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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17년(1987)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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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 삼계해마 대제 관운장

삼계해마 대제  "관운장"

(三界解魔 大帝 “關雲長”)


신의(信義)를 생명(生命)보다 중히 여긴장군.
인간의 바른 도리(道理)를 행(行)할 때에 그 인생(人生)의 가치는 영원한 것


연구위원 보정 김 태 호

 

  「관운장(關雲長)!」 하면, 으례히 우리에게 떠오르는 모습이 있다. 적토마(赤兎馬)위에 올라앉아, 봉(鳳)의 눈에 삼각수를 휘날리며, 적진을 향하여 청용언월도(靑龍偃月刀)를 손에 들고, 선봉에 서서 천군만마(千軍萬馬)를 호령하는 위풍 당당한 모습을 연상할 수 있다.

  이 관운장이 과거의 역사적인 인물이나 삼국지의 흥미 있는 이야깃거리로서 뿐만 아니라, 우리 도(道)에 중요한 임무를 담당하고 있는 인물로서 上帝님의 天地公事에 중요한 중책을 담당하고 있다. 관운장에 대하여 전경(典經)에 여러 군데 기록이 나오고, 상제(上帝)님께서 교운(敎運)을 펼치신 후, 자주 관운장의 옛이야기를 들려 주셨을 뿐 아니라, 도인들이 지성으로 봉송하는 주문에 운장주가 들어 있을 정도로 신명계에서의 위치가 크다. 그러므로 관운장이 어떤 인물이며, 왜 천지공사에 참여하게 되었는지 도인으로서 반드시 알아 볼 필요가 있다.



대인의 풍모를 갖춤
  관운장(서기 160년 ? ~ 219년)은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장수이다. 본명은 관우(關羽)이고 하동군 해현 사람이다. 후한말의 동란기에 탁군(涿郡)에서 유비(劉備), 장비(張飛)와 도원결의(桃園結義)로서 의형제를 맺어 평생토록 그 의(義)를 저버리지 않았다. 도원결의를 할 때, 삼인(三人)은 제단을 쌓고 제물을 차린 후, 천지신명(天地神明)에게 맹세하길 『우리 삼인(三人)은 성(姓)은 각각 다르나, 이제 의(義)로써 형제를 맺음에 서로 마음을 합(合)하여 위로는 나라를 돕고, 아래로는 백성을 편안케 하려 하니, 비록 다르게 태어났을지라도 오직 同年 同月 同日 같은 날 죽기를 각오하오니 이 마음을 굽어 살피사, 이에 배반하는 자가 있으면 하늘과 사람이 똑같이 벌 주소서.』 라고 告하였다. 서기 200년에 유비가 조조(曹操)에게 패했을 때, 관운장이 사로잡혀 후대를 받으며 귀순종용을 받았으나, 원소의 부하 안량(顔良)의 목을 베어 후의에 보답한 다음, 유비에 대한 의리를 지켜 기어이 유비에게로 돌아갔다. 그 후 적벽대전 때에는 수군(水軍)을 인솔하여 큰 공을 세웠는데, 그 당시 조조의 목을 베고 섬멸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있었으나, 과거 조조에게 진 인간적인 빚을 생각하여 조조와 군사들을 살려 놓아 줄 정도로 대인의 풍모를 보였다. 
  익주(益洲)공략 때에 그는 형주(荊洲)에 머물러 지켰으며, 그의 위풍은 조조와 손권마저 두려워 할 정도였다. 그러나 형주에서 촉나라 세력의 확립을 위하여 진력하다가 오위(吳魏)동맹군의 협공으로 吳의 포로가 된 후 여몽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무신(武神)으로 추앙
  그는 무용(武勇)이 뛰어날 뿐 아니라, 신의(信義)를 생명(生命)보다 중히 여긴 장군이었으며, 전쟁 중에도 항상 책을 가까이 하였던 문무(文武)를 겸한 인물이었다. 중국에서는 그가 죽자 그의 인품에 대한 숭모열(崇慕熱)이 조야(朝野)를 막론하고 나날이 높아만 갔다. 그리하여 송대(宋代)이후로 곳곳마다 관왕묘, 관성묘(關王廟 關聖廟)를 세우게 되었고, 문신(文神)인 공자(孔子)를 모신 문묘(文廟)에 대응하여 무묘(武廟)라 부르면서 중국 민중들 사이에 그에 대한 신앙이 널리 확산되었다. 특히 그는 전쟁시 재난을 물리쳐 주는 군신(軍神), 나라의 외환(外患)을 물리쳐 주는 수호신, 또는 재신(財神), 복록장수신(福祿長壽神)으로서 널리 신봉(信奉)되었다. 2차대전 전까지만 해도 중국에 1천6백여개의 관왕묘(關王廟)가 있었다고 하니 얼마나 그 신앙이 대단했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그에 대한 신앙이 우리나라에 도입되게 된 계기는 임진왜란 때 이여송(李如松)등 명나라 장수에 의해서였다. 그들은 전투에서의 승리를 기원하기 위하여 주둔지마다 관왕묘(關王廟)를 세워 그 신앙의 열의가 대단했다. 지금도 성주, 남원 등에 그때 세운 관왕묘(關王廟)가 남아 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인 선조 35년에 당시 명나라 신종(神宗)은 조선에서의 왜병을 격퇴시킨 공은 오로지 관운장의 음공(陰功)에 의한 것이라 하여, 내탕금 4천냥을 보내 동대문 밖 숭인동에 왕묘를 짓게 했다. 이로부터 조선 조정, 특히 왕가에서는 열성으로 신앙하여 융복을 입는 임금이 장신(將臣)을 거느리고, 헌작을 했으며, 열병(閱兵)이 있을 때마다 임금이 이곳에 납시어 무운(武運)을 빌었다고 한다. 「징비록」이나「임진록」등에 보면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관운장의 신조(神助)에 힘입어 승리하게 된 영험기와 이적 등이 기록되어 있다. 민간에서도 관성교(關聖敎)라는 명칭으로 신앙이 성행하여 전국 각처에 산재되어 있는 관왕묘에 보면 관운장을 신령으로 모시게 된 신비한 사연이 전설처럼 전해오고 있다. 서울에는 숭인동의 동조(東廟), 도동(桃洞)의 남묘(南廟), 혜화동의 북묘(北廟), 서대문 밖 천연동의 서묘(西廟) 그리고 종로 보신각 뒤에 중묘(中廟)가 있었는데 지금은 동묘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지방에는 안동, 성주, 전주, 남원, 진안 등지에 남아 있다.



