡절의 생애에 … . (교운 2장 5절) 


  위와 같이 『전경』과 『대순진리회요람』에 도주님의 부친인 복우 조용모(1877~1951)에 관한 기록이 있다. 이 자료 외에 부친과 관련된 다른 기록을 찾아보면, 만주에서 고국으로 돌아와 우리 도(道)의 일을 하셨던 내용도 발견된다. 주로 부친이 무극도 창도를 전후한 시기에 도주님의 공부와 포덕 사업을 보좌하며 주요한 역할을 하셨다는 것이다. 이처럼 부친은 도에서 중요한 임무를 맡아 수행하셨던 핵심 인물 중 한 분이기에 관련 내용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에 이 글에서는 함안 조씨 문중에서 발간한 서적과 일제강점기의 공문서 등의 자료를 통해 부친의 행적을 살펴보고자 한다.



구국운동을 위해 만주로 망명하시다


  부친의 휘는 용모(鏞模), 자함은 순필(順弼)이고 호는 복우(復宇)이시며 1877년에 도주님 생가가 있는 경남 함안군 칠서면 회문리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셨다. 본관은 함안(咸安)이며 고려의 대장군02 원윤(元尹)03을 지낸 조정(趙鼎)이 시조이다. 이후 집안 대대로 충절(忠節)과 효행의 가풍이 이어졌다. 조부이신 취당 조영규(趙榮奎, 1861~1905) 또한 문과에 급제하여 통사랑(通仕郞) 홍문관(弘文館) 정자(正字)에 제수(除授)되어 춘추관(春秋官) 기사관(記事官)과 승정원(承政院) 주서(注書) 등의 관직을 겸하다가 을사(1905)년에 국운이 기울어감에 통탄한 나머지 피를 토하고 서거하셨다.
  『함안조씨두암공파세보(咸安趙氏斗巖公派世譜)』에 따르면, 부친은 지혜롭고 총명하여 일찍이 학문에 뜻을 두셨으며, 문예(文藝)가 뛰어나 주위에 명성이 높았다. 16세가 되던 1892년에 경남 밀양군 하남면 파서리의 명문(名門) 여흥
(驪興) 민씨(閔氏) 중호(仲鎬)의 딸인 민영명(閔泳明, 1873~1932)과 혼인하셨다. 부인은 활달하고 영민하였으며, 체격이 건장해서 장부(丈夫)의 기상이었다고 한다. 두 분 사이에 1남 1녀를 두셨으니, 아들이 상제님으로부터 종통(宗統)을 계승하신 도주님이시고, 딸은 흥룡(興龍, 1905년 生)이다.04


▲ 회문마을 입구에 세워진 도주님 조부 공덕비, 2019년 4월 6일 촬영



  조부의 서거 후 부친은 그 뜻을 받들어 통영 통제사 등과 구국(救國)의 길을 모색하셨다.05 또한, 부친의 두 아우인 용의(鏞懿, 1880년 生)ㆍ용서(鏞瑞, 1891년 生)와 함께 나라를 구하기 위한 방도를 논의한 끝에 문중 땅을 담보로 하여 일본인 대부업자 산본(山本)으로부터 돈을 빌려 비밀리에 무기를 생산할 화약공장을 만드셨다. 그런데 무기를 만드는 실험을 하시다가 화약이 터지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이 사고로 일본 헌병에게 발각되어 체포될 위기에 처하게 되자, 신변의 위험을 느끼시고 두 아우의 가족과 함께 만주 봉천으로 망명하시게 되었다.06
  부친은 만주 망명 후에도 구국운동을 계속하셨는데, 『전경』과 『함안조씨두암공파세보』에서 이에 관한 일부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전경』에는 “도주께서는 … 이듬해(1911년) 청조(淸朝) 말기에 조직된 보황당원(保皇黨員)이란 혐의를 받고 북경(北京)에 압송되었다가 무혐의로 풀려난 엄친(도주님 부친)의 파란 곡절의 생애에 … .”(교운 2장 5절)라는 내용이 있다. 즉 부친이 1909년 만주로 망명하신 이후 구국운동을 하시던 중에 청나라 말기 청 왕조의 부흥을 목적으로 조직된 보황당 당원의 혐의를 받고 압송되어 고초를 겪으셨다는 내용이다.
  또 하나의 기록인 『함안조씨두암공파세보』에는 부친이 당시의 애국지사들, 아우 등과 함께 조국의 광복을 도모하셨다는 기록과 『전경』에 나온 보황당 관련 사건에 대한 더 구체적인 내용이 있다.


