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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38년(2008)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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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典經』속 역사인물 : 두보(杜甫)

두보(杜甫)

 

 

교무부

 

  「동학가사(東學歌詞)에 세 기운이 밝혔으니 말은 소·장(蘇秦張儀)의 웅변이 있고 앎은 강절(康節)의 지식이 있고 글은 이·두(李太白杜子美)의 문장이 있노라.」 하였으니 「잘 생각하여 보라」고 이르셨도다. (교법 2장 42절)

 

 

  “시인이 존재한 이래, 아직 두보(杜甫)와 같은 사람은 없었다.”라고 중당(中唐) 시기의 시인 원진(元)에게서 극찬을 받은 두보. 굳이 원진의 표현에 빗대지 않더라도 두보[712~770] 는 지금까지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중국 역사상 가장 훌륭한 사상과 재능을 지녔던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두보라는 이름으로도 유명하지만, 자미(子美)라는 그의 자(字)와, 소릉(少陵)이라는 호(號)로도 잘 알려져 있다. 게다가 그와 더불어 당나라 문학의 한 획을 그은 이백(李白)과 함께 거명될 때는 병칭하여 이두(李杜)라고도 불리운다.

  시성(詩聖)으로 불릴 만큼 당대 최고의 문학가이자 시인이었던 두보는 태생부터 남달랐다. 그는 당나라 ‘선천(先天) 원년(712)’01 하남성 공현(鞏縣)에서 대대로 유가를 신봉하는 관리집안에서 태어났다. 두보의 13대조인 두예(杜豫)와 10대조인 두손(杜遜), 그리고 증조부 두의예(杜依藝)를 비롯해 조부 두심언(杜審言)에 이르기까지 그의 집안은 대대로 높은 관직에서 이름을 남긴 명문가였다. 가까운 선대로 내려오면서 집안의 관직이 먼 조상들만큼 높거나 그 공이 두드러지지는 못해도 그의 집안은 여전히 명문가였는데, 이러한 배경은 두보의 성장과 독서에 안정적인 기반이 되었으며, 뒤에 그가 천하를 유람하는 데에도 좋은 여건이 되었다.

  두보가 시 짓기를 비롯해 글쓰기를 시작한 것은 일곱 살부터인데, 그로부터 2년 뒤 아홉 살이 되었을 무렵에는 이미 한 뭉치의 습작을 완성하기도 했다. 두보가 시단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열 서너 살쯤으로, 당시 두보는 어른 문인들의 무리에 들어가 시문을 짓고 그 분야의 명사들과 교류하였을 정도로 그의 문장은 뛰어났다고 한다. 두보가 청년으로 성장하기까지의 자세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지만, 대략 20세 무렵부터 여행길에 올라 꽤 오랜 시간을 유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오랜 시간을 유랑한 까닭은 장래에 과거를 보기 위한 준비 작업 즉, 당시 과거의 합격 여부는 반드시 답안의 우수성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추천자의 세력과 당사자 자신의 명성이 크게 작용했다. 이 때문에 두보는 각지를 돌아다니며 시를 발표하여 이름을 날리고, 명망있는 선비의 인정을 받아두는 것이 꼭 필요했던 것이다. 그 후 4년 뒤 개원(開元)02 23년(735) 24세 때, 두보는 유랑을 마치고 낙양으로 돌아와 과거를 치렀다. 하지만 그의 생각과는 달리 과거에 낙방하자 그는 또 다시 여행길에 오른다. 이 기간에 두보가 어디서 어떻게 지냈는지는 알 수 없다.

  두 차례의 긴 여정을 마친 뒤, 그의 나이는 이미 서른을 넘기고 있었다. 천진난만한 소년 시절과 호쾌한 청년 시절은 이미 지나가고, 깊고 그윽한 눈으로 인생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당시 낙양은 동도(東都)로서 번영을 이루고 있었으나, 일부 고관들의 호사스러운 생활은 두보를 분노에 떨게 하였다. 현종은 이미 무능해졌고 조정은 부패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두보로서는 울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천보(天寶)03 5년(746)에 두보는 장안으로 돌아왔다. 그의 나이 서른다섯이었다. 원래 두보는 “임금을 보좌하여 요순 이상으로 높이고 나라의 기풍을 순박하게 바로잡자”라는 큰 정치이상과 참여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듬해에 과거에 응시했다가 다시 낙방하여 두 번째의 고배를 맛본 후 그는 나라의 현실을 직시하게 된다. 당시 현종은 절세미인 양귀비에 빠져 국사를 소홀히 하였고, 조정은 간악한 이임보(李林甫)와 고력사(高力士)의 흉계에 놀아나고 있었다. 두보가 낙방한 것도 모두 이임보의 술책에 의한 것이었다.

