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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답사기 : 제주도 학술답사를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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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학술답사를 다녀와서
 
 
 

대순종학과 3학년 임정화

 
 
 
 
  1995년도 대순종학과가 생기고 나서 학술답사지로 제주도가 선택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개인적으로는 고등학교 3학년 겨울 방학 때 제주도 연수를 다녀온 지 17년 만에 두 번째 제주도 방문이다. 제주도 학술답사를 준비하면서 시간적·경제적 부담과 바다 건너 낯선 곳이란 소심한 생각으로 감히 사전답사를 다녀올 생각을 못하였다. 그런 탓에 불안과 초조, 막막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제주도에 연고가 있는 대학원생과 학부생의 도움으로 꽤 묵을 만한 숙소를 잡을 수 있었다.
  예전 연수코스를 참고하여 일정을 짜는 일은 수많은 수정과 회의의 반복이었다. 막막함이 밀려왔지만 “모사재천 성사재인(謀事在天 成事在人)”이라는 상제님 말씀을 새기며 열심히 준비했다. 학생들에게 너무 큰 회비부담을 줄 수 없어서 예산을 최대한 알뜰하게 짜보았다. 하지만 4박 5일의 긴 일정을 소화할 금액과 왕복 항공료는 좀처럼 줄이기 어려웠고 모자란 금액은 늘기만 할 뿐 채워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뜻밖에도 많은 분의 도움으로 해결되었다. 개인적으로 더 많은 회비를 낸 학우가 있었고, 학과 조교 선배가 학교지원금을 최대한 끌어다 주었다. 교수님들의 사비지원도 있었다. 그보다도 학과장 교수님이 종단에 보고서를 올려서 만수 도인들의 소중한 후원을 받아오셨던 것이 결정적이었다.
  수많은 도인들의 정성에 보답하는 길은 대순종학과 학생들이 제주도 학술답사에서 상제님, 도주님, 도전님의 이치를 조금이라도 더 깨우쳐서 대순의 일꾼이 되고자하는 마음이 절로 우러나도록 돕는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더욱 큰 책임감이 다가왔다. 함께 다녀오지 못한 학우들을 위해서라도 우리가 다녔던 한 곳 한 곳을 되짚어가며 무엇을 보고 느꼈는지 어떤 이치가 숨어 있는지 학술답사 수기를 쓰며 되새겨보고자 한다.
 
 
10월 30일 목요일 학술답사 첫째 날 
  답사 가기 전날 밤부터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날씨가 제일 걱정되었는데 일정이 잡힌 날 중 이틀이나 비 소식이 있었다. 학우들의 우비를 챙기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예전 제주도 연수 때는 연수버스를 타면 비가 내리고 연수버스에서 내리면 비가 그쳐서 연수반 수도인들이 신명의 감호를 느끼며 연수를 잘 다닐 수 있었다고 한다. 수도인들은 비가 오든지 오지 않든지 모두 감사한 마음으로 다녔겠지만 ‘학생들은 힘들어 하지 않을까?’라는 걱정에 쉽게 잠들 수 없었다. 상제님의 덕화가 있을 것임을 더욱 굳게 믿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해서 우사 신명을 부른 건 아닌지…. 마음을 더욱 잘 먹었어야 하는데 아쉬움이 남는다.
  여주본부도장 버스가 전날부터 와서 대기하고 있다가 새벽에 우리를 김포공항까지 태워주었다. 미리 인터넷 검색으로 준비했음에도 어디서 내려야 하는지, 발권 절차는 어떻게 하는지, 짐은 어떻게 부치는지, 비행기는 어떻게 타는지를 몰라 우왕좌왕했다. 그래도 비행기를 탄다는 들뜬 마음으로 서로 어울려 사진 찍으며 밝아진 학생들의 얼굴을 보며 나도 금세 즐거워졌다. 특히 셀카봉은 정말 좋았다. 동기들끼리 뭉쳐서 함께 사진을 찍으니 모든 걱정과 불안이 사라지고 그저 여행의 즐거움만 느껴졌다. 또 비행기 안에서 내려다보이는 구름은 얼마나 뽀얗고 폭신해 보이던지 구름 위에 누워 떼구르르 구르고 싶었다.
  제주공항에 내려서 제일 먼저 야자수 나무를 보고 느낀 신기하고 이국적인 분위기는 본 사람만 알 수 있을 것이다. 제주도의 대표성의 하나인 고씨 성을 가진 버스 기사분은 상기된 표정으로 우리를 맞아줬다. 그 분은 우리 대순종학과 학생들과 5일 간 일정을 지내는 것에 도리어 고마워하셨다. 학생들을 보살펴주려고 애써주는 마음이 느껴지는 분이었다. 함께 지내는 동안 내가 제일 덕을 많이 본 듯하다. 답사지 곳곳의 매표소마다 제일 먼저 달려가서 저렴하게 표를 끊어주시고 일정에 따른 소요시간과 도착·출발시간을 미리 안내해주셨다. 제주도의 맛난 귤도 여러 번 사주시고 맛 집을 찾아서 점심 예약도 알아서 해주셔서 너무 감사했다.
  첫째 날 삼성혈에 먼저 가보았다. 답사지마다 대학원생들이 브리핑을 해주었고 학술부에서도 답사지와 관련된 설명과 교화 자료를 담은 학술지를 정성스레 만들어 나누어 주어서 정보를 얻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여전히 제주도 신인 세 명에 대한 신화는 역사적으로 여러 가지 추측을 낳고 많은 의문점이 남는다. 벽랑국이 정말 일본인지, 고씨성은 고주몽과 관련이 있는지, 부씨성은 부여와 관련이 있는지, 양씨성은 중국에 있던 양나라와 관련이 있는지, 진시황 때 서불과 함께 온 사람들인지, 이들이 일본땅에 갔다가 세 공주를 보낸 것인지, 답사를 다녀보니 제주도 곳곳은 신화와 무속이야기가 정말 많았다. 삼성혈도 예전 제주도 연수 코스 중 한 곳이었다. 수도인들은 일단 세 분의 신인이라고 하면 양위 상제님과 도전님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된다. 첫 제주도 학술답사라서 그런지 궁금한 것이 많았다. 마치 과제를 잔뜩 안고 온 느낌이었다. 앞으로 제주도 학술답사를 계속 갈 수 있고 자료를 하나씩 모은다면 풀리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다음으로 간 곳은 용두암이었다. 뜻을 이루지 못한 한 맺힌 용 형상의 바위가 있는 곳이었다. 제주도는 신화도 많지만 한 맺힌 곳 또한 많았다. 그 한을 풀기 위해 제주도 연수가 있었다고도 한다. 그리고 지금 제주도에 수많은 사람이 몰리는 것도 그 한을 풀기 위한 것이라고도 한다. 이를 증명하듯 이동하면서 버스 밖을 보면 제주도 관공서의 표어로 ‘세계로 가는 제주, 세계가 찾는 제주’라는 문구가 곧잘 눈에 띄었다. 해원시대를 맞이하여‘ 제주도에 서려 있는 한은 이렇게 풀려가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스쳤다.
 
