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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19년(1989)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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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대순진리회 : 해원상생 의지가 뚜렷이 엿보이는 곳

해원상생 의지가 뚜렷이 엿보이는 곳

  

 

산업금융신문 사장 서만득

  

  筆者는 이런저런 綠으로 하여 大巡眞理會에 對하여 깊이는 모르되 얼만큼은 알고 있다고 생각되는 바다. 그래서 더러는 마치 그 쪽과 무슨 관계나 맺고 있는 거처럼 오해를 받을 때도 가끔 있으나 실은 그렇지가 않다. 다만 大巡眞理會에 對해서 肯定的인 견해를 갖는 사람중의 하나임에는 틀림없다. 그리고 그러한 肯定的인 思考가 비단 大巡眞理會에 對해서 뿐 아니라 올바른 길을 걷고 있는 다른 宗敎에 對해서도 나름대로 같은 至論을 갖고 있다. 즉 무슨 宗敎냐가 問題가 될 수 없고 信似人으로서 삶의 자세가 重要하다는 것이다.
  몇 년 前 지금은 他界하시고 이 世上에서는 다시 相面의 기회가 없겠지만 佛敎系에서도 高僧이셨고 당시로서는 가장 고령이시던 惠岩스님과 고적한 修德寺會主室 초롱불 밑에서 밤 늦도록 對談하던 기억이 지금도 生生함은 高僧의 풍부한 재담도 이유야 되겠지만 筆者와의 論理가 부합됐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眞理는 하나여. 다만 그 길을 가는 데에 方法이 다를 뿐이지.」 「달은 하나 이나 담은 그릇의 모양에 따라 비추이는 생김새가 다를 뿐이야.」 그렇다. 그 분의 말처럼 무릇 宗敎가 갖는 어떤 特性이 있을지는 모르나 그들이 추구하는 眞理는 같을 수 밖에 없다 하겠다.

  어느 宗敎나 宗派가 不義를 쫓고 惡行을 가르칠 것이며 또한 추함을 바랄 리 있겠는가. 그의 方法이 다소 다함은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그리스도는 사랑을, 불교에서는 자비를 大巡眞理會에 서는 해원상생을 내세우나 사실은 거의 같은 思想에 불과하다 하겠다.

  그럼에도 네 宗敎하며 내 宗敎하며 헐뜯고 배타하려는 信者들을 어떻게 봐야 할지 이미 그들은 信似人으로서 자질을 상실했다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원수를 사랑하며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여기고 돌보라 했거늘 어찌 他宗敎信者가 원수보다 못한 대상이 되야 하는가. 이는 아직도 宗敎를 맹목적 또는 절대적인 대상으로만 보려는 初期 환상적 신앙의 개념에서 빚어진 오류 때문일 게다.
  다시 말하면 宗敎의 개념을 天國行 티켙을 얻는 節次, 또는 自己救濟라는 철저히 利己主義인 思考로 因하여 그 같은 오류를 범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제 宗敎가 나름대로 現實宗敎로서의 상당한 價値를 부여 받으려면 물론 절대자를 신뢰하고 자신을 의탁함은 마땅하다 하겠지만 앞서와 같은 그러한 利己主義的 思考에서 과감히 탈피하여 現實的으로 매우 어려운 입장에 놓여 있는 大衆救濟 그리고 미처 나라의 손길이 못 미치는 敎育事業이나 또는 社會福祉事業 等에 일익을 맡아 바로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이 地球上에 樂圓을 建設함에 단연 앞장서야 할 것이다.
  공교롭게도 筆者는 카톨릭 信者다. 무슨 까닭에 그 敎를 擇했는지 장황한 設明이 要치 않겠으나 大巡眞理會를 肯定的으로 理解하게 된 理由와 合致하는 일이라서 몇 가지 열거해 보고자 한다.

