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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21년(1991)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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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단 : 새 삶의 길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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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삶의 길을 찾아서

 

참 종교를 갖고자 세월을 보내다가 어느덧 사십이 …

 

         

임영배<선무ㆍ봉천2방면>

 

  나는 삼남매 중 차남으로 위로는 형님, 아래로는 누이동생이 있다. 우리는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일본 오사카에서 사업을 하고 계시는 조부님 밑에서 본의 아니게 이민생활을 하게 되었다.

  내가 국민학교 2학년때로 기억된다. 오사카 시내에 있는 집에서 멀지않은 어느 사찰에서 밤에 활동사진을 상영한다기에 시간을 맞추어 간적이 있었다. 제목은 「지옥과 극락」이었는데 지금까지 뇌리에 박혀있는 것은 지옥의 장면으로 인간이 마지막으로 절규하는 아비규환이었다. 그 광경은 너무나 처참하여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목불인견이었다.

  인간은 왜 태어났을까. 사람은 나면서부터 알게 모르게 죄를 짓기 마련인데 장차 나는 인생 처세를 어떻게 해야할지. 어린 마음에 너무나 걱정스러워 밤을 뜬 눈으로 지새우며 눈물을 흘렸다. 맨발로 바늘 동산을 걷는 장면, 혓바닥처럼 너울거리는 불속에 거꾸로 매어달리는 장면, 기름가마 속으로 떠밀리며 필사적으로 발악하는 장면 등 인간이 죽은 후 겪어야 하는 몸서리쳐지는 고통에 대하여는 속수무책인 것 같아 한 때는 생에 대한 의욕마저 상실하였다. 그래서 자살할까 생각해 보았지만 그것 역시 죄짓는 일이 되므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방황하고 있었으나 세월이 약이라는 말이 있듯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종교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가 없어서 고국에 되돌아 온 후 일본 종교인 일련교, 천리교, 정심교의 교리탐구를 해보았다. 그러나 임진왜란때 목숨을 잃은 우리 조상님들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분들의 사무친 원한은 이 땅의 어느 곳에나 서려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일본 종교에 대한 맹종은 우리의 민족혼을 빼앗아 갈지도 모를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그만 두게 되었다.

  대구에서 생활할 때는 중국 종교인 국제도덕협회에도 다녀 보았지만 나로서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또 기독교의 신구약성서를 탐구하고 장로, 목사, 기독교도인 친구들과 어울려 생활도 해 보았다. 또 서울에서 천주교 산하의 신길동 소재 돈 보스코의 호세실바 마인드 콘트롤 교실에서 심령과학에 대한 공부과정을 거쳤다. 거기에서 나는 소련제 특수 카메라로 촬영했다는 사진 즉, 밤1시에 기제사를 지내는 과정에 조상이 응감하는 장면이 분명히 박혀 있는 책자도 보게 되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도 기독교의 일관된 편협성, 배타성 등 의문스런 수수께끼만 더욱 늘어났다.

  그래서 조계종 본산인 조계사를 찾았다. 대의스님이 살아계실 때 동국대 불교학과를 나온 친구들과 절을 자주 찾아 대의스님과 불경에 대하여 법론도 가졌으며 나 외의 다른 친구들은 불제자가 되었고 나만 공부를 더 해본다고 사양했었다.

  참종교를 갖고자 허송세월을 하다보니 독신자로 인생 사십 불혹의 나이를 넘기게 되었다. 그러할 즈음 이화여대 입구에 있는 형님의 가게에서 지금의 선사. 교정, 선무에게 도담을 듣게 되고, 「화평의 길」 영화도 보며 지내다보니 귀국 후 고향에 있을때에 일가 어른들께 들었던 얘기가 머리를 스쳤다. 음력 시월 상달에 안택고사를 지내고 떡을 쩌서 이웃과 더불어 고루 나누어 먹는 미풍양속이 바로 구천상제님의 존호이신 시루「증」자 메「산」자 증산이시고 옥황상제님의 솥「정」자 메「산」자 정산이신 양위 상제님의 진리를 뜻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창생들에게 보여 주신 바라 사료되어 나름대로 그 의미를 생각해 보니 솥「정」자, 시루「증」자 베풀「포」 큰「덕」자가 지니는 의미는 솥에 불을 가해서 시루의 떡을 쩌 잘 익은 떡을 이웃과 고루 나누어 먹는 평범한 생활양식이 바로 상생의 진리가 아닌가 하고 여겨져 형님과 상의한 끝에 84년 봄에 입도를 했다.

  그 후 나는 포덕사업을 시작했다. 마음 같아선 몇 백명은 쉽게 되리라 생각했으나 마음먹은 바와는 달리 아주 어려웠다. 그리하여 우선 몸으로 진리를 깨닫고자 하여 노동을 하고자 했으나 윗 임원의 승낙을 받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다행히도 여주 참배 때 일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지만 10일도 못하고 감기 몸살을 앓게 되었다. 그래도 이를 악물고 극복하다 보니 나중에 가서는 백회 아홉푸대도 거뜬히 지게 되었다. 여주수도장 건설공사를 순조롭게 석달 일주일만에 완공할 수 있었다는 것은 범인(凡人)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 신기한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봄까지만 해도 숲이 우거졌던 골짜기에 가을이 되자 궁궐이 세워졌다고 하여 주변마을에서는 지금도 도깨비가 지은 것이라고 말을 하고 있다. 건설초에서부터 물이 귀한 이곳에 밤만 되면 비가 흡족하게 내리고 낮에는 날이 개여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전문가들도 3년 이내에는 완공할 수 없는 일이라 하니 마무리 단계까지 일한 나로서도 이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끝으로 글을 써본 적이 없는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상제님의 진리에 대하여 확신이 서지 않는 분들에게 다소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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