 

  제주도에서의 첫 식사는 용두암 근처의 한식 뷔페식당에서 먹었다. 기사분이 추천하신 식당이었는데 메뉴가 다양하고 맛도 있었다. 아침에 샌드위치만 간단히 먹어 배고프던 차에 다들 양껏 맛있게 먹었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지금도 그때의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특히 좋았던 것은 이곳에서 한라산이 아주 선명하게 보였던 점이다. 식당 마당에서 한라산이 봉긋 솟아있는 모습이 가까워 보였고 남한에서 제일 높은 산이라는 사실에 경이로움이 느껴졌다. 그렇게 선명하게 보이는 날이 아주 드물다고 한다. 그날은 흐린 날이었다. 대순종학과 학생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한라산 신령이 힘써 주신 것일까? 지금 돌이켜보니 답사를 다니면서 한라산을 본 것은 그때뿐이었다. 바로 그 곳이 한라산 전체를 볼 수 있는 자리였다. 
  모두 맛있는 점심을 먹고 항몽 유적지로 향했다. 몽골에 대항하여 강화도에서 진도, 제주도로 옮겨와 끝까지 저항했으나 여몽연합군에게 대패하여 사라진 삼별초의 군사기지였다. 우리는 ‘항몽순의비(抗蒙殉義碑)’앞에 정렬하여 묵념한 뒤 삼별초에 관한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고려조정과는 달리 뜻을 굽히지 않은 분들의 호국정신에 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이곳도 제주도 연수 코스 중 하나였는데 이 역시 이분들의 깊은 원을 풀어주기위함이었으리라 추측해본다. 이런 분들이 계셨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에는 복원작업을 하느라 일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삼별초의 역사와 생활상을 보여주는 전시관이 있어서 둘러볼 수 있었다. 
  첫째 날 마지막 답사지로 한림공원을 갔다. 이곳은 테마별로 예쁘게 꾸며진 공원이었는데 볼거리가 너무 많아서 다음에 한 번 더 둘러보고 싶은 곳이었다. 이곳을 개척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개척관이 있었는데 하나하나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졌다는 말에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야자수 길을 따라 각종 야생화와 다양한 표정의 돌하르방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아열대 식물원에서는 각종 희귀한 식물들과 선인장, 열대지방에 서식하는 도마뱀, 거북이, 앵무새 등을 볼 수 있었다. 옛날 제주의 전통민가를 살려낸 민속 마을도 있었고, 각종 분재작품과 자연석으로 멋을 낸 석·분재원도 있었다. 사진에 다 담을 수 없어서 아쉬웠고 시간 관계상 발걸음을 되돌릴 수밖에 없어 아쉬움이 컸다.
  이곳도 예전 제주도 연수 코스 중 하나였는데 여기에는 협재굴과 쌍용굴이 있다. 협재굴에는 ‘살아있는 돌’이라는 것이 있다. 천장에서 석회수가 떨어져 응고되고 그것이 점차 쌓여서 점점 커지는 모습을 보고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쌍용굴에는 천과 지는 알지 못하고 인간에게만 통하게 되어 명의가 되었다는 진좌수의 전설이 담긴 돌상이 있다. 특히 쌍용굴은 용암이 흘러간 흔적이 마치 용이 지난 것 같은 모습이었다. 두 마리 용이 빠져나간 곳이라고 쌍용굴이라고 한다. 안을 거닐다 보면 ‘용꼬리가 나온 부분’이라는 설명이 적힌 표지판을 보니 정말 그럴 듯해 보였다. 천장과 벽면을 보면 정말로 용이 꿈틀대며 지나간 것 같았다. 예전 제주도 연수 코스였던 ‘만장굴’도 보려고 했지만 일정상 볼 시간이 없어서 다음을 기약했다.                
  첫날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숙소로 향했다. 우리 숙소는 한경면에 있는 제주도 서쪽 끝 차귀도가 바라보이는 아름다운 바닷가에 자리하고 있었다. ‘한경면’이라는 지명을 보니 도전님이 떠올랐고 우리 대순종학과 학술답사가 상제님과 도전님의 덕화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차귀도 일몰은 제주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많은 여행자가 마지막 코스로 손꼽는 곳이라고 한다. 김대건 신부의 성지가 이웃한 곳으로 조용하고 경건한 동네였다.
  포근한 인상을 받은 이곳 숙소 아주머니는 어머니 같은 마음으로 우리의 식사를 준비해 주셨다. 숙소에서 저녁 식사를 마주한 순간 모두 경탄해 마지않았다. 맛있는 제주도 흑돼지 고기와 각종 생선구이, 손수 만든 블루베리 드레싱을 얹은 샐러드, 천연 조미료로 만든 된장국과 반찬들, 좋은 재료로 부친 전, 갓 지어낸 따뜻한 밥에 모두 집밥처럼 맛있다고 신났다. 인스턴트가 많을 수밖에 없는 기숙사 밥만 먹다가 제주도에 와서 정성이 가득 담긴 저녁밥을 먹으니 답사를 준비하면서 쌓였던 걱정과 피로가 모두 눈 녹듯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저 감사한 마음만 들었다. 숙소를 소개해 주신 분의 세심함과 신경 쓴 흔적이 느껴졌고 기사분은 숙소에서도 학생들이 불편함이 없도록 챙겨주셨다. 모두 상제님의 덕화라고 여겨졌다. 방에 들어가 보니 액체모기향이 있었다. 제주도가 따뜻한 곳이란 생각이 새삼 떠올랐다. 이곳엔 모기가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숙소의 큰 창문 밖으로는 바다가 넓게 펼쳐 보이고 차귀도가 보였다. 이런 멋진 풍경이 펼쳐진 곳에서 나흘 동안 지낸다고 생각하니 답사를 정말 잘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귀도는 설문대 할망의 500번째 막내아들이 있는 곳이라는 전설이 서려 있다. 영실에 499개 기암이 있고 남은 하나가 차귀도라고 한다. 중국 호종단이 제주도의 기맥을 끊으러 왔다가 제주도의 신령스러움에 반해 돌아가지 못하고 남은 곳이란 얘기도 있다. 제주도는 아름다운 만큼 곳곳에 이처럼 신비로운 이야기들이 끝없이 펼쳐지는 곳이었다. 학생들은 짐을 풀고 조별로 모여 학술제 준비를 하였고 편집부는 그날 찍은 사진과 동영상을 정리하였다. 답사지마다 홍보부는 ‘대순종학과 제주도 학술답사’라는 플랜카드를 열심히 들고 다니며 단체 사진을 찍을 때마다 펼쳐 들었다. 이렇듯 첫날 일정은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순조롭게 이루어졌고 내일에 대한 기대감을 안고 편안히 잠이 들 수 있었다.
 
