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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21년(1991)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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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기 : 대진대학 건설의 현장 포천군을 찾아서

대진대학 건설의 현장 포천군을 찾아서

 

대진대학은 대순하신 진리를 세계만방에 펼칠 수 있는 진리의 전당이 될 것이다.

 

 

<연구실>

 

▲ 포천군의 명소 산정호수

 


포천의 자랑

  포천에는 여러 가지의 자랑거리가 있다.

  산악지대인 탓도 있겠지만 7백 가지가 넘는 수목들로 우거진 수풀에 쌓인 광릉임업 시험장과 이 숲속에서 서식하는 크낙새를 들수 있다. 광릉 숲에 사는 크낙새의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은 1800년대 후반의 일로써 크낙새는 일본의 대마도와 이 숲속에서만 발견된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새인데 이는 그만큼 수풀이 울창하고 자연 경관이 뛰어났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물이 깨끗한 만큼 백운계곡의 물로 빚은 이동 막걸리는 이 고장뿐만 아니라 다른 고장에서도 많이 알려져 「포천」하면 막걸리를 연상케 한다.

  술맛은 손맛도 있어야 하지만 역시 물맛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는 이동면 도평리(都平里)의 한일탁주 합동제조장 대표인 하유천(河有千)씨에 따르면 막걸리는 달고시고 쓰고 떫고 싸한 다섯가지의 맛이 깃들어 있다고 한다. 그중 이동 막걸리는 특히 단맛(감칠맛)과 싸한 맛이 뛰어난데 이는 미네랄이 풍부한 백운산(白雲山)생수(生水)가 부리는 조화가 아닌가 싶다.

  이 외에 포천에는 잣이 유명한데 이 군에서 나는 잣은 알이 굵고 껍질은 얇아 잣송이가 알차기로 나라안에서 으뜸이다. 잣은 청산면 금동리에서 많이 나 청산 잣 또는 금동잣이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수확량이 많아 한 집에서 백가마씩 거둘때도 있다고 한다.



문화유산

  포천에는 여러 가지의 문화유산이 있는데 선사시대의 유적으로는 북방식 지석묘가 수입리(氺入里), 자작리(自作里), 추동리(湫迵里), 금현리(金峴里)에 있어 이 고장의 역사가 청동기시대때부터 정착민이 살고 있었음을 추증케 한다. 그리고 포천군의 지정문화재로는 신라의 유명한 석학 최치원(崔致遠)을 받들고 있는 청성사(凊城祠), 한음 이덕형(漢陰 李德馨)과 용주 조경(龍州 趙坰) 두 명신의 유덕을 받들기 위해 세운 용연서원(龍淵書院), 인평대군치제문비(麟坪大君致祭文碑), 이항복선생의 묘와 화산서원(花山書院), 최익현 선생을 받들어 모신 채산사등 다수가 있다. 한편 포천에는 가장 오래된 사찰로서 백운산(白雲山) 흥룡사(興龍寺)를 들수 있다. 이 절은 고려 태조때 도선국사가 건립하고 조선왕조 이태조때 무학대사(無學), 무영(無影)등이 중건하였는데 흥룡사는 그 지형이 「구름 가운데 신선이 앉았다」고 일컬어진 절경이며 세종의 친필이 보관되어 있다.

  그리고 청성산(靑城山, 일명 반월산)의 서남단 중턱에는 높이 6척의 석불(石佛)이 세월의 무상함을 말해주듯이 남쪽을 향해 무심히 서 있다.

  이 석불입상은 화강암 1석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소발의 두성에는 큼직한 유계가 있고 상호는 원만한 편이다. 양쪽 귀는 길게 흘렀고 목에는 3도(道)를 두른 흔적이 희미하게 나타나 있으며, 양어깨는 당당하여 자비스러우면서도 위엄이 있어 보인다. 수인(手印)은 왼손을 허리 앞에서 상장(上掌)하고 오른손은 가슴 앞에서 외장(外掌)하였다. 현재 허리 부위 이하의 부분은 매몰되어 있으므로 양각부분을 잘 알수 없다.



인물

  『살아서는 포천가야 양반이고 죽어서는 장단가야 양반이다』라는 옛 말이 있듯이 포천군에는 예로부터 벼슬하던 선비와 양반이 많이 모여 살았다. 이 지역 출신의 인물중 출중한 사람으로는 양사언(楊士彦), 한음 이덕형(李德馨), 이서구(李書九), 최익현(崔益鉉)을 꼽을 수 있다.

  양사언은 중종 35년(1517)신북면 기지리(機池里)에서 출생하였으며 호가 봉래(蓬萊)인데 문장이 뛰어나고 시에 능하며 필재(筆材)도 뛰어난 한국의 명문장가요 명필이다.

