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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27년(1997)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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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수 신명의 생애 : 잠팽(岑彭) 神明열전

잠팽(岑彭) 神明열전

 

           

               

  주유가 대답했다. 『대사도(大司徒) 백승(伯升)이 해를 당할 때 내가 그 모의에 관여했고, 또 갱시(更始)께도 소왕(蕭王)을 북벌(北伐)하러 보내지 마시라고 간언했었으니, 진실로 나의 죄가 깊음을 스스로 알고 있다네.』 

  잠팽이 돌아와서 광무제에게 소상히 보고했다. 그러자 광무제가 말하길,『무릇 큰일을 이루려는 자는 작은 원한들을 마음에 두지 않는다. 주유가 만일 지금 항복해 온다면 벼슬과 작위를 내려 보호해 줄 것이거늘 하물며 벌을 내리겠는가? 하수(河水)가 여기에 있으니 내 하수를 두고 맹세한다. 절대로 약속을 어기지 않겠다.』라고 했다. 잠팽이 다시 주유에게 가서 말을 전하니 주유가 성 위에서 밧줄을 내려 보내며 말하길『정녕 믿을만한 말이라면 이 밧줄을 타고 올라올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잠팽이 밧줄 있는 곳으로 지체하지 않고 나아가 성벽을 오르려 하니 주유가 그의 성의를 보고 곧 항복하기로 결정하였다. 닷새 후에 주유가 날랜 기병을 거느리고 잠팽에게로 오면서 각 부서 장군들을 모아놓고 명령을 내리기를『굳건히 성을 지키면서 나를 기다리시오. 내가 만일 돌아오지 않으면 장군들은 곧장 군사들을 이끌고 환원(轘轅) 땅을 올라 언왕에게로 가시오.』라고 했다. 주유는 손을 뒤로 묶은 채 잠팽과 함께 하양(河陽)으로 왔다. 광무제가 그를 보고 곧 포박을 풀게 하고 불러서 만나본 후, 다시 잠팽에게 명하여 그날 밤 즉시 낙양성으로 돌려보내도록 했다. 

  이튿날 아침 주유가 군사를 거느리고 나와 항복하니, 주유에게 평적장군(平狄將軍)을 배수하고 부구현(扶溝縣)의 제후로 봉했다. 주유는 본래 회양현(淮陽縣) 사람인데 후에 소부(小府) 벼슬을 했고, 대대로 부구현의 제후로 봉해졌다.
  건무(建武) 2년에 잠팽으로 하여금 형주(荊州)를 공격하게 하니, 주 · 엽 등 십여 개의 성을 함락 시켰다.

  이때에 남쪽 지방은 더욱 혼란스러웠었다. 남군(南郡) 사람인 진풍이 여구(黎丘) 땅을 점거하고는 초려왕(楚黎王)이라고 자칭하면서 열 두개 현(縣)을 공략하여 점령하였고, 동흔(董訢)은 도향(堵鄕)에서 병사를 일으켰고, 허한(許邯)은 행(杏)에서 병사를 일으켰고 또 갱시(更始)의 여러 장군들도 각기 병사를 거느리고 남양군(南陽郡)의 성들을 점거하고 있었다. 광무제가 오한(吳漢)을 보내어 그들을 정벌토록 했는데, 오한의 군대가 지나가는 곳에 약탈당하는 일이 잦았다. 이때에 파로장군(破虜將軍) 등봉(鄧奉)이 광무제를 알현하고 신야(新野)로 돌아왔는데, 오한의 군대가 자기의 고을을 약탈하는 것을 보고는 격노하여 마침내 반란을 일으켜 오한의 군대를 격파하고 짐수레를 빼앗고 육양에 주둔하며 다른 적들과 힘을 합했다. 그해 가을에 잠팽은 해(杏) 땅을 격파하여 허한을 항복시켜 직책이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으로 옮겨졌다.
  다시 주우(朱祐)와 가복(賈復) 및 건위대장군(建威大將軍) 경감(耿感), 한충장군(漢忠將軍) 왕상(王常), 무위장군(武威將軍) 곽수(郭守), 월기장군(越騎將軍) 유굉(劉宏), 편장군(偏將軍) 유가(劉嘉)와 경식(耿植) 등을 보내어 잠팽과 힘을 합하여 등봉(鄧奉)을 토벌토록 하였다. 잠팽 등의 군대가 먼저 도향(堵鄕)을 공격하니 등봉이 군사 만여 명을 거느리고 동흔을 도우러 왔다. 동흔이나 등봉의 병사는 모두 남양(南陽)의 정예병들이라서 잠팽 등이 수개월 동안 공격해도 이길 수가 없었다. 건무(建武) 3년 여름, 광무제가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남쪽 정벌의 길에 올랐다. 광무제의 군대가 엽성(葉城)에 이르렀는데 동흔의 별장군(別將軍)이 병사 수천 명을 거느리고 길을 막아서니 광무제의 수레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그러나 잠팽이 달려나가 공격하여 크게 그들을 무찔렀다. 광무제가 도양(堵陽)에 도착하니, 등봉은 밤을 틈타 도망쳐 육양으로 돌아갔고, 동흔은 항복했다. 잠팽이 다시 경감, 가복 및 적노장군(積弩將軍) 부준, 기도위(騎都尉) 장궁(臧宮) 등과 함께 등봉을 추격하여 소장안(小長安)에 이르렀다.
  광무제가 장군들을 거느리고 직접 싸워 크게 적을 격파했다. 이에 다급해진 등봉은 곧 항복했다. 광무제는 등봉이 옛 공신(功臣)임을 어여삐 여기고 또 오한에게도 잘못이 있었다 하여, 등봉을 살려주자고 하였다. 그러자 잠팽과 경감 등이 간언 하였다. 『등봉이 배은망덕하게도 반역함에 군대를 이끌고 멀리 원정 와서, 가복은 부상을 입고 주우는 적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또한 폐하께서 이미 행차하셨는데도 등봉은 죄를 뉘우치지 못하고 직접 싸움에 나섰으며, 군사가 패배한 후에야 항복했습니다. 만일 등봉을 죽이지 않으시면 악(惡)을 경계할 수 없게 됩니다.』그리하여 등봉을 목베었다. 등봉은 서화현(西華縣) 제후인 등신(鄧晨)의 조카였다. 

