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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22년(1992)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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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탐방 : 대순탐방-보은방면 민병록 선감

대순탐방-보은방면 민병록 선감

報恩相生 새겨 德化 펼쳐야...

                   

       

                      

  『갑오(甲午)세 갑오(甲午)세 을미(乙未)적 을미(乙未)적 을미(乙未)적 가보세. 병신(丙申)되면 못 가리.』, 

  1894년 갑오(甲午) 동학(東學)혁명이 일어난 후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그때 유명했던 노래들은 여전히 후일에 남아서 불리워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보은(報恩)방면 민병록(閔炳錄)선감(71세)도 역시 이 노래 가사에 반해서 도(道)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밝힌다.

                 

  『나는 충북 보은군 속리면 하팔리라는 곳에서 태어났는데 보은(報恩)지방은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동학혁명이 일어나기 바로 전 해인 1893년 3월에 수만의 동학도(東學徒)들이 용기백배하여 척왜양이(斥倭洋夷)를 높이 걸고 기세를 올렸던 곳입니다.』

        

  동학도들이 보은에서 집회를 가졌던 그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동학도들은 모든 행동(行動)을 일사불란하게 하여 규율(規律)이 스스로 엄하였고 또 이때 그들의 일반민중에 대한 애정은 대단하여 떡장사 엿장사가 오면 둘러앉아 그것을 먹고 각기 호주머니에서 몫을 내어 계산해 주었는데 이 때 떡장사 엿장사가 그것을 합산해 보면 판 떡이나 엿의 수량과 한 푼의 차이도 없이 맞았다고 한다.

  그래서 장내 일반 민중들이 「야! 동학군들이 엿 값과 떡 값은 잘 내더라』는 소문이 퍼졌다 한다. 이러해서 당시 보은장내에 「서울장안이 장안이냐 보은장안이 장안(帳內)이지」라는 동요(童謠)까지 퍼져 희망에 넘친 새 사회의 모습을 구가하였다 하니 동학도들의 보은집회(報恩集會)가 어떠한 모임이었던가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참으로 투지와 희망에 넘친 집회(集會)였던 것이다.

  그것은 당시 외세와 집권 봉건층에 대립적인 이해관계를 가진 각계각층의 민중(民衆)들이 비상한 각오를 가지고 모인 모임이었고 그들에게 병장기는 없었으나 전진의 기상을 보이고 있었으며 조직이 잘 되어 있어 통일된 행동을 보여주고 있었다.

  결국 이들도 역시 도인(道人)들로서 「후천 5만년 수운(受運)」이라는 개벽(開闢)의 깃발 아래 모여든 사람들이었다. 도(道)와 인연이 깊은 고장에서 태어나 도인의 길을 걸어온 민병록 선감은 보은(報恩)의 의미를 강조한다.

         

  『대순진리회(大巡眞理會)의 양대법리가 「해원상생(解冤相生)ㆍ보은상생(報恩相生)」이라는 점을 깊이 음미 해 보아야 합니다. 해원사상이 대순진리(大巡眞理)를 대표하는 사상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해원이라는 것도 「보은(報恩)」이라는 구체적 행위가 따르지 않으면 이뤄질 수 없다고 생각해요. 보은(報恩)이 되지 않으면 해원(解冤)이 될 수 없고 해원이 되지 않으면 상생(相生)의 세계(世界)도 이뤄질 수 없는 거지요. 내가 태어나서 도(道)와 인연을 맺게 된 고장이 보은(報恩)이라는 점에 대해서 이런 도적(道的)인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요.  「전경」에 「도통천지보은(道通天地報恩)」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일심(一心)을 좌우명으로 알고 생활하고 있다는 민 선감은 원래 이름이 병록이었으나 도주(道主)님께서 음양(陰陽)을 맞춘 이름 이라면서 「형기」라는 이름을 지어 주셨다고 한다.

            

  『도주(道主)님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도 많았는데 인상적인 것은 「앞으로 큰 운수 큰 도통이 나온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입니다. 그 말씀을 듣고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현재 중곡도장(中谷道場)근처 자택에서 부인, 막내아들과 함께 수도(修道)하고 있는 민선감은 부모님과 함께 입도(入道)했는데 전가족이 대대로 농사(農事)를 지어오던 농토를 팔고 부산도장(釜山道場)으로 이사 갈 때가 가장 마음이 아팠었다고 한다.

            

  『수도(修道)를 위한 일이지만 정(情)이 들대로 든 고향을 버리고 가자니 눈물이 나더군요. 도(道)를 닦으면서 어려운 일이 많았지만 내가 포덕(布德)한 수반이 잘 따르지 않을 때가 가장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러나 도주(道主)님께서 「연이 있으면 다 다시 따르게 된다 」는 말씀을 하셔서 위안을 받곤 했죠. 그러다가 도주(道主)님께서 화천 하시니 눈앞이 캄캄한 것이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습니다.』

                  

  도(道)를 닦으면서 이렇다 하게 한 일이 없어서 안타깝다고 말하는 민선감은 후각(後覺)들에게 『도를 믿으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끝까지 따라가야 성공할 수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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