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너별 보기
   daesoon.org  
대순126년(1996) 4월

이전호 다음호

 

회보 1면 대순지침 상제님의 일대기 대순논단 수기 청계탑 28수 신명의 생애 24절후 신명의 생애 금강산 이야기 종단소식 대순칼럼 알립니다

24절후 신명의 생애 : 굴돌통(屈突通)

굴돌통(屈突通)

 

              

                      

  굴돌통(屈突通) 그의 선조는 창려(昌黎)군 도하(徒何)현 사람인데 후에 장안(長安)으로 이사하였다. 수(隨)나라에서 벼슬은 호분랑장(虎賁郞將)으로써 그 당시 문제(文帝)가 농서(聾西)현의 목축장부를 조사하라고 명령을 내려 숨겨둔 말 이만필을 찾아내었다. 문제(文帝)가 노하여 태복경(太僕卿)으로 있던 모용실달(慕容悉達)을 붙잡고 목관사(牧官史) 천 오백 명을 가두어 모두 죽이려하자 굴돌통이 말하였다. 『사람의 목숨은 지극히 귀중하며 한 번 죽으면 다시 살아날 수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지극하신 인자로움으로 천하의 백성을 기르시는데 어찌 축산(畜産)이라는 일 때문에 하루에 천 오백 명의 사인(士人)을 죽이려 하십니까?』 문제가 그를 꾸짖자 굴돌통은 머리를 조아리고 말하였다. 『저 자신이 죽어서 이 여러 사람의 죽음을 막기 원합니다.』 문제가 깨닫고 말하였다. 『내가 똑똑치 못해 이 지경에 이르렀소. 이제 마땅히 실달(悉達)등을 사면해 주어 그대의 도리에 맞는 말을 표양(表揚)케 하리라.』 이리하여 모두 사면되었고 굴돌통은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으로 발탁되었다. 자리에 있으면서 강직하여 범법자(犯法者)가 생기면 가족, 친척이라 하여도 놓아주지 않았다. 안정(安定)현 사람 유가론(劉迦論)이 반란을 일으켜 십여 만의 무리가 조음(雕陰)현을 점거하였다. 굴돌통이 관중(觀中)의 병사들을 동원하여 싸우려 하였다. 안정현에 주둔하여 처음에는 그들과 싸움하지 않으니 군중(軍中)에서는 그가 겁을 낸다고 생각했다. 굴돌통이 회군(回軍)한다고 거짓말하고 상군(上郡)으로 잠입하였는데 적군을 그것을 알아차리자 못하고 병사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와 굴돌통의 진영으로부터 칠십리쯤 떨어진 곳에 진을 치고 병사들을 나누어 순찰하게 하였다. 굴돌통이 그들이 무방비 상태임을 알고 밤에 정예 병사를 골라 습격하여 격파시키고 가론(迦論)과 만여 명의 목을 베고 상군 남산(南山)에 경관(京觀)을 축조하였다. 또 노약자 수만 명을 사로잡았다.
  그 후에 수(隨)나라의 정국(政局)이 더욱 어지러워지고 도적이 많아지니 병사들은 투지가 없어지고 장수들은 마음이 돌아서 버린 사람이 많았다. 굴돌통은 매번 싸움할 때마다 신중히 하여 비록 대승(大勝)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패배하지도 않았다. 임금이 남쪽으로 행차하여 그로 하여금 장안을 평정하라고 시켰다. 고조(高祖) 이연(李淵)이 병사를 일으키자 대왕(代王)은 굴돌통을 보내어 하동(河東)을 지키게 하였는데, 오랫동안 싸움을 하여도 함락시키지 못하자 고조는 병사들에게 머물러 포위하게 하고 드디어 황하(黃河)를 건너 굴돌통의 장수인 상현화(桑顯和)에게 밤에 유문정을 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그 다음날 아침까지 큰 싸움을 벌였는데 적군 기병 수백 명이 남산(南山)으로부터 돌아와 그들의 배후를 치자 성벽 세 군데 있던 적병들이 크게 소리지르며 다투어 뛰어나와 상현화는 마침내 도망하였고 그의 병사들은 모두 사로잡혔다. 굴돌통이 형세가 어려워지자 어떤 자가 그에게 항복할 것을 유세하니, 말하길 『국가를 위해서라면 적을 칼을 맞을 각오가 되어있다.』 