신명계(神明界)의 착란
  우리 배달겨레는 「규원사화」라는 역사책에 기록된 바와 같이 환웅천왕(桓雄天王)이 환인(桓因)의 명(命)에 의하여 천궁으로부터 3000명의 무리를 이끌고 인간 세상에 내려와 우리의 조상이 된 이래로 하늘에 제사지내고, 천지신명(天地神明)을 극진히 모시는 것이 우리의 미풍양속(美風良俗)이 되었다.
  상제(上帝)님께서도 인정하셨듯이 조선은 예로부터 신명 대접을 극진히 해왔다. 같은 동양인이면서 중국인은 합리적이라면 조선 민족은 보다 신비적이었다. 신비적인 것은 神과 보다 가까이 할 수 있는 요소이다. 중국인이 이성적이라면 한국인의 기질은 감성적이기 때문에 신에게 제사 지내고 나서는 반드시 다같이 모여 가무음주(歌舞飮酒)를 즐겼다는 기록이 중국 측 자료에 나온다. 기분 좋은 일을 당하면 「신난다.」「신바람 난다.」 등의 말을 무의식적으로 쓰는 것도 이런 한국인의 기질과 관련이 있다. 중국인의 신에 대한 태도는 공자가 「논어」에서 밝힌 몇 마디 말로써 대변할 수 있다. 즉 『경귀신이원지(敬鬼神而遠之)』 이다. 신명을 예로써 공경은 하되 가까이 하지 말고 멀리 하라는 뜻이다. 신(神)과 인간(人間)사이 큰 장벽이 있다. 그러나 한국인은 신(神)과 인간(人間)이 같은 생활(生活)의 장(場)에 공존(共存)하며 상부상조(相扶相助)하고 있다. 이와 같이 신명 대접을 극진히 하는 전통을 이어 온 조선에서 관운장이 중국보다 더욱 지성으로 신봉 되었을 것은 당연하다.