 
10월 31일 금요일 학술답사 둘째 날 
  숙소 아주머니께서 아침을 정성스레 준비해주셨다. 끼니때마다 제주도 돼지고기와 다양한 종류의 생선튀김과 신선한 샐러드를 주셨고 어떤 날은 전복죽에 성게 미역국까지 준비해주셨다. 손이 많이 가는 월남쌈도 해주시고, 때때로 따뜻한 원두커피를 준비해주셔서 든든하게 끼니를 챙겨 먹고 답사를 다닐 수 있었다.
  둘째 날은 제주도의 남쪽 해안을 따라 답사를 다녔다. 버스 차창 밖으로 노란 귤나무가 많이 보였다. 남쪽에는 귤나무가 많이 재배된다고 한다. 그리고 선인장 밭도 많았다. 자주색 열매가 열리는데 이것이 백련초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기념품 가게에는 제주도에서만 생산되는 백련초, 귤, 한라봉으로 만든 크런치나 초콜릿을 많이 팔았다. 요즘 육지에서는 제주도 녹차라떼라든가 제주 한라봉 요구르트 같은 것을 파는데 제주라는 브랜드가 꽤 인기를 끄는 것 같다.
  이날 첫 답사지는 정방폭포였다. 육지에서 바다로 바로 떨어지는 정방폭포는 높이가 상당히 높았고 비가 내려서인지 시원하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1일 치성 3일 도통의 의미가 있다는 얘기도 듣고 방정하게 잘 수도해야 한다는 대학원생의 설명도 들었다. 그리고 예전 연수를 다녀온 경험이 있는 대학원생 덕분에 남녀 보살의 얼굴형상을 찾아 볼 수 있었고 남녀 보살이 하나로 겹쳐져 보이는 음양합덕의 이치도 보았다. 그냥 와서 보면 모르고 지나쳤을 텐데 여러 수도인 학생들과 함께 답사를 오니 더 유익한 답사를 다니는 것 같아서 감사했다. 이곳에 ‘서불과차’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서 서귀포라는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하여 그 글자를 찾아보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찾지 못하였다. 홍보부에서 열심히 답사현수막을 들고 다닌 덕에 정방폭포 아래에서 멋지게 단체 사진을 찍었다. 정말 올바르게 수도를 잘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뒤늦게 오르다가, 옆에 해녀 아주머니께서 바다에서 갓 잡은 싱싱한 해산물을 파는 것을 보고 교수님께서 한 접시 사주셔서 같이 나눠 먹었다. 제주도 바다가 내 속으로 통째로 들어오는 것 같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맛이었다.