부공(복우 조용모)께서 … 아우 두 가족과 함께 만주에 들어가서 대계 이승희, 의암 유인석과 결탁하고 국내지사 정산 배문창, 서천 조정규, 일헌 조병택 등과 엄격히 설계하여 광복을 도모코자 연병제무를 둘째 아우에게 맡겼다. 당시 청국의 국운이 다 되어 원세개가 총통이 되어 보황당을 제거하려는 때에 공 역시 북경에서 거사하려는 혐의를 당함에 구국충정이 담긴 장서를 올리니 원씨가 인견하고 감탄하여 면케해 주었다.07


  이 글을 쓴 사람은 도주님의 숙부 조용의의 사위이자 도주님 공부 당시 시종을 했던 배문걸08 종도이다. 그가 도주님을 가까이에서 모셨던 점을 고려하면, 이 내용의 상당 부분은 사실일 것으로 짐작된다. 부친이 연루되었던 보황당(保皇黨)은 1898년 무술변법(戊戌變法) 때 정치 혁신을 도모하다가 실패한 광서제를 서태후가 폐위하려 하자 이를 막기 위해 강유위(康有爲, 1858~1927)와 그의 제자 양계초(梁啓超, 1873~1929) 등이 만든 단체이다. 여기서 보황은 황제를 지킨다는 뜻으로, 이 단체는 군주제를 바탕으로 헌법으로써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입헌군주제를 지향하며, 청 왕조를 무너뜨리려는 혁명 세력에 대항하여 청나라 황제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국가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주장과 활동을 펼쳤다.
  당시 손문(孫文, 1866~1925)은 신해혁명(辛亥革命, 1911)을 통해 황제를 폐위하여 청 왕조를 무너뜨리고자 했다. 이때 원세개(遠世凱, 1859~1916)는 조정의 실권자로서 청 왕조로부터 신해혁명의 대응에 관한 전권을 위임받고 있었다. 그런데 손문은 청 황제 퇴위를 조건으로 원세개에게 혁명정부의 총통 자리를 양보하는 결정을 내렸다. 원세개는 혁명 세력과 청 왕조 양쪽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상황이었으나 결국 손문과의 약속대로 황제의 퇴위를 강하게 주장하여 이를 관철함으로써 청 왕조는 무너지게 되었다. 당시 입헌군주제를 지향하며 황제의 지위를 지키려는 보황당은 원세개 입장에서 제거해야 하는 대상이었으니, 이러한 상황에서 부친은 보황당원으로 오해받아 고초를 겪으신 것으로 이해된다.



도주님의 창도(創道) 사업을 보좌하시다


   도주님께서는 정사(1917)년에 상제님의 대순진리에 감오득도 하신 이후 “태인에 가서 나를 찾으라”는 상제님의 계시에 따라 같은 해 4월에 친계 가족과 함께 뱃길로 귀국하셨고, 이후 무오(1918)년 10월경까지 안면도에서 1년여 동안 머무셨다.09 부친이 도주님과 함께 귀국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경남 밀양군 하서면 파서리 356번지10로 되어 있던 부친의 본적지 주소가 무오(1918)년 2월에 충남 서산군 안면면의 창기리 1183번지로 이전된 것으로 보아 1918년 2월경 이후에는 안면도에 계셨을 것으로 추정된다.
  무오(1918)년 가을, 도주님께서는 상제님으로부터 다시 “김제 원평에 가라”는 명을 받으시고 원평과 동곡약방을 돌아보셨고, 얼마 후 10월경에는 원평 황새마을에 본부(本部)를 마련하셨다.11 그 후 도주님께서는 본격적으로 도수에 의한 공부와 포덕 활동을 통해 무극도 창도(創道)를 위한 준비를 하셨다. 부친이 도주님의 창도 사업을 보좌하셨던 행적은 이때부터 발견된다.
  당시 부친의 행적 가운데 첫 번째로 주목할만한 것은 도주님의 명으로 종도들이 상제님 성골(聖骨)을 모셔 올 때 그 일원으로 참여하신 일이다. 상제님 성골은 원래 상제님의 유언에 따라 동곡약방 뒷산 장탯날에 초분(草墳)12되어 있었다. 초분이 당시 그 지역의 일반적인 장례 풍속이 아닌 점으로 볼 때, 상제님께서 후대에 전하시고자 했던 어떤 의도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후 상제님을 따랐던 종도들이나 상제님의 권능에 대해 알고 있던 사람들이 상제님 성골을 모셔가려는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천둥 번개가 쳐서 아무도 상제님의 초분에 함부로 접근하지 못했다.13


