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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21년(1991)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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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 : 황토현을 찾아

황토현을 찾아


황토현에서 동학군은 관군을 상대로 한 싸움의 첫 승리를 거둔다.


          

<전국대학대진연합회>

        

  황토현은 정읍군(井邑郡) 덕천면(德川面) 하학리(下鶴理)에 위치한 해발 33.5m의 황토로 덮인 조그마하고 붉은 언덕이다.

  1894년 3월 21일. 白山에 모인 東學軍은 각기 부안(扶安)과 태인(泰仁)으로 진격하여 말목장터에서 일박한 후 일부는 황토재(黃土峴)의 동남쪽에 매복하였다. 이날은 유난히 안개가 짙어 지척을 분간하기 힘든 상황에서 동학군은 관군을 상대로 한 첫 승리를 거두게 된다.

  상제님께서 탄강하신 객망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는 황토현은 덕천사거리에서 서쪽으로 1.5km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다시 서쪽으로 1.5km거리의 도교산과의 사이가 동학농민혁명 당시의 치열한 격전지이다.

  황토현에서는 농민혁명의 사상적, 조직적 기반이 되었던 동학과 그 동학군을 이끌었던 전명숙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또한, 그 당시 동학의 소용돌이를 몸소 겪으신 상제님께서 동학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셨고, 또 상제님과 동학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도 생각해 볼 必要가 있다.

 

▲ 동학혁명기념탑에 새겨진 민요 「파랑새」

 

 

  최제우(崔濟愚) (1824~1864)는 경상북도 월성군 견곡면 가정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원래이름은 복술(福述)이었으나 중생을 구제한다는 뜻을 품고 제우라 고쳤다. 수운(水雲)은 그의 호이다. 21세 때부터 팔도를 주유하며 백성들의 인심, 풍속을 살피던 수운은 33세 되던 1856년부터 천성산(千聖山)에 은거하며 하늘에 기도하였다. 1859년 그의 나이 36세 때 다시 경주 용담정으로 온 수운은 이듬해 4월 5일 하늘로부터 무극대도(無極大道)를 받게 된다.

  『꿈일런가 잠일런가 천지가 아득해서 정신수습 못할네라. 공중에서 외는 소리 천지 진동할 때.....』(안심가)

  『天恩이 망극하여 庚申 4월 초5일에 글로 어찌 기록하며 말로 어찌형언할까. 만고 없는 무극대도 여몽여각 득도로다』(용담가)

  수운(水雲)은 그가 펴는 道의 명칭을 西學과 대립되는 개념인 東學이라 불렀다. 한민족에 맞으면서도 전혀 새로운 사상인 동학은 급속도로 커지며 접주제(接主制)란 체제도 조직하였다. 점점 커가는 동학을 경계하던 관에서는 수운을 체포할 계획을 세우게 되고, 1863년 12월 체포된 수운은 이듬해 3월, 41세의 나이로 효수형을 받는다.

  儒ㆍ佛ㆍ仙의 장점을 융합하여 侍天主의 사상을 핵심으로 한 人乃天의 敎理를 가진 동학은, 天과 人을 대도의 근원으로, 성경신(誠敬信)을 道의 본체로 수심정기(守心正氣)를 수도의 요결로 삼고 있다.

  이러한 동학 농민군을 지휘한 전봉준(全琫準)은 1854년에 태어나 처음 이름을 명숙(明淑)이라 하였다. 성인이 되어서 키가 5척에 불과하여 “녹두”라 불리었음은 널리 알고 있는 바다. 그러나 그의 민중봉기는 동학신도의 입장보다는 다른 각도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봉기할 당시의 그는 최제우의 억울한 죽음을 탄원하는데 동참하지 않았을 뿐더러 체포되어 심문 받을 때 자신이 동학을 좋아한 것은 사실이나 남에게 가르친 적도 없고 스스로 동학의 괴수라 칭한 바도 없다 하였다.

  1894년 정월의 고부민란에 이어 음력 4월의 동학농민군을 지휘한 그는 부하의 밀고로 체포되어 1895년 41세를 일기로 처형되었다.

  체포되어 심문 받던 그는, 일본인 검사가 난을 일으킨 이유를 묻자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일신의 피해를 면하려고 난을 일으키는 것을 어찌 남아의 할 일이라 하겠는가. 백성들의 원한이 맺혀 있기에 백성들을 위하여 학정을 없애고자 했을 뿐이다.』

  상제님의 동학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그 뜻을 높이 사나 실제적인 행동에서 여러 가지 잘못된 점이 있다고 지적하셨다.

  『본래 동학은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주장하였음은 후천일을 부르짖었음에 지나지 않았으나 마음은 각기 왕후장상(王侯將相)을 바라다가 소원을 이룩하지 못하고 끌려가서 죽은 자가 수만명이라』(공사 2장 19절)

  상제께서는 또한 27년간의 헛도수를 차경석에게 붙여 왕후장상(王侯將相)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죽어서 원한을 품은 동학신명들을 해원코자 하셨다. 또한 최수운과 전봉준을 높이 평가하시며 그들을 신명계에서 높은 위치로 올리는 공사를 보셨다. 그리고 그들의 사명기(司命旗)를 세우시는 공사도 보셨는데, 이때 뒷산의 소나무 한 그루와 남쪽 양달에 있는 황토를 파오게(공사 3장 2절)하심은 전봉준의 첫 승리가 황토현에서였다는 것과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닌지.....

  농민군과 관군이 격전을 벌이던 이곳엔 1963년 10월 「동학혁명기념탑건립위원회」가 결성되어 기념탑을 세웠다. 그곳엔 「제폭구민」이라는 비문과 녹두장군 전봉준을 두고 생긴 민요 「새야 새야 파랑새야」가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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