 
 
  두 번째 답사지는 천제연 폭포였다. 이곳은 1단, 2단, 3단으로 된 폭포로 양위 상제님과 도전님의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1단 폭포에 가봤더니, 옥황상제의 시녀 칠선녀가 목욕하고 갔다는 물빛은 얼마나 예쁜 옥빛이던지 표현하기 어려웠다. 그렇게 예쁜 색은 처음이었다. 자연이 만들어낸 영롱한 빛깔에 그저 감탄하며 바라볼 뿐이었다. 폭포의 물줄기가 처음에는 가늘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굵어지는 것을 보았다. 폭포의 물줄기는 계속 더 굵어지고 또 한 줄기가 생겨났는데 이것을 보지 못하고 일찍 자리를 뜬 학우들이 있어서 안타까웠다. 폭포를 보러 온 날에 비가 내린 것은 우리 대순종학과 학생들에게 더 잘 보여주기 위한 하늘의 뜻이 아니었나 싶다. 2단 폭포도 가보았다. 1단보다 폭포의 위용을 훨씬 더 갖추고 있었다. 너무 아름다워서 자리를 뜨기가 어려웠다. 남은 답사코스가 많아서 3단 폭포까지는 가지 못했지만 한 학우가 그곳에 다녀온 사진을 찍어 공유해줘서 일단은 그걸로 만족했다. 가는 곳곳마다 시간의 부족함에 아쉬움을 남기고 돌아서야 했다.
  세 번째 답사지인 주상절리대로 향했다. 이곳은 자연이 만들어낸 검은 육각 기둥이 넓게 펼쳐져 있는 해안가였다. 용암이 흘러나와 급격히 식으면서 형성되었다고 한다. 주상절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나무로 만든 단이 있는 걸 보니 관광지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셀카봉의 위력을 다시금 느끼며 주상절리대를 배경으로 동기들끼리 모여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찍을 때마다 손으로 브이 자를 만들고 김치를 외치며 웃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그 사진들을 보니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흩날리는 사진을 보니 정말 제주도의 바람은 실컷 맞고 온 것 같다.
 
 