▲ 초분터, 2018년 10월 촬영



  그런데 신유(1921)년 9월, 도주님께서는 종도들로 하여금 상제님 화천 이후 10여 년 동안 아무도 범접할 수 없었던 상제님 성골을 모셔 오도록 분부하셨다. 그리하여 그해 9월 5일에 성골이 동곡에서 도주님의 공부 장소인 통사동 재실로 무사히 모셔졌고, 이때 갑자기 뇌성이 일고 번개가 번쩍였다. 그로부터 15일 뒤인 9월 19일에는 도주님께서 상제님의 성골을 모신 가운데 종도들과 상제님 강세 치성을 모셨다. 이 사건이 가지는 의미를 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 상제님의 계시로 종통을 계승하신 도주님께서 초분되어 있던 상제님의 성골을 모시고 강세치성을 행하신 것은 우리 종단 역사에서 뜻깊은 일이라 생각된다.
  도수에 따른 이런 중요한 일에 참여했던 여러 인물 가운데 한 분이 부친이셨다. 『전경』에는 그 일과 관련된 인물들로 “권태로와 그 외 네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어 알 수 없지만,14 1927년에 작성된 「상제님 성골 관련 판결문」에는 이 일의 관련 인물로 권태로(權泰魯, 1899 ~ ?) 외에도 부친과 이우형(李佑衡, 1903 ~ ?)이 언급되어 있다.15
  판결문에 나오는 권태로와 이우형은 도주님께서 무극도 창도를 준비하던 초기부터 도주님을 가장 측근에서 시종했던 인물들이다. 『전경』에 의하면, 권태로는 도주님께서 안면도에서 황새마을로 거처를 옮기실 무렵인 무오(1918)년 10월경부터 도주님의 시종을 들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16 이우형은 기미(1919)년 7월경부터 도주님의 시종을 들기 시작한 종도다.17 또한, 이 두 인물은 『전경』에 기록된 도주님의 주요 행적에 여러 차례 언급될 만큼 여러 종도 가운데 핵심 인물들로 파악된다. 이와 같은 권태로와 이우형의 행적으로 보았을 때, 이들과 같이 상제님 성골을 모셔오는 일에 참여했던 부친 또한 당시 도주님의 주요한 일을 수행했던 인물로 짐작할 수 있다. 조용모, 이우형, 권태로가 무극도 창도 후에도 무극도 중앙조직의 최고위 직책을 맡았다는 사실 역시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해준다.
  두 번째로 주목할 내용은 부친이 1925년 무극도가 창도 된 후에 무극도 본소조직(本所組織)의 최고위직인 도장(道長)을 맡고 계셨다는 점이다. 무극도의 조직은 크게 본소조직18과 지방조직(地方組織)19으로 나뉜다. 본소조직은 중앙조직으로 무극도장을 중심으로 도주님의 시종, 종교행사 및 종무, 지방조직의 포덕 업무 지원 등을 맡았고, 지방조직은 해당 지방을 중심으로 도인들의 수도와 포덕 업무를 주로 담당했다. 부친이 맡고 있던 도장은 본소조직의 최고위 직책으로 무극도 도규(道規)에는 이 직책의 임무에 대하여 “본도(本道)의 도장(道長)은 도중(道中) 내외사무(內外事務)를 총할(總轄) 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도장은 도주님을 대리하여 ‘도의 행정상 대표자’로서 다양한 임무를 수행한 직책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은 부친이 ‘팔파연합회(八派聯合會)’의 일원이었다는 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 ‘팔파연합회’는 『증산천사공사기』의 저자인 이상호(李祥昊, 1888~1966) 등이 병인(1926)년 8월에 발안하여 당시 여러 증산교단의 대표자인 박공우, 안내성, 이치복, 김경학, 이상호, 조용모, 고찬홍, 채경대 8명으로 조직된 모임이었다. 이 모임의 취지는 참여한 교단 간에 친목을 도모하고 교단의 발전에 협조하며 환난을 구조할 것과 경전 편찬에 서로 협력하자는 것이었다.20 당시 여러 교단의 대표자 자격으로 나온 8명 가운데 부친이 계셨다는 것은 부친이 도주님을 대리하여 이 모임에 참석하셨음을 보여준다.