  이 시기부터 두보의 생활은 단 한 번도 편할 날이 없었다. 하루하루가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관직에 등용되지 못한데다 부친의 별세로 인해 지금까지 자신을 뒷받침 해주던 경제적인 소득원마저 없어졌던 것이다. 이로 인해 두보는 너무나 궁핍하여 구걸을 하다시피 하루하루를 연명해 나갔다. 이러한 고통 속에서 두보는 사회의 부조리와 통치 계급의 타락, 백성들의 고충을 냉철하게 바라보게 된다. 두보는 유가의 민본사상과 인정(仁政)사상에 따라 불행을 겪는 사람들을 눈여겨보기 시작하였고, 그들에게 동정과 사랑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러면서 어느덧 그의 시는 천재(天災)와 인재(人災)로 고통 받는 백성들의 비참한 삶을 노래하고 있었다. 백성을 위해 사실주의 시인이 된 것이다. 그동안 두보는 독서가 만 권을 돌파하여, 붓을 들면 신들린 듯하였고, 부(賦)04는 양웅(揚雄)05에 필적하고, 시는 조식(曹植)06과 나란히 하였을 정도로 시문의 수준이 향상되어 있었다.

  한편 두보는 권력을 가진 간교한 무리들의 행태를 미루어 보아 머잖아 동란이 발생하리라는 것을 예감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두보의 깊은 통찰력은 현실을 꿰뚫었다. 임금을 비롯하여 나라의 녹을 먹는 관리들까지 모두 부패하여 간신들이 활개를 치는 등 정국이 혼탁하게 돌아가자 천보 14년(755) 11월 9일 안녹산07이 범양에서 반란군을 이끌고 파죽지세로 남하한 것이다. 부패와 타락에 빠져 있던 조정의 온갖 부조리와 모순이 한꺼번에 터진 것이었다. 이에 현종은 촉(蜀)으로 피난하였고, 이듬해에는 태자 이형(李亨)이 영무(靈武)에서 왕위에 올라 숙종(肅宗)이라 칭하며 연호도 지덕(至德)으로 개칭하였다. 두보는 가족을 피난시키고, 자신은 숙종이 있는 영무로 가다가 반란군에 붙들려 장안으로 호송되어 연금 상태로 유폐되었다.

  이에 두보는 4월에 위험을 무릅쓰고 장안을 탈출하여 봉상으로 와 숙종을 알현하였다. 이렇게 하여 5월 16일 두보는 임금에게 간언을 올릴 수 있는 좌습유(左拾遺)의 벼슬을 얻을 수 있었다.

  한편 두보가 좌습유에 등용되어 직책을 수행할 무렵 안녹산이 이끄는 반군은 이미 장안까지 들이 닥쳤다. 이로 인해 정국은 더욱더 혼란스러워져만 갔다. 한편 어리석은 숙종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만 등용할 뿐, 현종의 옛 신하들은 모두 물리쳐버렸다. 두보는 이러한 숙종을 더는 믿고 따를 수 없었다. 임금을 바른 길로 인도하여 모두가 화평하게 살 수 있는 태평성대를 꿈꾸었던 두보로서는 실의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고심 끝에 두보는 관직을 버리고 숙종을 떠나게 된다. 숙종을 떠난 두보는 진주와 농주 그리고 파촉을 떠도는 고난에 찬 운명 속으로 걸어가게 된다. 상원(上元)08 원년(760), 당시는 봉건주의 사회의 사대부 계층과 농민 계층 간의 갈등이 심각하였는데 두보는 허위에 찬 벼슬살이와 조화를 이룰 수 없는 그 무엇이 그의 뼛속에 있음을 절감하고 백성들 안으로 들어가 그들의 고통스러운 생활을 시로써 승화시켰다.

  한편 두보가 관직을 버리고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닐 무렵 나라는 안팎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에 직면하였다. 외부로는 토번(吐蕃)09의 침입이 빈번하였고 내부로는 촉 지역 군벌들이 기회를 틈타 난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는 많은 병사들이 피를 흘린 후에야 겨우 평정될 수 있었다. 안녹산의 난에서부터 토번의 침입에 이르는 십년 동안에 전쟁이 그치지 않아 도성이 두 차례나 함락되었으니 나라 꼴은 불 보듯 뻔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때마다 황제는 몽진을 떠났다. 그뿐인가 그 난리에 죽어 나간 백성들의 한은 또 무엇으로 씻어 낼 것인가? 개원시절 태평성대를 경험한 두보로서는 이러한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두보는 이러한 상황을 보고 과거 자신이 관직을 그만두기 전, 그때 죽음으로서 간언했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되어 국면이 지금과 같은 상황에까지 이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자책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자책만 할 수는 없는 법, 두보는 다시 붓을 들었다. 그는 붓을 들 때마다 당시의 정황을 그대로 기록하였다. 그의 붓은 결코 나라를 망친 군주의 체면을 세워주는 법이 없었다.