  이동할 때마다 차창 밖으로 검고 구멍 난 돌들도 얼마나 많이 보았던가! 바람, 돌, 여자가 많은 제주도. 그리고 거지, 도둑, 대문이 없는 제주도. 담과 담 사이에 긴 막대를 옆으로 걸쳐 놓았는데, 1개가 걸쳐져 있으면 근처 이웃에 있다는 뜻이고 3개가 걸쳐져 있으면 먼 곳으로 출타 중이란 뜻이다. 제주도풍습이 참 낯설었고 관광지 곳곳마다 보이는 표지판에 쓰인 제주도 방언은 해석이 없으면 의미를 알 수 없는 외국어 같았다. 무속이나 미륵을 믿는 토속신앙이 강하여 교회의 십자가를 많이 볼 수 없는 곳이 또한 제주도라고 한다. 여기에는 ‘신구간’이라는 날도 있어서 그날에만 이사를 한다고 하니 신들의 세계가 인간 땅에 그대로 내려온 곳이 제주도가 아닌가 싶을 정도다. 또한 우리 대순진리회의 연원의 이치를 자연 그대로의 모습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으니, 그저 신기하고 묘할 따름이다.
  점심은 제주갈치조림과 전복, 새우 등의 각종 해산물이 들어간 해물뚝배기로 각자 선택해서 먹었다. 내 고향 강원도 동해에서는 밤마다 뱃불이 환하게 켜져 있으면 오징어를 잡는다고 여겼다. 여기 제주도에서는 갈치잡이 배라고 한다. 제주도 은갈치가 펄떡거리는 모습이 상상되었다. 정방폭포에서 제주 바다의 청정한 해산물 맛을 보고 왔음에도 갈치조림의 맛에 또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소한 갈치속 젓갈과 바삭하고 달콤한 이름 모를 생선튀김도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모른다. 풍족하게 먹을 수 있도록 베풀어주셔서 감사한 마음으로 포식했다.
  그리고 이날 마지막 답사지로 송악산을 갔다. 송악산은 예전 제주도 연수 코스에는 없던 곳이지만 당시 연수 교화를 담당하셨던 강사분의 추천으로 가게 되었다. 송악산은 올레길이 잘 만들어져 있었다. 우리는 송악산 정상의 비석을 보러 조금 가파른 길을 올랐다. 흙은 검고 빨갰다. 오르는 길에 최남단의 섬인 마라도와 가파도가 멀리 보였다. 주변 해안을 따라 잘 만들어진 올레길, 언덕 위에 풀 뜯고 있는 말들, 가까이 보이는 형제섬, 서로 토닥이며 산을 오르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절로 평화로워졌다.
  첫날부터 나도 모르게 제주도에 반해 이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맑은 공기와 아름다운 풍경에 심신은 아주 편안해졌다. 정상에 올라 교수님과 함께 비문을 바라보며 같이 해석해 보았다. 비문해석을 학술지에 실었는데 해석을 해주신 교수님은 학교 행사일정과 겹쳐 함께 답사를 오지 못해 다시금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비문의 내용은 주변의 경관을 묘사한 것이었다. 주변 풍광을 둘러보며 비문의 글귀 하나하나와 맞춰보았다. 바위, 절벽, 시루 해안, 파도, 그물, 이중화산, 솥, 장군석, 뱀의 혈 등등…. 상제님과 도주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고 도전님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송악산의 이중화산 지형은 이분들과 연관된 모습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시루 모양의 해안을 찾아보고 송악산 정상에 깊게 패여 있는 곳이 솥 모양인지도 살펴보고 뱀의 혈은 어느 부분인지도 찾아보았다. 비문을 쓰신 분은 어찌 이렇게 표현했는지 신기한 마음이 들었다. 송악산을 내려오는 중턱에서 정상을 되돌아보니 오를 때는 미처 몰라본 바위 하나가 눈에 띄었다. 어떤 학우는 용머리 같다고 했는데 그곳을 촬영한 교수님은 정상을 향해 오르는 소 같다고 하셨다. 연원의 이치를 좇아 따르는 우리 수도인들의 모습이리라. 송악산이 더더욱 우리 대순진리의 이치가 담겨있는 곳이란 확신이 들었다.
  제주도 연수 경험이 있는 학생들은 연수코스로 갔었던 답사지를 가보면 예전의 모습과 많이 달라졌다고들 했다. 자연이 바뀔 리가 없겠지만 연수가 끊긴 15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나무와 풀이 자라고, 바람과 파도에 의해 깎여나가고, 건물이 들어서고, 길이 닦이고, 관광지로서의 모습을 갖추어가면서 예전에 보았던 것들이 없어질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런 중에 연수 코스에 없던 송악산 정상에 있는 비문에서 우리 도의 연원의 이치를 찾았으니 이것이 이번 학술답사의 가장 뜻깊은 수확인 것 같아서 이 장소를 추천해 주신 분께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송악산 정상에서 바닷가 올레길을 따라 내려오면서 형제섬을 보았는데, 꼭 말귀와 닮아 보였고 마침 등성이에 풀을 뜯고 있는 말 사진도 찍었다.
  숙소에 들어오면서 저녁 메뉴는 무엇일지 궁금하였다. 육개장과 닭볶음탕이었다. 답사를 오기 전에는 긴 일정 동안 힘들어서 살이 빠질 거라고 예상했었는데, 오히려 맛있는 음식으로 든든히 먹고 편히 쉬며, 답사지마다 열심히 즐겁게 다니면서 심신이 편안해졌다. 내가 어디서 왔고 답사가 끝나면 어디로 갈지가 떠오르지 않았고 이곳에서 영원히 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저녁을 먹고 학부생들은 조별로 학술제 준비 모임을 했고 대학원생들은 숙소 주변 풍광을 돌아보았다. 2층 숙소에는 잠자는 학우들을 위해 따로 노는 방 하나를 정해뒀는데 그곳에서는 밤늦도록 이야기 보따리를 풀었다. 나도 창밖으로 보이는 차귀도와 방파제를 치는 파도와 너른 바다를 바라보며 기분 좋게 하루를 마무리하였다