나가며


  도주님께서 상제님의 대순진리에 감오득도하신 후 고국에 귀국하여 무극도 창도를 위한 공부와 포덕 사업에 전념하시던 시기에 부친은 도주님의 공부와 포덕 사업을 보좌하며 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셨다. 그중에서 상제님의 성골을 모셔 올 때 참여하신 일과 무극도 창도 후 중앙조직의 최고위 직책인 ‘도장(道長)’을 맡아 대내외적으로 다양한 활동을 수행하셨음을 여러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이처럼 부친은 나라를 잃었을 때는 개인의 안위보다 조부께서 남기신 뜻을 받들어 구국운동에 힘쓰셨고, 도주님께서 상제님의 종통을 계승하신 이후에는 그 구세제민의 뜻을 숭고히 여겨 도(道)를 받들며 종단에서 중요한 역할들을 하셨다.






01 남에게 자기 아버지를 높여 이르는 말.
02 고려시대 상장군(上將軍) 다음가는 직위로, 종3품 무관직이다.
03 고려 초기에 둔 열여섯 단계의 관직 체계 가운데 10번째 직위로 정 5품에 해당한다. 왕건이 고려를 창건한 직후에 태봉(泰封)의 관직 체계를 본떠서 919년에 두었다.
04 도주님 부친의 묘갈명인 「복우공용모묘갈명(腹宇公鏞模墓碣銘)」에 기록된 내용이다. 『함안조씨두암공파세보』 1卷(부산: 아름기획, 1996), pp.180-181 참고.
05 같은 책, p.180 참고.
06 곽춘근, 「전경지명이야기: 도주님의 봉천명과 봉천 지명 이야기」, 《대순회보》 172 (2015), pp.41-42; 『대순성적도해요람』, p.19 참고.
07 『함안조씨두암공파세보』 1卷(부산: 아름기획, 1996), p.180.
08 호적상의 이름은 배문준(裵文準, 1905~2004)이다.
09 교운 2장 9절~11절 참고.
10 현재 도주님 외가 부근 주소인데, 주소를 이전할 당시에는 도주님 외가 소유의 집터 주소로 추정된다.
11 교운 2장 10절, 11절 참고.
12 우리나라 장례풍속 중의 하나로 한 번의 매장으로 끝나는 단장제(單葬制)인 유교식 장례와는 달리 두 번의 매장 절차를 거치는 복장제(復葬制)이다. 시신을 땅에 묻지 않은 채 돌이나 통나무 위에 관을 얹어놓고 육탈(肉脫)될 때까지 이엉과 용마름 등으로 덮은 초가 형태의 임시 무덤을 말한다.
13 신상미, 「돋보기: 상제님의 성골(聖骨)」, 《대순회보》 139 (2012), pp.43~45; 교운 2장 22절 참고.
14 “신유년 九월 五일에 권 태로와 그 외 네 사람이 도주의 분부를 받고 구릿골에서 통사동 재실로 상제의 성골을 모시고 돌아오니라. 이때 갑자기 뇌성이 일고 번개가 번쩍였도다.”(교운 2장 22절)
15 “… 조용모, 이우형, 권태로 등은 … 강증산의 묘지가 전라북도 전주군 우림면 동곡리의 뒤 산기슭에 있음을 알고 대정 11년 음력 9월경 … 그 묘를 발굴하여… .” 「상제님 성골 관련 판결문」,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 CJA0001575, 1927년 6월 21일 참고.
16 교운 2장 11절 참고.
17 교운 2장 15절 참고.
18 본소조직에는 도장(道長)·주선원(周旋元)·주선원보(周旋元補)·찰리(察理)·순동(巡動)·종리(從理) 등의 직책이 있었다. 여기서 도장은 무극도 도규가 기록이 되어 있는 자료 가운데 1925년에 작성된 『무극대도교개황』에는 언급이 되어 있으나, 또 다른 자료인 1936년에 발간된 『조선의 유사종교』에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무극도 전 시기 가운데 일부 기간에 한시적으로 있던 직책으로 보인다.
19 지방조직에는 연락(聯絡)·차연락(次聯絡)·부분(府分)·포덕(布德) 등이 있었다.
20 김태수, 「대순논단: 상제님 신앙 교단들의 연합운동과 대순사상 -증산사상의 민족주의적 변용(變容)의 문제를 중심으로-」, 《대순회보》 69 (2007), p.74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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