복마의 발동을 풀어주는 임무
  상제(上帝)님께서는 1871년에 조선에 강세 하셔서 천지공사(天地公事)를 행(行)하신 이유는 이 세상이 상극에 지배되어 원한이 맺히고 쌓였기 때문이었으며, 그 근본적 원인은 인간계(人間界)에 있는 게 아니라 신명계(神明界)의 착란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도 정신이 착란되면 행동이 이상 하듯이 신명계가 착란되면 인간계에 혼란이 오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리하여 신명계 즉 명부공사를 먼저 단행하여 각 국 명부(冥府)를 새로운 분으로 교체하였다. 또한 삼계해마 대제는 관운장을 앉히셨다. 삼계는 천지인 삼계(天地人 三界)를 말함이며, 해마(解魔)는 상제님을 따르는 자는 반드시 복마의 발동이 있는데 복마의 발동을 풀어주는 일을 말하는 것이다. 대제(大帝)는 그 임무를 맡고 있는 주장이 되는 분을 말한다. 관운장이 신명으로서 천지공사(天地公事)에 참여하게 된 동기가 전경(典經)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1907년 어느 날 상제님께서 종도 신원일을 데리고 태인(泰仁) 관왕묘 제원(祭員) 신경원의 집에 이르러 머물고 계실 때, 그와 그 가족들에게 가라사대 『관운장이 조선에 와서 받은 극진한 공대의 보답으로 공사때에 반드시 진력함이 가하리로다.』 하시고 양지에 써서 불사르시니, 경원은 처음 보는 일이므로 괴이하게 생각하였다. 이튿날 경원과 다른 제원(祭員)이 관묘에 봉심할 때에 관운장의 삼각수 한 갈래가 떨어져 간 곳이 없으므로 제원들은 괴상하게 여겼으되, 경원은 상제께서 행(行)하신 일이라 생각하고, 관운장이 공사에 진력하기 위하여 비록 초상으로라도 그 힘씀을 나타낸 것이라고 깨달았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상제(上帝)님께서 쓰시고자 내신 것이다. 하물며 만물(萬物)의 영장인 인간으로 태어나서 하늘이 쓰시고자 하는데 응하지 않으면 어찌 인간이라 할 수 있겠는가? 인간계를 다녀간 신명도 마찬가지이다. 더욱이 관운장은 우리 조선에 와서 350여년이 넘게 극진한 대접을 받았기에 상제님의 부르심에 응한 것이다. 또 『어느날 황응종이 노랑닭 한 마리를 상제님께 올렸다. 상제님께서는 밤중에 형렬에게 그 닭을 잡아 삶게 하고, 김형렬, 한공숙, 류찬명, 김자현, 김갑칠, 김송환, 김광찬, 황응종 등과 나눠 잡수시고, 운장주(雲長呪)를 지으셔서 그들에게 단번에 외우게 하셨다.』 이것이 그 때의 운장주다.

 『天下英雄 關雲長 依幕處 近廳天地八位諸將 六丁六甲六丙六乙 所率諸將 一別屛英 邪鬼唵唵急急 如律令 娑婆啊』이다. 이 주문은 천지공사(天地公事)에 삼계 해마대제(三界 解魔大帝)로서 참여하는 관운장이 도인들의 주문 송독에 의하여 복마의 발동이 있을 때 어느 때라도 응하여 해마를 하게끔 약속된 주문이다. 상제(上帝)님께서 운장주를 만드시고, 과연 계획하신 대로 신응하는지를 알아보시기 위하여 시험을 하셨다. 전경(典經)에 『운장주를 벌써 시험해 보았으니∙∙∙∙∙∙ 장효순의 난을 운장주로 풀었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이렇듯이 천지공사(天地公事)에 진력하게 된 관운장은 비단 우리나라에만 계속 있는 게 아니라. 때로는 용무에 의하여 서양(西洋)으로 이동(移動)하기도 하였다. 그 예로써 전경(典經)에 『1908년 무신년에 상제님께서 전주 김준찬의 집에 가셔서 김덕찬, 김준찬, 김낙범등과 좌석을 함께 하시다가 가라사대 「근자에 關廟에 치성이 있느냐?」 고 하시기에 낙범이 있음을 아뢰이니, 이에 종도들에게 「그 신명이 이 지방에 있지 않고 멀리 서양에 가서 대란을 일으키고 있느니라.」고 일러주셨다.』신명은 天地公事에 참여하기 위하여 인간 이상으로 보이지 않는 음적인 세계에서 바삐 움직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인의 마음과 영웅의 도략
  우리는 관운장의 일을 통하여 몇 가지 중요한 점을 깨달을 수 있다. 특히 난세에 있어서 인간의 생명은 부평초와 같이 허무할 때가 많다. 그러나 순간 같은 인생이라도 인간의 바른 도리를 행(行)할 때에 그 인생의 가치는 영원한 것이다. 관운장이 눈앞의 이익만 생각하고 편안만을 추구하였다면, 그는 한때의 편안함과 부귀영화를 누렸다면, 만고(萬古)에 처량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고통을 감수하고 도덕을 잘 지켜 나갔기 때문에 만고에 푸르른 사람이 되었으며 천지공사(天地公事)에 참여하여 후천 5만년 청사에 길이 빛나는 사람이 된 것이다.
선천에는 명부의 착란으로 군자가 화를 당하고 소인이 활개쳐 선악 구별이 혼잡한 시대였으나, 상제님께서 천지공사를 행하시어 새 도덕, 새 세상을 열었으니 도인들은 자애로운 성인의 마음과 관운장과 같은 영웅의 도략을 본받아 상제님의 일꾼으로서 맡은 바 책임을 성실히 수행해 나아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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