  대력(大曆)10 2년(767), 전란을 겪고 난 이후에도 당나라는 여전히 헤어 나올 수 없는 소용돌이 속에 흔들리고 있었다. 또 다시 크고 작은 전란이 일어난 것이다. 시국이 이러한데 천자는 어리석게도 일부 권신들의 대소사를 마음대로 주물러, 조정은 기강이 무너지고 군신간의 의리도 사라져만 갔다. 이로 인해 백성들은 또다시 말 못할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당 왕조는 실로 수습하기 어려운 국면으로 빠져들어만 갔다. 두보는 자신이 앞으로 살 날이 많지 않음을 직감하였다. 당시 두보의 몸은 각지를 떠돌며 심한 궁핍과 병고에 시달렸기에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쇠약해져 있었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붓을 놓지 않았다. 아직 붓을 쥘 힘이 남아 있을 때 자신이 겪은 모든 일들을 문자로 남겨 후대 사람들이 그것을 경계로 삼기를 바랬다. 말하자면, 시의 형식을 빌려 쓴 일종의 전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두보는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다가 많은 회한을 남기고 59세(770)를 일기로 유명을 달리했다.

  두보는 자신의 시에서 타인에 대한 사랑을 주장하는 동시에, 인간은 대자연과 친밀하게 융화하여 천지인(天地人)의 생존방식을 멋대로 변화시키려 하지 않고 천인합일(天人合一)과 천인화락(天人和樂)의 경계를 추구해야 한다고 피력했다. 뿐만 아니라, 두보는 생활이 어렵거나 편하거나, 관리로 근무할 때나 야인으로 있을 때나, 태평성대를 위해 항상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시국을 염려하였다. 이런 두보의 마음과 사상은 그의 문장에 고스란히 담겨 지금까지도 귀감이 되고 있다. 두보의 문장과 시를 높이 사는 이유 중 단연 으뜸가는 한 가지만 꼽는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그의 시 전체를 관통하는 고도의 인도주의(人道主義)11 정신일 것이다. 백성의 고통에 시인의 감정을 이입시킨 그의 작품은 시대를 초월해 언제까지나 역사에 남아 기억될 것이다.

 

 

 

 


01 당나라 현종(玄宗)이 즉위한 해.

02 당나라 현종(玄宗)이 713년~741년까지 사용한 연호.

03 당나라 현종(玄宗)이 742~756년까지 사용한 연호.

04 『시경(詩經)』에서 이르는 시의 육의(六義) 가운데 하나. 사물이나 그에 대한 감상을, 비유를 쓰지 아니하고 직접 서술하는 작법.

05 전한 말의 학자 겸 문인. 한(漢)나라를 대표하는 식견을 지녔다. 성제(成帝) 때 궁정문인의 한 사람으로 성제의 여행에 수행하며 쓴 『감천부(甘泉賦)』,『하동부(河東賦)』 등은 화려한 문장이면서도 성제의 사치를 꼬집었다. 『두산세계대백과사전』, Encyber, 2003.

06 조조의 다섯 번째 아들로 자는 자건(子建)이다. 시호는 진사왕(陳思王). 아버지 조조, 형 조비와 함께 시작(詩作)에 능통하여 삼조라 일컬어졌다.

07 중국 당(唐)나라 때 반란을 일으킨 무장(武將). 변경의 방비에 번장이 중용되는 시류를 타고 현종의 신임을 얻어 당의 국경방비군 전체의 3분의 l 정도의 병력을 장악했다. 황태자와 양국충이 현종과의 이간을 꾀하자 양국충을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반기를 들었으나 실패했다. 『두산세계대백과사전』, Encyber, 2003.

08 당나라 숙종(肅宗)이 760~762년 까지 사용한 연호.

09 당송(唐宋) 시대에 티베트족(族)을 일컫던 이름.

10 당나라 대종(代宗)이 766~779년까지 사용한 연호.

11 인간의 존엄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인류의 안녕과 복지를 꾀하는 것을 이상으로 하는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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