병졸들을 훈시할 때면 눈물을 흘렸고 비록 그는 기력이 없었으나 병사들은 그의 말을 듣고 감동하여 분발하였던 것이다. 얼마 안 있어 수도가 함락되고 유문정이 두종(竇琮), 단지현의 정예 기병을 보내서 조상(稠桑)까지 쫓아왔고 굴돌통은 진을 치고 막아섰다. 두종이 굴돌통의 아들 굴돌수(屈突壽)를 보내 그를 항복시킬 것을 종용하니 굴돌통이 크게 소리지르며 『옛날에 너와 나는 부자지간이었지만 지금은 원수이다.』 말하고 좌우의 병사들에게 그를 화살로 쏘라고 명하였고, 이때 상현화가 그의 병사들에게 크게 소리쳤다. 『수도가 이미 함락되었다. 그대들의 집은 모두 관서(關西)지방인데 어찌 다시 서쪽으로 가려하는가?』 말하자 병사들이 모두 병기를 버렸다. 굴돌통은 어찌할 수 없음을 알고 마침내 말에서 내려 동남쪽으로 향하여 두 번 절하고 통곡하면서 말했다. 『제가 힘이 모자라 싸움에 졌지만 폐하를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드디어 잡혀 장안으로 압송되었다. 고조가 그를 위로하면서 말했다. 『어찌 이리도 늦게 만나게 되었는가?』굴돌통이 울면서 말하시길『제가 신하로서의 절개를 다하지 못하여 이 지경까지 이르게 돼서 저의 나라를 부끄럽게 하였습니다.』 고조가 말하길 『충신이로다.』 그를 풀어주고 병부상서(兵部尙書), 장국공(藏國公)의 벼슬을 주고 진왕(秦王)의 행군원수장사(行軍元帥長史)로 삼았다.
  고조를 따라 설인고를 토벌하였는데 그때에 적의 진귀한 갑옷이 무수히 많았다. 장수들이 그것들을 다투어 가졌는데 굴돌통은 가지지 않았다. 고조가 듣고서 말하길 『청렴(淸廉)으로써 나라를 받든다고 하는데 그 말이 헛소문이 아니로다.』 특별히 금은 육백 냥과 비단 오백 필을 내렸다. 섬동도(陝東道)의 행대좌복야(行臺左僕也)직을 맡아 고조를 따라 왕세충(王世充)을 토벌하였다.
  이때 굴돌통의 두 아들은 낙양(洛陽)에 있었는데, 고조가 말하길 『지금 동쪽으로 정벌 나가매 그대들을 데리고 가려 하는데 그대의 두 아들은 어찌 하는가?』 굴돌통이 말했다. 『저는 이미 늙어서 중임을 맡기 족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난 달 폐하께서 포로 된 이 몸을 풀어주고 은혜를 베푸시어 다시 살아나게 되어 그때 입과 마음속으로 죽어서라고 나라에 보답할 것을 맹세한바 있습니다. 이번 출정에서 선봉을 맡기로 하였거늘 제 두 아들은 죽고 사는 것이 운명이라고 생각되니 결코 저의 사사로운 것 때문에 큰 일을 망치진 않겠습니다.』 고조가 크게 탄식하며 말했다. 『열사의 순절(殉節)을 내 지금 보았도다.』 몇 해 후에 임금의 부름을 받고 형부상서(刑部尙書)가 되었다. 스스로 문장에 능하지 못하다하여 끝내 사양하자 공부(工部)로 옮겼다. 건성(建成)때 변란으로 인해 검교 행대복야(檢校行臺僕射)로 복직되어 낙양을 평정하였다. 정관(貞觀) 초에 행대(行臺)에서 물러나 낙양도독(洛陽都督)이 되었다가 다시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로 승진하였다. 세상을 떠나니 나이가 일흔 둘이었다. 상서좌복야(尙書左僕也) 벼슬을 받았고 시호(諡號)는 충(忠)이라 하였다. 후에 태종(太宗)의 묘정(廟廷)에 안치되어 제사를 받았다. 영휘(永徽) 때에 사공(司空)벼슬이 내려졌다.

 

 

 

 

관련글 더보기 인쇄

Copyright (C) 2009 DAESOONJINRIHOE All Rights Reserved.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 강천로 882 대순진리회 교무부 tel : 031-887-9301 mail : gyomubu@daesoon.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