 
11월 1일 토요일 학술답사 셋째 날 
  학술답사를 올 때 짰던 일정들은 그날그날 새롭게 바뀌었다. 집중해서 볼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을 가려냈기 때문이다. 사전답사를 와서 일정을 더 꼼꼼히 효율적으로 짰어야 하는데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학생들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딜 가든지 불평 없이 학생들이 단합하여 서로 챙겨서 다니는 모습에 그저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수도인 학생들이라 그런지 어떤 상황에서든 수도로 받아들이고 서로 도와주는 모습에서 대순종학과는 타과와는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학과라고 생각했다.
  셋째 날 첫 답사지는 제주민속촌이었다. 제주도의 남부, 서부, 북부, 동부의 지역별로 전통가옥형태를 복원해 놓은 곳이었다. 말을 태워주는 곳도 있었는데 학생이라고 할인을 해주었다. 머뭇거리다가 타이밍을 놓쳐서 타지는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도 내가 겁 없이 용감하게 탈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민속촌 한 곳에는 제주사람들의 신앙을 모아놓은 곳도 있었다. 미륵신앙터, 무속신앙터, 돌아오지 않는 가족을 기다리다 돌이 되거나 죽은 이의 넋을 기린 곳도 있었다. 또 토속적인 놀이기구도 눈에  많이 띄었다. 고누놀이, 그네, 활을 던져 원통에 넣기나 나무로 된 지지대에 두 발을 올려 걷는 것도 있었고 굴렁쇠 굴리기 등이 있어 체험해 볼 수 있었다.    
  민속촌에서 점심을 먹고 두 번째 답사지인 산굼부리로 갔다. 산굼부리로 오르는 길에는 억새가 우거져 있었다. 산굼부리는 제주도의 많은 오름 중에서 산의 생김새에 비해 유난히 큰 화구를 가진 특이한 형태라고 한다. 올라보면 움푹 팬 구멍이 아주 컸다. 그곳의 문화해설사분이 구멍 안에 나무가 작아 보이지만 가까이 가면 모두 큰 나무라고 설명했다. 얼마나 깊은 구멍인지 짐작할 만했다. 해설을 들으며 그 안을 내려다보니 방위에 따라 남쪽과 북쪽의 식물이 달랐고 마침 단풍철이어서 단풍이 든 색으로 구별되어 보였다. 희귀식물들을 보호하기 위해 접근을 제한시키고 있었다. 또 신령이 타고 다녔다던 큰 사슴 동상이 세워져 있었고 까마귀들이 많이 날아다녔다.
  그리고 옥황상제님의 셋째 딸과 한감의 사랑 이야기도 들었다. 둘은 첫 눈에 반해 옥황상제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했지만, 식성이 달라서 이혼했다는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먹는 문제는 정말 중요한 것 같다. ‘명량’이라는 영화에서 이순신 장군이 제일 두려워 한 것이 식량 문제였다. 왜군은 어쩌다 한 번씩 오니 싸워 물리치면 되지만 끼니는 때 되면 어김없이 찾아오니 장군의 고충이 얼마나 컸을 것인가. 학술답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제일 어려웠던 점 또한 먹는 문제였다. 왕복항공료를 제외하면 예산에서 식비가 제일 큰 비용을 차지하였다. 처음에는 아침과 저녁은 직접 요리를 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그 일로 지체되는 시간이 많아 어떻게 해야 하나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는지 모른다. 다행히 많은 분의 후원으로 아침과 저녁에 숙소 아주머니의 정성이 가득 담긴 식사를 할 수 있어서 마음의 짐을 던 것은 물론이고, 답사를 한 곳이라도 더 다니는 쪽으로 유용하게 시간을 쓸 수 있어서 정말 기뻤다.
  한감과 옥황상제의 셋째 딸 식성문제는 우리에게도 나타났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점심 메뉴를 정할 때는 한 가지를 정하지 않고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품목 몇 가지를 항상 지정해주었다. 숙소에서도 아침저녁으로 각자 먹고 싶은 것을 떠갈 수 있도록 반찬들이 나왔다. 학생들이 좋아했던 식사는 첫날 한식뷔페를 갔었던 때였다. 각자의 식성에 대해 제일 실감 나게 체험했던 때는 돌아오는 날 김포공항에서의 아침이었다. 메뉴가 상당히 많이 진열된 식당으로 갔는데 42명이 각자 먹고 싶은 대로 골랐더니 무려 15가지 정도의 메뉴가 나와서 정말 깜짝 놀랐던 것이다. 이렇게 서로 다른 우리가 어떻게 4박 5일간 제주도 학술답사를 다녀왔는지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그래도 모두가 한마음으로 단합했기에 이 큰 행사가 무사히 치러진 것이라 여겨졌다. 다들 마음을 모아준 것에 대해 새삼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셋째 날 세 번째 답사지는 성산 일출봉이었다. 제주도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뜨는 곳이라고 한다. 성산 일출봉 꼭대기에 99마리의 짐승이 돌상으로 서 있는데 그 모습이 꼭 성 같다고 하여 성산 일출봉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리고 제주도 연수 때의 경험이 있는 한 대학원생의 기억 덕분에 이곳에 사두용미의 이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그 흔적을 같이 찾아보았다. 성산 일출봉을 향해 가는 길에 버스 기사분께서 용미 부분이 잘 보이는 바닷가에 세워주셔서 우리는 버스에서 내려 용미 부분을 찾아보았다. 예전에는 지금보다 훨씬 선명하게 용 비늘의 모습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성산 일출봉 전체를 감싸고 있는 거대한 사두용미의 모습이 보이는데 이전에는 더 선명했다고 하니 그때의 모습을 볼 수 없음에 더욱 안타까웠다. 성산 일출봉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사두를 찾으러 갔다. 절벽에는 흙이 깎여 떨어져 나간 부분도 있었고 풀도 많이 자라있어서 예전의 사두를 찾기가 어려웠다. 여기가 사두다, 저기가 사두다 하는 각자의 생각들이 터져 나왔다. 제주도 연수가 끊기면서 연수 때 찾아보았던 이치들도 감추어진 것일까? 학교에 돌아와서 학생들이 각자 찍은 사진들을 공유하면서 사두라고 하는 부분을 보았다. 바로 그 부분이라고 하는데 답사지에서 바로 찾아보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다음에 기회가 되어 가게 되면 꼭 찾아보리라 마음먹었다.
 

 

