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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28년(1998)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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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절후 신명의 생애 : 이세적(李世勣)

이세적(李世勣)

 

          

              

  임금이 무소의(武昭儀)를 황후로 세우고 싶어하였는데, 대신들의 반대로 두려워 결정치 못하고 있었다. 임금이 이세적과 장손무기, 우지녕(于志寧), 저수량 등을 불러 의논하려 하였는데, 세적이 병을 핑계로 입궐치 않았다.

  훗날 임금이 이세적을 불러 말하길 『장차 무소의를 황후로 세우고자 하였는데, 종묘 대신들이 모두 반대를 하는 바람에 그만 두어야겠다.』라고 하였다. 이세적이 답하기를『이는 폐하의 집안 일이니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 볼 필요가 없습니다.』임금이 마침내 뜻을 결정하고 왕씨 황후를 폐했다.
  총장(總章) 2년에 죽었으니, 86세였다. 임금이 말하길 『이세적은 윗사람을 받듦이 충성스러웠고 부모를 섬김이 효성스러웠으며 삼조(三朝)를 거치는 동안 과오를 범한 적이 없었다. 성품은 청렴하고 신중했고 집안 살림에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그러니 이제 세상을 떠남에 분명 집안에 남은 재산이 없을 것이다. 유사(有司)는 그의 장례비용을 넉넉히 마련해 돕도록 하라.』라고 하고는 눈물을 떨구었다. 광순문에서 초상을 치르며 칠일 동안 정사를 살피지 않았다. 태위(太尉)와 양주대도독(揚州大都督)을 증수하고 시호를 정무(貞武)라 했다. 보물을 주고 소릉에 장사지냈다. 음산(陰山), 철산(鐵山), 오덕건산의 형상을 본뜬 무덤을 만들어 그의 공적을 드러냈다. 장사 지내는 날, 임금은 황태자와 함께 미앙궁(未央宮) 고성(古城)에 행차하여 눈물로 그를 보내며 뭇 관리들로 하여금 고성 서북쪽까지 전송케 했다.
  처음에 이세적이 여양(黎陽)의 곡식 창고를 탈취했을 때에, 이세적에게로 와서 식객 노릇 하는 이들이 많았었는데, 고계보(高季輔)와 두정륜(杜正倫)도 그 중 하나였다. 또 호뇌(虎牢)를 평정할 때에는 대위(戴胃)를 얻었다. 모두 명신(名臣)이 되니, 세상사람들은 이세적이 사람을 잘 알아본다고 여겼다. 낙양을 평정하고 단웅신(單雄信)을 포로로 잡았는데, 그는 이세적의 옛 친구였다. 그러자 이세적은 단웅신의 재주와 무력을 임금께 알리고 또 말하길 『만일 금고형으로 사형을 대신해 주신다면 반드시 보은(報恩) 할 것입니다. 청컨대 관직을 주고 속죄케 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는데, 임금이 허락지 않았다. 이에 울부짖어 통곡하며 넓적다리를 베어 친구에게 먹이며 말하기를『삶과 죽음은 영원한 이별이다. 이제 나의 이 살은 너와 함께 흙으로 돌아간다.』라고 하였다. 친구의 아들을 거두어 양자로 삼았다. 천성이 우애로워 그 누이가 병에 걸리자, 일찍이 스스로 죽을 끓이고 자기 수염을 태워 먹이곤 하였다. 누이가 그만 두라고 말하자, 답하기를 『누님은 병이 많고 저도 또한 늙었으니, 비록 자주 죽을 끓여 드리고자 한들 몇 번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세적은 군대를 부리는데 지략이 뛰어나, 적군을 헤아려 변화에 대처하는 것이 모두 그때 그때의 상황에 꼭 맞았다. 남의 장점을 들으면 손뼉을 치며 감탄했다. 전쟁에서 승리하면 반드시 공을 아랫사람들에게 돌렸다. 금이나 비단을 얻으면, 다 병사들에게 나누어주었고, 자기 개인을 위하여 저축해 두지 않았다. 드러나 법을 지키는 것은 매우 엄하였기 때문에, 병사들이 그를 위하여 쓰임을 당했다. 일에 임하여 장수를 선발할 때에는, 용모가 뛰어나고 순후하며 복스럽게 잘생긴 이들을 골라서 보냈다. 혹자가 그 까닭을 물으면, 답하기를『박명(薄命)한 사람은 더불어 공명(功名)을 이루기에 부족하다.』라고 했다. 이세적이 죽으니, 병사들이 모두 울었다.
  병이 계속된 이래로, 임금과 황태자가 약을 하사하면 먹었지만, 가솔들이 의원을 부르려 하면 허락지 않았다. 여러 아들들이 굳이 약을 올리면, 매번 말하기를 『나는 산동(山東)의 농사꾼으로서 삼공(三公)의 지위에 올랐고 또 나이도 팔십을 넘겼으니 이는 천명(天命)이 아니겠느냐! 생사는 하늘에 달려 있는 것이니, 어찌 의원에게 가 살기를 구하리요?』라고 하였다.

  동생 필(弼)은 처음엔 진주자사(晋州刺史)로 있었는데, 이세적이 병이 들자 불러서 사위경(司衛卿)으로 삼고 형을 보살피도록 했다. 이세적이 문득 말하길 『내가 조금 차도가 있는 듯 하니, 술자리를 마련해 즐기자꾸나.』라고 하고는, 이에 음악을 연주하고 연회를 베풀고 자손들을 모아 아래에 늘어서게 했다. 장차 연회가 끝나려 하자, 동생 이필에게 말하였다. 『내가 죽을 때에는 유언을 하고 싶다. 그러나 슬픔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을까 염려되니, 지금 이 한번으로 결별하겠다. 내가 보아하니, 방현령, 두여회, 고계보 등은 모두 애써 그들의 가문을 일으켜 세웠고 또 후손들에게 물려주기를 바랬었는데, 모두 불초한 자손들에 의해 무너졌다. 나의 자손들을 이제 너에게 맡기니, 너는 신중히 살펴서 언행을 삼가지 않거나 나쁜 무리와 사귀는 자가 있으면 곧 매질하여 죽이고 두루 알리거라. 그리하여 후인들로 하여금 마치 내가 방현령이나 두여회를 비웃듯이 나를 비웃게 하지 말라. 내가 죽으면 베포 포장한 뚜껑 없는 수레에 관을 싣고, 평상복을 입혀 염하고 그 위에 관복을 덮거라. 만일 죽어서도 지각이 있다면, 이 조회 복을 입고 돌아가신 고종 폐하를 받들어 알현하기를 바라노라. 부장품으로는 오직 대여섯 마리의 모조 말을 만들어 아래에 휘장을 두르고, 검은 머리에 흰 비단 치마를 입은 인형 열 개를 중간에 세우도록 하고, 다른 것은 좋게 하지 말라. 첩들은 남아서 자식을 양육하고자 하는 이만 허락하고, 나머지는 내보내거라. 장례가 끝나면 너는 우리 집으로 이사 와서, 어리고 약한 이들을 잘 보살피도록 하라. 만일 내 말을 어긴다면, 내 시체를 다시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다.』그리고는 다시 말하지 않았다. 이필 등이 그 말을 따랐다. 이세적은 본래 이름이 세적(世勣)이었는데, 고종 때에 이르러 태종의 이름자와 같은 글자인 세를 휘(諱)하여 적(勣)이라고 명명했다. 후에 고종의 묘당에서 함께 제사 지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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