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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18년(1988)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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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단 : 6月을 맞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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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月을 맞으며

 

先覺의 한마디에 깨우침이

 

 

공주방면 박완신

      

  신록이 우거진 6월, 나는 잊지 못할 지난해의 그 날을 생각하며 6월의 새 아침을 맞는다.

  작년 6월의 첫 주라고 생각된다. 실로 오랜만에 후각을 만난다는 기쁨과 후각이 입도에 침이 마르도록 극찬을 아끼지 않던 무주 덕유산을 구경할 수 있게 됐다는 벅찬 마음에 아침밥을 먹는 둥 마는 둥 대전행 고속버스에 올랐다. 휴일인데도 첫차라서 그런지 버스는 20여명의 승객만을 싣고 터미널을 빠져 나와 아침 햇살에 눈부신 들판을 가르며 시원스럽게 고속도로를 달렸다.
  운치 있는 고속버스 안내양 덕분에 “비발디의 사계”를 들으며 지금 이 시간 이후에 펼쳐질 후각과의 해후 그리고 덕유산의 절경을 상상하니 절로 신바람이 났다.

  강남 고속터미널에서 대전까지는 두시간, 그 두시간이 그렇게 짧을 수 없었다. 대전에 도착하여 시외버스 터미널에 이르니 그곳에는 벌써 형형색색의 등산복 차림을 한 많은 젊은이들로 붐볐다. 그들은 그들의 목적지로 떠날 버스를 기다리며 삼삼오오 짝을 지어 담소를 나누고 혹은 야영을 떠나는 듯한 무리를 지어 각자의 장비를 점검하고 있었다.
  나는 무주 행 차표를 구하고 광장 의자에 앉아 그 젊은이들을 바라보면서 서울에서 출발할 때의 그 설레임과는 달리 점차 심기가 불편해져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그 젊은이들과 나 자신과의 현실적인 비교에서 오는 필연적인 것이었다.

  내가 도문에 들어선 후 그 헤아릴 수 없는 상제님의 뜻을 온 천하에 알리고자 하는 일념으로 불고가사하고 열심히 뛰었던 지난 세월이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는 듯한 허무함을 느낀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나도 그들과 같은 젊은이로서 나에게는 그런 호사스런 여유가 없다는 현실에서 오는 일종의 질투와도 같은 마음에서 였을 것이다. 그땐 정말 열심히 돌아 다니며 사업에 힘을 쏟았다. 밥 먹는 시간 조차도 쪼개어가며 사업에 온 정열을 쏟고 남들이 주말 여행을 떠날 때 난 후각 한 사람이라도 더 찾아 보고자 동분서주하던 때였다. 그러나 그 젊은이들을 보는 그 순간에 나의 마음은 허허로움 그 자체였던 것이다.