11월 2일 일요일 학술답사 넷째 날
  전복죽과 성게 미역국으로 든든히 아침을 먹고 간식을 챙겨서 버스에 올랐다. 비가 갑자기 많이 내려서 우비도 더 챙겨야 했다. 영실코스를 올라야 하는 날이라서 특히 비 내리는 날씨가 신경이 많이 쓰였다. 위에 올라가면 꽤 추울 것이라고 하여 따뜻한 옷을 입도록 미리 공지했는데도 얇게 입고 올라온 학생들이 있었다. 영실 매표소에 도착하여 학생들에게 김밥과 물을 나눠주었다. 각자 배낭에 음식을 넣고 산을 올랐다. 영실 휴게소까지 선두에 교수님 한 분, 줄 맨 끝에 교수님 한 분이 가시고 그 중간에서 학생들은 혼자 혹은 둘씩 짝지어 비바람을 맞으면서 올라갔다. 교수님 한 분이 ‘열풍뇌우불미(熱風雷雨不迷)’라고 하셨는데 윗세오름까지 올라갈수록 비바람은 더 거세져만 갔다. 다들 헉헉거리며 영실 휴게소까지 가까스로 도착했다. ‘열풍뇌우불미’를 정말로 체험한 듯이 말이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영실 휴게소 식당에 들어가 어묵탕을 시켜먹으며 윗세오름에서 먹을 김밥도 여기서 다 꺼내 먹고 비에 젖은 머리카락을 털며 서로를 다독였다. 여기까지는 그냥 포장된 길을 걸어온 것에 불과했다. 이제 윗세오름까지 올라가야 하는데 더 많은 시련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아무도 생각 못했다. 난 체력에 자신이 없어서 그동안 꾸준히 운동하며 준비를 해 온 덕분에 그나마 잘 오를 수 있었다. 대학원생 두 명은 못 오르고 그 외에 나머지 학생들은 모두 윗세오름으로 향하였다. 힘들어 하며 잘 못 오르는 학생들을 데리고 제일 뒤에서 윗세오름을 향해 올라갔다. 오전 11시 10분에 영실 휴게소 1,280m 지점에서 출발하였다. 길은 디디기 힘든 자갈길도 있었고 굵은 나무로 잘 다져놓은 길도 있었다. 하지만 비바람과 안개로 끝이 어딘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묵묵히 오를 수밖에….
 
 

  나중에 편집부장이 촬영한 영상을 보니 비바람 속에서 모두 말없이 조용히 오르고 있었다. 이번에도 성산 일출봉에서처럼 학과장 교수님은 제일 체력이 약한 여학생의 손을 붙잡고 윗세오름을 향해 올랐다. 안개로 주변이 모두 가려져 있어서 주위의 경관은 하나도 볼 수 없었다. 제일 뒤에서 서너 명이 함께 오르다 보니 중간에서 우릴 기다린 대학원생이 있어서 같이 올랐고 또 오르다 보니 1학년 여학생 몇 명을 만나고 교수님을 만나서 ‘영실원정대’라는 이름으로 다 같이 오르며 사진을 찍었다. 여럿이 모여서 가니 재미가 있었고 힘이 났다. 윗세오름에서 먹을 따뜻한 컵라면을 기대하며 다소 밝아진 표정으로 우리는 합심하여 올랐다. 1,700m 윗세오름 대피소에 도착했을 때 먼저 온 학생들은 벌써 컵라면을 먹고 있었다. 오후 1시 이후에 도착한 사람들부터는 더 이상의 등반이 제한되었다. 나는 그보다 훨씬 늦게 도착했으니 더 이상의 등반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막상 그 위에 오르니 힘든 만큼 보람이 있었다. 조금만 더 오르면 한라산 정상이라고 해서 끝까지 가보자는 욕심이 생겼다. 하지만 한라산 정상을 오르려면 아침에 더 일찍 출발했어야 했다.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윗세오름 대피소에서 우리는 나중에 올라온 학우들을 반겨 맞으며 고생했다고 서로 다독였다. 이 때 찍은 우리의 사진 모습을 나중에 편집부에서 ‘대종 난민촌’이라며 공유했는데 모두 한결같이 발갛게 상기된 얼굴 앞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컵라면을 붙들고 라면을 한 젓가락씩 집고서 그 어느 때보다 환하고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이었다. 4박 5일의 답사 기간 중 영실을 올랐던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때의 컵라면은 그 어떤 음식보다 값지고 꿀맛이었다. 1,700m 윗세오름 비석 앞에서 펄럭이는 ‘대순종학과 제주도 학술답사’ 현수막을 들고 단체 사진을 찍은 뒤 바로 하산을 시작했다. 윗세오름 대피소 안에는 풍속과 온도 그리고 습도 등의 기상정보를 알려주는 전광판이 있었다. 대피소에 도착했을 때 풍속이 초속 4m였는데 금세 8m로 세어졌다. 하산할 때는 제주도의 바람을 여기서 실컷 맞고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는 그쳤지만 길이 미끄러워서 하산길은 더 위험했다.
  영실 매표소에 도착하니 어느새 날은 개어 있었다. 숙소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학술답사 일정을 정리할 겸 그동안 다녔던 답사지에 대한 문제와 난센스 퀴즈를 내고 준비한 학용품을 상품으로 나누어줬다. 여주본부도장에는 영대(靈臺)가 있고 제주도에는 영실(靈室)이 있다. 제주도는 우리 도의 이치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곳이란 생각이 들었다. 4박 5일이 짧게만 느껴졌다. 이번이 첫 답사라서 한라산신령이 안개로 가린 것 같지만 한번 가고 두 번 가고 갈 때마다 점점 밝게 보이게 될 것이라는 교수님의 말씀을 들으니 다음 제주도 학술답사도 같이 올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겼다. 영실을 다녀와서 학생들이 원하는 제주도 바닷가도 한번 들려볼 계획이었으나 너무 피곤해서 바로 숙소로 돌아가 쉬기로 했다. 저녁 먹기 전까지 쉬는 시간 동안 숙소 근처에 있는 김대건 신부의 성지를 방문했다. 원하는 학우들만 교수님 두 분과 함께 방문하였는데 마침 차귀도 너머로 일몰 풍경이 매우 아름다워서 넋을 놓고 보다가 김대건 신부의 성지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에 계신 분께서 우리나라 천주교의 역사를 설명해주셨는데 여기에 또 다른 한이 서려 있었다. 천주교는 조선 시대 후기에 들어와서 정치적인 싸움에 연루되어 여러 번의 박해를 받았다고 한다. 특히 대원군 때에는 만 명 이상의 천주교 신자들이 무자비하게 죽임을 당하였다고 했다. 죄인을 고문하는 각종 방법이 나열된 설명이 있었고 고문하는 도구들이 한쪽에 전시되어 있었었다. 『전경』에 나오는 ‘차꼬’라는 것도 보았다. 천주교는 이렇게 많은 희생을 거쳐 정착하게 되었는데 그 덕에 기독교는 순탄하게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4·3사건에 관한 얘기도 들었다. 그때 무고한 양민 수만 명이 학살되었고 사라진 마을들도 많다고 한다. 제주도에는 그런 억울한 원과 한이 서린 곳이 많았다. 제주도 연수를 통해 해원이 되고 지금 각종 제주산 물건들이 주목을 받고 있다. 여러 관광지와 자연유산이 유네스코에 오르고 세계 7대 관광명소가 되었으니 제주도는 이제 세계로 나갈 일만 남은 것 같다.
  날은 어느새 저물어 오솔길을 따라 숙소로 돌아왔다. 그리고 마지막 저녁 식사 시간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 나는 교수님 두 분과 함께 4박 5일간 너무나 크게 애써 주신 기사분께 고마움을 표했다. 학술답사가 잘 이루어진 것은 이런 좋은 분들 덕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숙소 아주머니께도 고마움을 표했고 아주머니는 마지막 하룻밤을 우리가 편안히 따뜻하게 잘 수 있도록 신경 써 주셨다. 우리는 다음날 새벽 일찍 떠나야 해서 밤에 대청소를 깨끗이 하고 잠이 들었다. 나는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벌써 간다니까 너무 아쉬웠고 이제 학교로 돌아가야 한다는 현실이 도무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내가 얼마나 제주도에 반했는지 학교로 돌아온 후 5일이 지나도 제주도에 대한 그리움에 젖어 좀처럼 빠져 나올 수 없었다.
 
