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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23년(1993)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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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 인간의 선과 악

인간의 선과 악

 

              

윤지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책임편수원ㆍ법학전공>

    

서언

  오늘날 인류의 생활은 산업과 과학 기술의 고도한 발달에 따라 물질적으로는 풍요하고 다양해져 청황의 미덕이 풍비되고 있지만, 반면에 그만치 정신적으로는 사람의 인식력과 판단력이 흐려져 철학의 빈곤과 가치관의 타락이 문제화되고 있다.

  사람이 사람을 위하여 창의하고 남발해가는 과학문명이 바로 그것으로 인하여 사람의 멸망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면 참으로 한심한 자가당착이 아닐 수 없다. 일찍이 증산(甑山)께서는 사람의 본성과 당위에 관하여 많은 말씀을 하셨다. 현재 물질문화만의 일방적 발전은 지금에 이르러 더욱 문제를 크게 야기시키고 있다. 이에 필자는 철학에서 말하는 몇 가지 문제와 관련하여 사람은 진정 무엇인가를 적어 본다.

 

 

인간 욕망

  사람이 악을 무시하고 선만을 취한다면, 인간세계는 문제될 바가 전혀 없는데, 선악의 구별을 흐리게 하고, 악을 취함에 용이해지는 인자가 인간욕망에 있다. 사람의 욕망은 자연욕과 명예욕으로 대별된다. 자연욕이란 문자 그대로 극히 자연적이어서 우주를 살아가는 만물에 공통된다. 목이 마르면 물을 찾아 마시게 되고, 배가 고프면 먹이를 찾아 먹게 되며, 몸이 추우면 따뜻한 곳을 찾아 녹히고, 더우면 시원한 곳을 찾아 식히며, 눈비가 오면 안전한 곳을 찾아 피하고, 심신이 피곤해지면 안식처를 찾아 휴식한다.

  무릇 생물의 이러한 자연현상은 일시적이거나 일회성이 아니라, 중복하여 계속되는 것이므로 각자가 나름대로 합리적이고 경험적인 시행착오를 거치는 과정에 물과 빛 그리고 바람 등 자연여건을 최대한 활용하여 둥지란 삶의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그 속에 식·의의 자료를 저장하는 보고까지 곁들여 지속적인 안정을 추구한다.

 

 

문화

  그러나 사람의 이러한 생물로서의 자연욕은 문화가 형성되면서 일탈해지기 시작하였다. 즉, 불을 발견하여 먹이를 구워 먹고 어둠을 밝히며 추위를 피하고, 칼·화살·낚시 등 도구를 만들어 적극적으로 먹이를 사냥하고, 괭이·호미·삽 등 농구를 만들고 씨앗을 뿌려 가꾸는 농경을 개발하면서부터 선사시대의 원시성에서 벗어나 역사가 형성되어 문화가 싹튼다. 이때부터 사람의 자연욕에는 본질적 변화가 태동한다. 즉, 원시생활에서 문화생활에로의 전이가 시작된 것이다. 인간의 원죄는 이에서 비롯된다. 즉, 동물적 먹이에서 인위적인 가공의 음식문화가 생겨나 단순한 굶주림의 충족보다 맛있고 영양 높은 요리로 미각을 두고, 피혁을 걸치는 동물적 치장에서 생체의 단조로운 보익보다 멋있고 편리한 피복문화가 생겨나 미각을 만끽하며, 풍우설로를 피하는 동물적 토굴에서 안전하고 쾌적한 건축문화가 형성되어 삶의 안정감을 향유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많이 가진 자가 덜 가진 자가 구별되고, 많이 가진 자는 못 가진 자나 덜 가진 자에 군림하고 지배하는 계급이 형성되었다.

  인간의 식·의·주생활이 여기에 이르면 자연욕은 점차로 그 한계를 벗어나 명예욕에 이른다. 즉, 갈증이 극에 달한 사람에게 한 방울의 물이 생기면 타는 듯한 입술을 적시게 되고, 한 컵의 물이 더 생기면 감로수처럼 맛있게 마셔 그의 갈수증을 면하게 되지만, 한 바가지의 물이 더 생겨나면 세수를 하거나 당장의 위급한 것이 아닌 것에 쓰게 된다. 일허나 가치효용의 한계는 사람의 욕망이 자연욕에서 명예욕으로 전이하는 과정을 잘 설명해 준다.

 

 

경쟁과 투쟁

  명예욕은 자연욕에서 확대된 상위개념이다. 다시 말하면 자연욕의 충족 없이는 발동될 수 없는 욕망이다. 사람은 이 명예욕을 충족하기 위하여 상대와 끝없이 경쟁하고 투쟁하게 되고, 그 결과 승리자는 패배자가 가진 것을 빼앗고 그에 군림하고, 상대적으로 패배자는 승리자를 두려워 하여 그의 지배를 받고 복종하는 종속관계를 형성한다. 자연욕에 기초한 명예욕을 둘러싼 인간관계는 드디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상태를 야기시키고, 승자와 패자의 끝없는 반복현상을 낳아 정·반·합의 변증법을 형성시켜 왔다.

  인간의 저마다의 욕심을 충족하기 위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상태는 승자보다 패자의 처절한 좌절감을 낳고, 싸움의 허탈감을 태동 시켜 힘의 효율화에 대한 절망감을 쌓게 하였다.

 

 

공동체

  여기에서 힘의 집약화를 위한 집단의식이 붕아되어 그 결과, 가족·촌락·사회 및 국가의 순으로 공동체가 형성되게 되었고, 더불어 친족·주민·민족의 순으로 공동체의식이 발전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인간의 공동생활은 필연적으로 구성원의 욕구를 함께 모은 공동목표를 설정하게 하고, 그 목표를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하여는 필수적으로 상하의 복종관계와 기능을 분담하는 협동관계를 정하는 조직을 낳았으며, 함께 싸워 쟁취한 수확물은 각자의 역할의 지속·발전이 가능하게 되었다.