  젊고 힘 꽤나 쓸 적엔 宗敎고 神이고 인정하려 들지 않고 오직 자신의 쥐꼬리만한 能力만을 믿고 어떤 일에고 자만해 왔던 게 사실이다. 지금 생각하면 부처님의 손안에든 손오공인 것을 까많게 모르고 까불어댄 것이다. 그러나 不惑을 넘기면서 人間의 無力과 無能을 깨치게 됐고 자연 어떤 絶對者를 목마르도록 찾게 되었고 그 후 점차 그 같은 갈증이 심화되면서 모든 태도에서 겸손하기에 이르렀으며 그래서 끝내 찾은 곳이 聖堂이었다. 이쯤 되면 어떤 宗敎를 擇하던 問題가 될 것이 없다 하겠으나 자기의 特性에 맞춰 찾아가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가 고뇌 속에서 찾은 종교는 무엇인가.

  하늘에 반짝이는 별처럼 수많은 宗敎 중 카톨릭을 擇하게 된 것은 아마 그 敎가 他宗敎나 宗派가 다르다 하여 그 쪽을 별나게 비방하거나 그렇게 배타적이지 않고 가급적 수용하려는 포용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음은 전술한 실천적 종교로써 단연 으뜸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특별히 자기를 내세우지도 않고 요란스럽지도 않으며 그저 묵묵히 불우하고 가난한 이웃을 위하여 진자리 마른자리 가리지 않고 철저히 헌신하고 봉사하는 그들에게 마음이 이끌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는 宗敎의 敎理도 중요하지만 종교의 가르침을 그대로 당시 사회와 역사를 위해 실천하는 것이 얼마만큼 중요한가를 보여준 실례이기도 하다.
  내가 본 大巡眞理會 또한 敎育事業을 비롯하여 社會의 각 방면에서 눈부신 활동을 함으로써 실천적 종교로서 손색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더욱이 大巡眞理會에 관계하는 인사들을 대할 때마다 느끼는 바이지만 그들의 인상이나 행동은 해원상생하려는 의지가 뚜렷이 엿보여 관심이 있는 이들을 흐뭇하게 해준다.

  그러나 信仰人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공동체내에서의 갈등이 외부에 알려진다거나 불미스러운 행동이 가끔 발생함으로 하여 우리를 가슴 아프게 하는데 어느 宗敎이던 간에 집안 단속을 잘해야 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잘한 일이 알려지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하나 잘못한 일이나 어떤 추문은 순간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즉 공든탑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신도 수효가 적지 않은 지금과 같은 다원화된 상태에서 별의별 사람들도 많을 테니 그쯤 가지고 그러느냐고 하겠지만 밖에서 보는 이들의 생각은 그렇지 만은 않으니 올바른 신자의 길을 가도록 신경을 쏟아야 할 것이다. 물론 그러한 問題를 야기시키는 장본인들은 어떤 宗敎를 擇했던 똑 같은 결과를 낳았을 것이고 또다시 宗敎를 바꾼다 해도 같은 결과를 빛을 것임은 번한 일이다. 그러니 외부 여론을 너무 의식하지 말고 오히려 묵묵히 그 같은 문제의 신도를 바르게 구제해주길 바란다. 그것이 곧 종교의 책무가 아닐까. 종교인의 종교에 대한 태도가 어떻게 잘못을 하고 있고 어떻게 해야 도리인지 철저한 점검과 노력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大巡眞理會.

  民族魂을 빼앗으려던 일제 치하의 민족혼 말살정책이 아니었더라면 大巡眞理會의 敎勢가 서구宗敎의 그것을 훨씬 능가했을 법한 敎歷을 가진 것으로 알고 있다. 民族宗敎로 자부하면서 해원상생을 꾸준히 실천해가는 그들 관계인들을 보노라면 그리고 날로 확장되는 信徒와 오늘날 그의 敎勢로 봐서 넉넉히 짐작될 수 있는 일이다.

  계속된 發展과 더욱 社會에 기여해줄 것을 당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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