  무주 행 시외버스가 홈에 들어오자 잠시나마 사사로운 허욕에 마음을 빼앗겼던 것을 뉘우치며 차에 올랐다. 휴일의 무주 행 버스는 등산객으로 가득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넓은 대합실에 있던 많은 젊은이들의 목적지가 덕유산이었으니 당연한 것이었다. 다행히도 나는 동작이 빠른 덕에 뒷편의 좌석에 앉을 수 있었다.
  그날은 상제님께서 나의 믿음을 시험하려 하셨는지 한 무리의 산행객이 버스에 올라오고 그들 중의 한 사람이 나의 옆 좌석에 앉자 그 무리는 나를 중심으로 하여 서 있었다. 나는 평소의 습관대로 전경을 펼쳐 들고 상제님의 말씀 하나 하나를 되새기고 있었다. 그 때 나의 옆 좌석에 앉아 있던 청년이 “이건 무슨 책입니까?” 하고 질문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물음에 전경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고 대순진리회가 추구하는 목적과 상제님의 말씀을 설명해 주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신기한 듯 열심히 듣고 있던 그 청년은 “그것 사이비 아닙니까?” 하는 것이었다. 그 순간 자신들의 얘기에 열중하던 사람들의 모든 시선은 나에게 쏠렸고, 나는 그들의 시선에 마치 남의 물건을 훔치다 들키기라도 한 듯 얼굴이 빨갛게 달아 오르는 것을 느꼈다.
  “사이비” 하는 그 말에 나는 나의 한 몸을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허탈감에 빠졌고 또 한편에서 “아! 그거 84년도” 라고 말을 할 때 쥐구멍이라도 있었다면 필시 나는 그곳에 머리를 처박았을 것이다. 도문에 들어 선지 몇 달 안 되는 나로서는 당연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 이후로 아무런 말도 못하고 빨리 이 버스가 무주에 닿았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그 짧은 시간이 왜 그리 더디던지 그야말로 좌불안석이라 머리 속에선 온갖 상념이 난무하였다. “내가 무어 그리 잘난 놈이라고 불고가사하고 도판에 뛰어 들었나!” “내 부족한 것이 무엇이기에 이 질시를 받으며 사업하는가!” 하는 등등의 형언할 수 없는 번민과 갈등이 나의 뇌리에서 수없이 교차 하였던 것이다. 결국 나는 그 동안 쌓아온 신념과 모든 공을 버리고 도와 인연을 끊겠다는 다짐을 하고 버스가 무주에 도착하자 후각을 만나는 것도, 덕유산의 그 절경도 접어두고 서울로 되돌아 왔다.

  서울에 돌아온 후에 나는 그 순간의 치욕과 창피스러운 마음에 도와의 인연을 끊고 두문불출 하기를 여러 날이 지났을 때 나의 선각께서 저의 집에 오시었다. 나는 선각을 뵙는 순간 그 동안 삭혀 왔던 분노의 격정이 일시에 솟구치는 것을 억제치 못하고 “나 이제는 도를 안 닦기로 했으니 돌아가시오!”하고 말을 했다. 그 말에 선각께선 무척 당황해 하셨다. 그도 그럴 것이 나에게 큰 기대를 갖고 계시던 선각이셨으니 그야말로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 격이라 선각의 얼굴은 철퇴를 맞은 듯 고통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러나 선각께선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다정한 몸짓으로 나의 어깨를 어루만져 주시며 “무슨 일이 있었구나” 라고 말씀 하셨다. 솟구쳤던 분노와 격정이 점차 누구러지자 나는 무주 행 버스 속에서의 일을 선각께 말했다. 선각께선 아무런 말씀도 없이 눈을 지그시 감고 계시더니 “전경 교법1장 3절과 2장 19절을 읽어 봐라!” 이 한마디만 하시고는 돌아 가셨다.
  교법 1장 3절에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길 “일에 뜻을 둔 자는 넘어오는 간닢을 잘 삭혀 넘겨야 하리라” 또 교법 2장 19절에 “남이 나에게 비소하는 것을 비수로 알고 또 조소하는 것은 조수로 알아라. 대장이 비수를 얻어야 적진을 헤칠 것이고 용이 조수를 얻어야 천문에 오르나니라”하였다.

  나는 상제님의 이 말씀을 수 없이 읽어 보고 오늘의 일을 미리 아시고 이와 같은 말씀을 나에게 주셨구나 하는 것을 깨우쳤을 때 상제님의 그 뜻에 감복하여 절로 지난 날의 어리석음을 뉘우치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열 마디 백 마디의 말보다는 단 한마디로 나의 죄를 깨우쳐 주신 선각이 한없이 고마웠다. 만약에 그때 선각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영원히 도를 떠나 있었을 것이고 앞으로 다가올 후천세계의 영화는 꿈에도 꾸어 보지 못할 것이다.

  아마도 그때의 그 시련과 시험은 비가 온 뒤에 다져지는 땅의 이치처럼 큰 일꾼이 되게 하고자 상제님께서 나에게 주신 큰 덕화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어느덧 南窓너머로 살며시 햇살이 들어 온다. 부끄러운 지난날의 고귀한 체험을 음미하면서 저 유명한 희랍의 철학자 디오게네스가 그렇게 하였듯이 나도 창생의 어둠을 밝히고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나의 일터로 나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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