 
11월 3일 월요일 학술답사 다섯째 날
  새벽 4시에 일어나서 학생들을 깨우고 짐을 꾸려서 숙소 아주머니께 작별인사를 드리고 나오는데 갑자기 한 학생이 지네에 발을 물려 고통스러워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얘기를 듣자마자 숙소 아주머니께서는 얼른 상비약을 들고 나오셔서 항생제를 먹이고 물린 부위에 약을 발라주셨다. 빨리 병원에 가야 할 텐데 그 새벽에 어디로 갈 것인가! 공항에 의무실이 있으니 얼른 출발해 가라고 아주머니께서 얘기해주셔서 출발을 서둘렀다. 스마트폰으로 검색을 해보니 지네에 물리면 상당히 아프다 하고 신속하게 병원으로 가야 한다고 나와 있었다. 지네가 신발 속에 들어가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일정이 다 끝났다고 마음을 놓은 탓이었을까 마지막에 이런 일이 생겨서 당황했다. 잘 걷지 못하는 학생을 보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공항에 도착해보니 의무실은 열려 있지 않았다. 다행히 그 학생은 괜찮다고 했다. 아주머니가 주신 약 덕분이었을까 학교로 돌아온 후 아주머니는 지네에게 물린 학생이 걱정되어 보람이에게 안부 전화를 걸어오셨다. 이렇듯 끝까지 신경 써 주셔서 감사했다.
  제주공항에 도착해서 순조롭게 발권을 하고 짐을 싣고 김포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아침부터 긴장과 초조했던 마음이 비행기를 타고 앉아있으니 어디론가 사라지고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깨보니 김포공항이었다. 제주도에 다녀온 것이 정말 꿈같은 일로 느껴졌다. 김포공항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지네에 물렸던 학생까지 챙겨서 공항에 대기하고 있던 도장 버스를 타고 학교로 향했다. 모두 무사히 다녀온 것을 기념하며 대진교육관 앞에서 ‘대순종학과 제주도 학술답사’현수막을 펼쳐 들고 마지막 단체 사진을 찍고 해산했다. 짐을 풀고 지출경비를 계산하여 예산정리를 했고 편집부는 제주도 학술답사를 다니면서 찍은 사진들과 영상들을 정리하여 학생들에게 보내주거나 공유하였고 도의 이치가 담긴 소중한 사진을 찍은 학생들 또한 여럿에게 공유를 해주었다.
  홍보부는 정성스레 만들었던 학술답사 포스터를 떼었고 학술부는 학술제 준비에 본격 돌입했다. 이제 답사 사진 책자를 제작하고 4년 치 답사계획 책자를 제작하는 일을 남겨두었다. 나는 답사를 다니면서 기념품을 미처 사지 못해 제주공항 기념품 가게에서 크런치와 초콜릿을 사왔다. 도와주신 분들이 너무 많아서 줄 사람이 많은데 사온 것이 부족하여 더 많은 분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감사함과 아쉬움은 많이 남지만 그래도 행복한 제주도 학술답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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