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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21년(1991)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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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문단 : 도를 통해 다시 찾은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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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를 통해 다시 찾은 인생

 

어느날 부산에서 훌륭한 도인이 오신다기에 한껏 기대에 부풀어
도의 선각이며 인생의 반려자인 아내로부터 상제님의 도를 전해 들어

 

            
이 용 남<정리ㆍ강릉2방면>
  

  어느 덧 도문에 들어선지 10여년, 지리한 장마에 언뜻 언뜻 보이는 햇살 만큼이나 소중하고 귀한 나날들이었던 지난 생활들을 돌이켜 보면 입도후의 나의 삶은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지난 세월의 생활을 돌이켜 보고 만족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마는 입도하기 전의 나의 경우에는 그 정도가 조금 더 심했던 것 같다.

  다행히도 나는 도의 선각이며 인생의 반려자인 아내로부터 상제님의 도를 전해 듣고서 완전히 새로운 생활을 하게 되었다.

  1·4후퇴 때 월남하신 부친과 계모의 슬하에서, 비록 경제적으로 풍족한 생활을 하였지만 정신적으로는 항상 불안정한 나날을 보냈다. 이미 그때부터 내 삶의 방향은 어느 정도 정해지고 있었던 것 같다. 여리기만 했던 작은 가슴에 희미하게 남아있던 생모의 모정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은 세월의 흐름과 함께 엄마가 나를 버렸다는 생각으로 오히려 미움과 배신감으로 변해 갔다.

  이후의 생활은 결손가정의 자녀들이 대부분 걸어온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었으며 나는 이것을 숙명으로 생각하여 결코 그러한 생활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삐뚤어진 성격과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태도는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커다란 장애가 되었다. 나 아닌 남을 항상 의심하게 되고 자신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러던 중 군에 입대하여 월남전을 거쳐 1971년에 제대를 한 후 직장생활을 운수회사에서 시작하게 되었으며 그 와중에서 지금의 아내를 맞이하게 되었다. 일방적으로 나 자신이 좋아해서 이루어진 것이었지만 결혼생활은 내가 의도했던 것 만큼 그리 순탄하지 만은 않았다.

  1980년에 부친이 암으로 돌아가시자 사고무친이 되어버린 나는 처가살이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은 순탄하지 못한 직장 생활과 함께 가정불화의 원인이 되었다. 당시 운전을 하고 있었는데 3,4일이 멀다 하고 사고가 연속되었다. 평상시 자신의 운전능력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었으며, 이외에는 하는 일마다 모두 어려움이 따라 좌절만의 연속이었다. 즐겁게 살고자 했던 나의 인생은 그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부터인가 평소 어려운 가사에도 불구하고 우직스럽게 내조의 덕을 잘 행해오던 8년 연하의 아내가 차츰 변화하기 시작하였으며 급기야는 내게 어떤 것을 권유하기에 이르렀다. 다름 아닌 대순진리회에 입도하라는 것이었다.

  일면 황당하기도 하였지만 당시의 모든 일이 순탄치 못하였고 또 어디엔가 내 자신을 의지하고픈 생각이 간절하였으므로, 생소하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보다 일단 접해보자는 생각이 앞섰다. 반나절동안 이해할 수도 없는 교화를 듣고 그날 저녁 바로 입도치성을 올렸다.

  그러나 입도후의 생활 또한 그리 원만하지는 못했다. 대순진리회에 대한 부정적인 사회의 이목으로 어쩔 수 없는 행동의 제약이 따랐으며 아내 또한 마찬가지였다. 또한 이전과는 다른 철저한 시간관념과 몸에 배어있지 않는 예절의 요구, 기도 등의 어느 것 하나 지금까지의 생활습관과 맞는 것이 없었다.

  그때마다 이 모든 것에 대한 원망을 나를 입도 시킨 아내에게 돌렸다. 그러나 이러한 불평불만을 아내는 모두 포용하였으며 오히려 이러한 나에게 용기를 주고자 애썼다.

  그 후 어느날, 부산에서 훌륭한 도사가 오신다고 하기에 한껏 기대에 부풀어 회관으로 인사를 드리러 갔다. 하지만 평상시 내가 그려오던 도사의 이미지(?)와는 아주 동떨어진 수염도 없는 30대 중반의 남자가 내 앞에 앉아 있었다. 다름 아닌 지금의 수임선감이셨다.

  그 첫 대면으로 인한 당혹감이란 지금도 잊혀지지 않지만 한 마디 한 마디 말씀은 신념과 자신감으로 충만해 있었다. 그러나 오만함이나 가식은 발견할 수 없었으며 오히려 진실함과 신선함은 앞으로의 내 삶에 대하여 일말의 희망을 느끼게 하였다.

  그러한 하루하루의 교화를 통하여 나는 상제님의 덕화를 펴고 선양하는 것만이 내가 살길이라는 것을 깨우쳐 오직 포덕에 모든 정성을 쏟았다. 그러나 천조일손이라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입도 후 6개월동안 단 한 사람도 상제님 앞으로 인도하지 못하였다.

  『너희들이 믿음을 나에게 주어야 나의 믿음을 받으리라 』(교법 1장5절) 상제님의 진리와 덕화를 펴는 것은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대인관계가 반드시 뒤따른다. 즉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 나의 믿음을 상대에게 주어야 그 사람 또한 나에게 믿음을 주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당시까지의 나는 성장해 온 환경 탓으로 보든 사람을 대함에 있어 항상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즉 허심탄회하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앙금을 만들어 서로간의 불신을 낳게 하였으며 그로 이한 포덕의 부진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을 자신의 진실하지 못함과 부족 함에서 찾기보다는 여타의 주위환경으로 돌려 스스로 위안을 받고자 하였다.

  어느 순간 그것은 다름아닌 자신의 탓이라는 것을 깨닫고 이것을 고쳐 나가자 서서히 포덕사업이 진전이 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경험을 통하여 『… 사람에게도 신명으로 하여 다 고쳐쓰리라. 그러므로 나는 약하고 병들고 가난하고 천하고 어리석은 자를 쓰리니 이는 비록 초목이라도 기운을 붙이면 쓰게 되는 연고이니라』(교법 3장 1절)라고 하신 상제님의 말씀을 뼈 속 깊이 체험하게 되었다.

  후천선경, 이것은 가고자 스스로 노력하는 자만이 갈 수 있는 곳이다. 「도천리자 삼월취량(道千里者 三月聚糧)」즉, 천리를 가고자 하는 사람은 석 달의 식량을 준비한다고 한다.

  하물며 후천의 5만년 선경을 맞이하고자 한다면 뼈를 깎는 자신과의 싸움이 필요함은 당연한 천리일 것이다. 이를 위해 나는 과거의 삶을 거울삼아 선ㆍ후각간의 화합을 이루며, 걸음 걸음마다 상제님의 덕화를 펼 것을 스스로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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