  인간의 이러한 공동체생활은 힘의 분산을 방지하고, 무익한 투쟁을 예방하며, 지혜와 힘의 축약화에 따른 능률있는 운영을 통하여 보다 많은 수확을 보다 쉽게 성취할 수 있어 구성원의 만족감을 높일 수 있었다. 개인은 공동체 안에서 안락한 안정감을 향유할 수 있고, 공동체의 운영을 통해 미래에 대한 예견과 희망이 가능하게 되며, 공동체의 단합된 힘을 통하여 희생 없는 평화상태가 이루어질 수 있어, 개인의 공동체에로의 귀속감이 형성될 수 있었다.

 

 

규범

  그러나 이러한 공동체는 그 구성원으로 하여금 전처럼 멋대로 행위할 수 있도록 용납하지 않는다. 개인의 행위는 단체의 규범으로 제한하고, 나아가서는 특정한 행위는 약정으로 강제한다. 개인의 무제한 되고 자의로운 행위는 조직의 무질서를 야기시켜 급기야는 그 조직을 파멸시킨다.

  그래서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의 개인은 규범을 준수하고 명령에 복종하는 것을 당연스럽게 생각하게 된 것이다. 나아가 개인은 공동체의 규범 안에서 자유를 향유하고, 공동체의 보호 안에서 평화를 누리며, 공동체의 발전과 함께 자기발전도 도모하게 됨에 따라 공동체에 대한 충성심도 발생하게 되었다.

  그런데 인간의 공동체생활은 개인에게 마냥 만족만 가져다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이 지닌 무량무변하고 무한대한 욕망이 공동생활의 규제와 강제 속에서 아무리 축소·감량된다 하더라도 욕망자체가 완전하게 소감되지 않고 성의 본질은 불변한채 개인의 마음속에 항상 잠재하고, 공동체도 아무리 합리적인 공감대에 기초하여 운영된다 하더라도 목표달성실패의 개연성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공동생활을 규제하는 규범 즉, 명령·규칙·법률 등은 인간의 개인적 사생활이나 공동체적 공생활이 날로 발전·확장되어 갈수록 그만큼 늘어나고, 그 규범이 제정당시에는 아무리 합리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을 다한 최선의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일단 상형화(象形化)된 문자로 고정시켜 공포(公布)될 수 밖에 없으므로 날마다 변화하는 현실(現實)과의 사이에 괴리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사실, 규범(規範)은 인간의 인간을 위한, 인간에 의한 산물(産物)이다. 원자적구성분자(原子的構成分子)인 개인들간에 충돌(衝突)하는 욕망(慾望)을 조정(調整)하고, 금지행위(禁止行爲)를 약정(約定)하며 무자비(無慈悲)한 약육강식(弱肉强食)으로부터 약자(弱者)를 보호하기 위한 약속이다. 때문에 규범(規範)은 단순한 존재(存在)만으로는 무의미하고, 그것을 다수의 구성원(構成員)을 처벌(處罰)할 때 힘이 생겨난다. 따라서 규범은 공동체(共同體)를 운영하는 지배자(支配者)와 공동체에 소속하는 모든 구성원에게 평등하게 적용되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며, 동일하거나 유사한 사실에는 항상 그대로 적용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것이 법의 지배의 기본원리이다.

  진정, 규범은 선이다. 때문에 그것은 정의와 질서의 원천이 되고, 인간생활의 특징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규범은 인간생활에서 선을 권장하고 악을 배격하는 공동체환도를 잡아 나가는 권선징악을 선언한 약속의 장전이기 때문이다.

  시원적으로 무엇이 선하고 악한 것인가는 사람에게는 한결같이 자명하다. 즉, 사람은 외형은 각양각색이지만 조물주에 의한 피조물로서는 동일한 개체이기 때문에 마음, 곧 각자가 지닌 양심 하나만은 동일하다. 따라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의 선악은 자아에 내재하는 양심에 접하면 교육에 관계없이 지극히 간단하고 쉽게 판단되는 것이며, 이러한 판단의 기준이 되는 양심은 그가 처한 환경이 아무리 복잡하고 시대의 흐름이 아무리 오래 간다 하더라도 불변한다. 양심에 의한 선악의 기준은 자아에 본성적으로 엄존하는 것이기 때문에 너와 나의 선악이 다를 수가 없다.

  따라서 사람은 나의 욕망에 사로 잡혀 악을 선으로 아무리 위장한다 하더라도 마음속에 항존하는 양심의 가책을 면할 수 없다. 오히려 악에 대한 처벌을 두려워 하는 포악심은 새로운 악을 낳고 그를 선으로 위장하는 시술만 늘게 되며, 나의 악은 곧 남의 악을 낳아 악과 사술(詐術)의 성행으로 악이 선을 구축(驅逐)한다.

 

 

결어

  악이 선을 압도하는 인간욕계는 사람의 욕망을 끝없고 무한대하게 만들어 인간이 아무리 그 능력을 다하여도 욕망의 완전한 충족은 이루어질 수 없다.

  한 세상을 살면서 얼마나 많은 것을 성취하여 욕망을 충족시켰고, 얼마나 많은 경쟁과 투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는지 관계없이 인간의 결말은 한결같이 조용하다. 이는 인간욕망의 무상함과 인간세계의 허망함을 말해 주고, 악으로 쇠진해진 인간기운을 깨우쳐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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