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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23년(1993)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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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문단 : 아프리카 하늘 아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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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하늘 아래서

 

 

한용준 <선무ㆍ동해4방면>

              

  지금으로부터 약 7년전인 1986년 4월에 ㈜동남소속 트롤선 기관장으로 남미 포클랜드 선상에서 근무하던 중 기다리던 아내의 편지를 받아보니 가족모두 건강하다는 말과 함께 느닷없이 종교를 하나 갖고자 하는데 나의 회답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곧 종교를 갖는 건 좋으나 함부로 택하지 말고 900여종이나 되므로 어느 종교를 믿어야 될지 모르니 내가 본 견해에서는 천주교가 무난할 것 같다고 회답을 보냈다. 그 후 아내로부터 대순진리회에 입도했다는 서신이 왔다. 당시 종교에 대해서 박식했던 내가 들어보지 못했던 생소한 종단이름이라서 나는 수 차례 편지로 세상에는 사이비 종교가 무수히 많으니 잘 판단해서 선택하라고 조언했었다.

  그 후 아주 좋은 종교라면서 대순회보를 보내왔는데 먼저 훈회와 수칙을 읽어보니 인륜도덕이 땅바닥에 떨어진지 오래된 현 시대에 이렇게 좋은 종교가 있었던가 하는 감명 속에 나름대로 조상을 숭배하고 삼강오륜을 중요시하는 나로서는 기꺼이 잘해보라는 회답을 보냈다. 그 후 나는 기적적인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것은 내가 해외 항해 중이었던 87년도 중반에 아내가 뇌막염 초기 증상이 나타나 종합병원들의 수술 거부를 받고 마지막으로 포항 선린병원 모 과장이 죽어도 좋다는 보호자 허락만 있으면 수술을 시도해 보겠다고 하여 큰형 허락과 당시 포항회관 김선감 이하 안선사등의 주선으로 장장 4시간이 넘는 대수술을 받았었다. 말을 듣고 아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병원측에서도 자기들 의술로는 살릴 수 없는 사람이 회생했다는 말을 듣고 대순진리회를 더욱더 흠모했으며 남편도 없이 생사(生死)의 기로에서 수술대 위에 누워야 했던 아내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하는 심정과 함께 사경 속에서도 도를 찾았던 아내에게 항상 대견스럽고 감사하며 한편 곁에 같이 있지 못한 나로서는 할말이 없다. 그러던 어느날 느닷없는 두통의 편지가 운반선 편으로 왔다. 매형의 편지와 친구의 편지였는데 돈벌이에만 집착하지 말고 아내간수도 잘 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때 나는 앞이 캄캄했었다. 당장 귀국하고 싶은 심정으로 무전으로 회사에 타전했으나 불가능한 일이고 가정에 문제가 있어 본인이 원한다면 뒷조사를 해서 처리해 주겠다며 임기전에 기관장은 바꿀 수 없다는 전보를 받고 물에라도 뛰어 들어 버리고 싶은 심정을 꾹 눌러 참으며 아마도 헛소문이겠지 하면서도 신경이 곤두서서 죄없는 기관사들에게 화풀이를 하곤 했었다.

  이러는 중에도 아내로부터 오는 편지의 내용은 가족모두 편안하니 당신 건강에 유의하라는 것이었다. 웃고 웃는 동안에 세월이 흘러 드디어 회사에서 싱가폴로 회항하란 무전을 받고 나이팅게일섬을 통과하여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향해 귀항하는 길인데도 왠지 즐겁지가 않고 씁쓸한 심정이었다.

  장기간 항해 끝에 88년 올림픽이 끝나갈 무렵 싱가폴항에 입항을 해서 인수인계를 한 후 귀국을 했는데 언제나 변함없이 아내는 김포공항에 마중을 나와 나를 반겨주었다.

  그때 나는 대순진리회나 도인들에 대한 남의 말을 백마디 천마디 들을 필요 없이 직접 내 눈으로 확인을 하고 바르게 도에 대해 인식과 이해를 해나가야 겠다고 다짐했었다. 그 후 오랜만에 귀국한 나를 위해 선감께서 저녁준비를 해두었다고 가자고 하기에 우리식구 전부 식사 대접을 받고 그 분의 도담도 들었다.

  그 후 선감들께서 몇 번 오시고하여 여주도장 참배를 갔는데 그 동안 살아 오면서 내자신이 어느 단체나 모임에서도 볼 수 없었던 질서 정연함과 예절 바름을 그곳에서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새 중에 제일 예절 바른 새인 기러기는 한 달이라도 저보다 먼저 난 놈 앞에서는 절대 날아가지 않는다는 말도 있지만 대순진리회 도인들이 바로 아련히 잊혀져 가는 예절을 현시대에 실천하고 실행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참배를 다녀온 후 나는 꿈에도 그리던 두루마기를 입고 입도식을 했다. 그 동안 아내의 뒤를 따라 입도하고 싶었었는데 무엇이 항상 내 마음을 붙잡고 있던 중 입도식을 치르니 마음이 말끔히 트여짐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한편 아내가 하는 일에 불만이 조금은 있었다. 그러나 그 후 모악산, 금산사, 개태사, 은진미륵, 동곡약방 등지를 참배 또는 성지순례를 다녀오고 서울 본부도장 기도공부도 몇 차례 들어 갔으며 대진대학교 공사할 때도 두루 다니면서 이제야 겨우 병아리가 눈을 뜨려고 하니 마음 속으로만 항상 바쁘구나 바쁘구나 하면서 실천하지 못한 것이 부끄럽기 그지없다.

  89년도에도 나에겐 잊을 수 없는 일이 있었다. 80년도에 약혼식을 하고 아이들을 낳고 살면서 가정에 어려움도 있었지만 워낙 내가 해외로 떠돌이 생활을 하다보니 시간이 없어서 결혼식을 못 올렸었다.

  89년 11월에 대구회관 지하 강당에서 천선감의 주례 속에 2백 여명의 도인들의 축복을 받으며 마흔 두 살에 결혼식을 올렸으며 그 후 선무라고 부르기엔 너무나 미약한 내가 선무 임명까지 받았다.

  항상 부족한 나 자신이 박선사에게 마음 탁 놓고 수도생활에 전념할 수 있도록 밀어 주지 못하는 것이 항상 부끄럽고 미안하게 생각한다.

  아울러 아직 대순을 모르시는 분이라도 상관없으니 한번쯤 참배 가는 대순차에 동승하여 여주 도장에 가셔서 관계자들의 심우도 교화를 들은 뒤 자신을 비추는 거울을 한번만이라도 보고 자신을 돌아본다면 가슴에 와 닿는 것이 있을 것이다. 항상 내 주위에서 물심양면으로 보살펴 주시고 지도해 주시는 방면 선감이하 임원들 그리고 도인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지금 내가 있는 이곳 사하라 사막에도 기상이변인지 많은 눈이 내렸다. 사하라 사막에 접해있는 모르타니아란 나라에도 유래 없는 천둥번개를 동반한 소나기가 쏟아지고 50년에 비한번 볼까 말까하는 이곳에도 한달 전 6일간 장마비가 억수같이 내렸었다. 이러한 기상이변 속에서도 나는 상제님을 믿기에 어떠한 두려움도 없다. 도는 원근이 없이 통하는 것이니까.

  오늘도 내일도 상제님의 덕화선양을 이곳 아프리카에 널리 전할 것을 다짐하며 멀리 모르타니아에서 도인 여러분의 건강을 빌어 드리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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