  광무제가 돌아가면서 잠팽으로 하여금 부준(傅俊), 장궁(臧宮), 유굉(劉宏) 등을 비롯한 병사 삼만 여명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진풍(秦豊)을 공격하고 황우성(黃郵城)을 함락시키도록 하였다.

  그런데 진풍이 그의 대장군(大將軍) 채굉(蔡宏)을 거느리고 등(鄧) 땅에서 잠팽의 군사를 막으니, 잠팽은 수개월이 지나도록 진격할 수가 없었다. 광무제가 이상히 여겨 잠팽을 꾸짖었다. 이에 잠팽은 두려워서 곧 군사를 밤중에 훈련시키며 군중에 명령을 내리기를 이튿날 새벽 서쪽으로 산도현(山都縣)을 공격할 것이라 하고는, 포로의 감시를 소홀히 하여 포로가 도망쳐서 진풍에게 이 사실이 알려지도록 하니, 진풍이 곧 그의 전 군사를 거느리고 서쪽으로 잠팽을 맞이하러 왔다. 잠팽은 이에 군사를 잠수시켜 면수(沔水)를 건너게 하여 진풍의 장군 장양(張楊)을 아두산(阿頭山)에서 공격하여 크게 격파시켰다. 또한 시내 계곡을 따라 벌목하여 길을 뚫어 여구(黎丘)를 직접 습격하여 주둔병들을 격파하니, 진풍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 말을 달려 이들을 구하기 위해 돌아왔다.
  잠팽은 다른 장군들과 함께 동산(東山)에서 진영을 펴고 있었다. 진풍이 채굉과 함께 밤에 잠팽을 공격하였는데, 잠팽은 미리 예상하고서 준비를 해 놓은 터라 병사를 출동시켜 거꾸로 그들을 공격하니, 진풍은 패하여 도망쳤고 채굉을 쫓아가 목을 베었다. 잠팽은 무음후(舞陰侯)로 다시 봉해졌다.

  진풍의 승상 조경(趙京)이 의성(宜城)을 가지고 항복해 오니, 그에게 성한장군(成漢將軍)을 배수하고, 잠팽과 함께 여구(黎丘)에서 진풍을 포위하도록 했다. 이때에 전융(田戎)이 이릉(夷陵)에서 병사를 거느리고 있다가 진풍이 포위되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큰 군대가 들이닥칠까 염려하여 항복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처형인 신신(辛臣)이 전용에게 간언 하였다. 『지금 사방의 호걸들이 제각기 군국(郡國)을 점거하고 있는 실정이니, 낙양 땅을 얻는 것도 손바닥을 뒤집듯 쉬운 일입니다. 정예병을 갖추어 놓고서 변화를 관찰함이 좋겠습니다.』 전융이 대답했다. 『진풍은 세력이 강대한데도 오히려 광무제의 남방토벌 부대에 의해 포위당했으니, 하물며 나의 세력으로 어찌 하리요? 항복하기로 결정하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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