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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38년(2008)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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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典經』용어 : 『典經』용어

『典經』용어

 

  
교무부

• 경무관(警務官) : 행록 3장 58절/52쪽, 3장 62절/54쪽, 3장 63절/54쪽.
갑오개혁(1894년) 때 새로 설치한 경무청의 관직. 경무청의 최고 직책인 경무사(警務使)에 이은 제2직급으로 총무국장을 비롯하여 각 과장 및 경무서장(경찰서장)의 직책을 맡았다. 1907년 7월에 경무청이 경시청으로 바뀌자 경무관도 경시로 개칭되었다.

 


• 경무청(警務廳) : 행록 2장 11절/20쪽, 3장 23절/37쪽, 3장 55절/52쪽, 3장 58절/52쪽, 4장 29절/68쪽.
갑오개혁(1894년)을 통해 설치된 경찰·감옥 업무 등을 총괄하던 서울 한성부의 관청. 1894년(고종 31)에 종래의 포도청을 폐지하고 내무아문(內務衙門 : 내무부) 산하에 일본식 경찰제도를 본뜬 경무청을 설치하였는데, 경무청은 5개의 경무지서(警務支署 : 후에 경무서로 개칭)와 50개의 순검번소(巡檢番所)를 관장하였다. 이와 동시에 종래의 전옥서(典獄署 : 감옥 업무를 맡아보던 관아)를 폐지하고 감옥서를 설치하여 경무청 소속 아래 두었다. 경무청의 설치 당시에는 경무사(警務使)ㆍ경무부관(警務副官) 각 1명과 경무관 서기ㆍ총순(總巡)ㆍ순검 각각 약간 명씩을 두었다. 1895년에는 경무청의 직제(職制)를 개편하여 경무사 1명, 경무관(警務官) 12명 이내, 주사(主事) 8명 이내, 감옥서장 1명, 총순 30명 이내, 감옥서기 2명 이내, 간수장 2명 이내를 두었다.

이 당시의 경무청 업무는 경찰·감옥업무 외에도 출판물 판매 허가, 호구조사, 시장관리, 전염병 예방, 종두(種痘), 분뇨 수거, 매장(埋葬), 광견(狂犬) 단속 등 오늘날의 보건 업무도 함께 겸하였다. 1900년에 경부(警部)로 승격되면서 경무청의 관할지역은 한성부에서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1902년에 경무청으로 다시 환원되었다가, 1907년에 이르러 경시청으로 개칭되어 본격적으로 일본 경찰화하였다.

 


• 경상도민란 : 행록 2장 17절/22쪽.
임술년인 1862년(철종 13) 2월에 경상도 진주에서, 삼정(三政 : 토지세와 군역의 부과 및 양곡 대여와 환수)의 문란과 진주 우병사 백낙신(白樂莘)의 가혹한 탄압을 견디지 못한 농민들의 봉기가 도화선이 되어 전국으로 확산된 민란.

세금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소유하고 있는 토지에 대해서 부과되는 토지세인데, 원래 이 세금은 토지 소유자인 지주들이 내야 되는 세금이었다. 그러나 지주들은 땅 없는 소작인들이 소작료와 함께 이 토지세까지 내도록 강요하고 있어서 일반 땅 없는 농민들의 부담은 클 수밖에 없었다.

토지세 다음으로 큰 세금으로는 군포가 있는데, 이것은 1년에 평민 어른 1명당 포 1필을 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른들의 숫자와는 관계없이 군현 단위로 내야 할 군포량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조선후기로 가면서 평민들이 돈을 주고 양반 신분을 사서 신분상승을 하는 일이 잦아지다 보니 평민 어른들의 수는 계속 줄었고, 게다가 관아의 서리들도 돈을 받고 장부상으로 양반으로 허위 기재해주는 일이 많아서 결국 힘없는 일반 농민들에게 돌아오는 군포의 부담은 1년에 1필이 아니라 그보다 몇 배나 더 되는 것이었다.

또 농민들을 구제하기 위해 관청에서는 춘궁기에 농민들에게 양곡을 대여해주고 추수기에 이자와 함께 양곡을 걷어 들이는 환곡이라는 제도가 있었는데, 지방의 수령들은 강제로 보유 환곡미를 대여해주고는 이자를 받아 자신들이 챙겼다. 여기에 장부상으로 결손이라고 해놓고는 이 결손을 메워야 한다는 명목으로 다시 마을 단위로 결손액을 분담시켜 내도록 만들었다.

이 세 가지 즉 토지세, 군포, 환곡을 전부 합해 돈으로 환산해서 총액을 산정하여 매년 초 각 군이 부담해야 할 총세액을 정하여 각 호 별로 분담액을 정하였는데, 이때 수령 및 서리들의 횡령액이나 장부상 결손액이 모두 총액 속에 끼어드니 농민들이 부담해야 할 호당 부담액은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밖에 없었다. 진주에서 민란이 발생한 시기가 2월초인 것은 바로 이 호당 분담액이 정해지기 직전에 농민들이 이를 막으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진주 우병사 백낙신의 엄청난 부정부패까지 개입되자 가뜩이나 빈농들이 많았던 진주에서는 참지 못하고 봉기를 한 것이었다.

 


• 경칩일(驚蟄日) : 행록 3장 64절/54쪽.
24절후의 하나. 계칩(啓蟄)이라고도 한다. 우수(雨水)와 춘분(春分) 사이에 있으며 음력 2월의 절기로서 양력으로는 3월 5일 전후가 된다. 땅속의 동물들이 겨울잠에서 깨어나 꿈틀거리기 시작한다는 뜻에서 이러한 이름이 지어졌다. 경칩일에 흙일을 하면 탈이 없다 하여 벽을 바르거나 담을 쌓기도 한다. 특히 벽을 바르면 빈대가 없어진다고 믿었다. 이날 농촌에서는 보리싹의 성장 상태를 보고 1년의 풍흉(豊凶)을 점치기도 하였으며, 개구리의 알이 몸을 보한다고 하여, 논이나 물이 괸 곳을 찾아가 건져 먹기도 하였다. 또 이 무렵 대륙에서 남하하는 한랭전선이 통과하면서 흔히 천둥이 울리기 때문에 땅속에 있던 개구리와 뱀 등이 놀라서 튀어나온다는 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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