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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절후 신명의 생애 : 이세적(李世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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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적(李世勣)
이세적(李世勣)은 자가 무공(懋功)이고, 조주(曺州) 이고(離孤) 사람이다. 본래 성은 서씨(徐氏)이며 위남(衛南)에게 빈객 생활을 했다. 집안이 부유하여 종들이 많았으며, 항상 수천 종(鍾)의 곡식을 쌓아 두고 있었다. 세적은 그 아버지 개(蓋)와 함께 베풀고 빌려 주는 것을 좋아했으며, 두루 나누어 줄 때에는 친한 이나 그렇지 않은 이를 차별하지 않았다. 적양에게 유세하여 말하기를『공의 고을은 약탈하기에 적합지 않습니다. 송(宋)·정(鄭) 나라 상인들의 회합이 어하(御河) 중에서 열리기 때문에 그곳은 배가 끊이지 않으니, 그곳에 가서 탈취하시면 자본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밀이 세적을 우무후대장군(右武候大將軍)과 동해군공(東海郡公)으로 임명했다. 이때를 당하여 하남(河南)과 산동(山東) 지역에 홍수가 나자, 수(隋)의 임금이 굶주린 백성들로 하여금 여양창(黎陽倉)의 곡식을 먹도록 조처했는데, 관리들이 제때에 곡식을 풀지 못하여, 하루에도 죽는 자가 수만 명에 이르렀다. 밀이 휘하의 병사 오천 명을 세적에게 주고, 학효덕 등과 더불어 하수(河水)를 건너 여양을 습격한 뒤, 그곳에 남아 지키고 있도록 하였다. 여양 창고를 열어 식량을 나누어주니, 열흘 만에 모여든 병사가 일만 명에 이르렀다. 우문화급(宇文化及)이 병사를 이끌고 북상(北上)하자, 밀이 세적으로 하여금 곡식 창고를 지키도록 하였다. 세적은 두루 참호를 파서 스스로를 방어하였고, 화급(化及)이 공격해 오자 세적이 지하도를 이용해 나가 싸우니, 화급이 크게 패배하여 병사를 이끌고 달아났다. 장사(長史) 곽효각(郭孝恪)에게 일러 말하길『많은 백성과 영토는 모두 위공(魏公)의 소유입니다. 내가 만일 이들을 헌납한다면, 이는 주인의 패배를 이롭게 이용해 나의 공으로 삼는 것이니, 제가 수치로 여기는 바입니다.』라고 하고는, 곧 군(郡)·현(縣)의 호적을 조사하여 구두로 밀에게 보고하고는, 밀 스스로 임금에게 상주할 것을 청했다. 임금이 기뻐하며 말하길『충직한 신하로구나.』라고 하며, 조서를 내려 여주총관(黎州總管)을 배수하고 내국공(萊國公)으로 봉했다. 성씨(姓氏)를 하사하여 임금의 혈족으로 속하게 하고, 조(曺)로 옮겨 봉했다. 또 최상등급의 전답 50경(頃)을 주었다. 세적의 아버지 개(蓋)를 제음왕(濟陰王)으로 봉했는데, 굳이 사양하자, 서국공(舒國公)으로 고쳐 봉했다. 조서를 내려 세적으로 하여금 하남(河南)과 산동(山東) 지역의 병사를 총지휘하여, 왕세충을 막게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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