  한편 이서구의 경우 영주30년(1754)에 출생했고 포천군 영중면(永中面) 양문리(梁文里)에서 살았으며 인흥군(人興君)의 6대손이다. 각 지방을 돌며 정사를 보았고 학(學)과 덕(德)을 겸비해서 청탁(淸濁)을 분명히 할 줄 알았다. 양평의 양문대신으로 이름이 나 있는 이서구에 대한 일화도 많이 전하여 지는데 그중 하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그가 정조17년(1793) 40세에 대사헌으로 특진되었다가 대사성(大司成)으로 전근되었고 또 다시 전라도 관찰사로 나갔을 때 하루는 미륵불 앞을 말을 타고 지나치다가 말이 갑자기 움직이지 않으므로 이상히 여기고 있노라니 공중에서 『서구야 이글을 받아 적으라』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한다. 이서구는 정신없이 노래가사를 종이에 기록하게 되었는데 그 글이 오늘날까지 구전되어 오는 채지가라고하는 일설이 있다. 그리고 근세사에 들어서서 포천지방을 대표하는 인물로 최익현을 꼽지 않을수 없다. 그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최익현의 호는 면암(勉菴), 초명(初名)은 기남(奇男)이며 자(字)는 찬겸(贊謙)이다. 그는 신라시랑(新羅侍郞) 최치원의 세손(世孫)으로서 포천현 내북면 가채리(현 포천군 신북면 가채리)에서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그는 6세때부터 학문을 시작하였는데 그 총명함이 주위사람을 놀라게 하였으며 청빈한 가세(家勢)로 인하여 여러 차례 이사를 하면서도 면학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면암이 정식으로 학문을 시작한 것은 14세때(1846)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문하에 들어갔을 때 부터이다. 이항로는 한말의 대유학자이며 성리학자로서 유림들간에 숭앙을 받고 주자(朱子)와 우암(尤庵)의 도통(道統)을 이어받은 인물이었다. 화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성리학의 명분론과 존왕양이(尊王壤夷)의 춘추의리(春秋義理)를 강조하였다. 당시는 자주적 전통질서가 파괴되어 가는 시기로 그는 문인(門人)들에게 척사위정(斥邪衛正)에 의한 전통회복과 창의호국 할 수 있는 정신적, 실천적 교육을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화서의 제자인 면암의 사상은 화서의 척사위정 사상이 그 바탕이 되었으며 그것은 민족국가의 자주권 회복과 구국항일 운동으로 승화되어 갈 수 있었다.

  그가 44세 때 왜선이 강화에 들어와 수호조약을 강요하자 고종에게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고 74세(1906년) 되던 2월에는 몸소 의병을 일으켰다. 이때 그는 전라북도 일대를 두루다니면서 의병을 규합하여 정읍과 고창에 갔다가 순창군수 이건용(李建鎔)등이 일본군과 합세해서 진격해 옴에 따라 서로 격전을 벌이다가 패하여 잡히고 말았다. 그해 6월 25일, 일본사령부는 의병장 최익현을 대마도 위술경(衛戌警) 경비대 안에 감금하였다. 면암은 이곳에서 단식으로 항거하던 중 발병한지 1개월 만인 그해 11월 17일(음력) 74세를 일기로 옥중에서 순사하였다.



대진대학설립의 의의

  교육의 주요 목표는 주체적인 전인 교육의 실현이라 하겠다.

  주체적 교육이라 함은 내용과 방법에 있어 교육이 외부의 영향에 의존하지 않고 자주적인 필요와 원리에 근거한 교육을 의미하며, 또한 민족의 동질성을 고취, 자각시킴으로써 민족의 세계사적 사명을 정립하고 민족의 활로를 개척하는 투철한 역사의식을 배양하여 주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학교의 설립이 필수적인데 83년 말 현재 국민학교 24개, 중학교 11개, 고등학교 6개에 불과한 포천의 저급한 교육환경과 함께 이렇다 할 대학교 하나 없는 이 지역으로서는 우수한 실력을 갖춘 많은 학생들이 서울등지로 유출되어 인재 공동현상을 초래하게 되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1991년 4월 13일 포천지역에서는 최초로 대진대학 기공식을 함으로써 이 지역에 인재 양성소로서의 입지를 굳건히 해줄뿐만 아니라 한국 교육의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할 역사적 계기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이는 오늘날 대학이 필요로 하고 있는 전인교육의 실현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교육의 인간화란 개인적으로는 개개의 인간이 인간답게 살수 있도록 정신적, 내면적 자질을 구비한 일이요. 사회적으로는 모든 인간이 창의성을 갖고 보람있게 살수 있도록 역할을 수행하고 변행시켜 가는 자질을 기르는 일이다.

  이러한 시대적인 요청에 의하여 진리탐구의 상아탑으로서 크나큰 진리(大眞)가 세상에 그 빛을 발하게 된 것이다. 더욱이 상제께서 김경학(金京學)의 집에 대학교(大學校)를 정하시는 공사를 보시고 『「학교는 이 학교가 크니라. 이제 해원시대를 당하였으니 천한 사람에게 먼저 교를 전하리라」하시고 경학을 시켜 무당 여섯명을 불러오게 하고 그들의 관건을 벗기고 그들의 각자 앞에 청수를 떠놓고 그것을 향하여 사배를 하게 하고 시천주 세 번을 제각기 따라 읽게 하셨도다. 이것을 끝내고 그들의 이름을 물은 다음에 각자로 하여금 청수를 마시게 하니 이것이 곧 복록이로다. 이것이 해원시대에 접어들어 맨 먼저 천한 사람들에게 교를 전하신 것이었도다』(교운 1장 32절)의 구절에서 볼 수 있듯 이 해원시대를 맞이하여 못배운자들에게 진리를 전함으로써 그들의 못배움으로써 맺힌 한많은 삶에 희망과 광명을 비추게 하시는 공사이기도 하다.

  또한 『형렬에게 가라사대 법(法)이란 것은 서울로부터 비롯하여 만방(萬方)에 펼쳐나가는 것이므로 서울 경자(京字) 이름 가진 사람의 기운을 써야 할지로다. 그러므로 경수(京洙)의 집에 수명소(壽命所)를, 경학의 집에 대학교(大學校)를 , 경원(京元)의 집에 복록소(福祿所)를 각각 정하노라』(예시 46절)는 말씀에서 볼 수 있다. 이제 대진대학은 상제님의 대순하신 진리를 세계 만방에 펼칠 수 있는 진리의 전당으로써 역할을 충분히 발휘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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