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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45년(2015)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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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수(宿) 신명 : 우(牛) 별을 관장하는 구순(寇恂) 신명 (Ⅰ)

우(牛) 별을 관장하는 구순(寇恂) 신명 (Ⅰ)
 
 
 
글 대순종교문화연구소
 
 
 
우수(牛宿)
  우수(牛宿)는 28수 가운데 아홉 번째 별자리이다. 그리고 두우여허위실벽(斗牛女虛危室壁) 북방(北方) 현무(玄武) 칠수(七宿) 가운데서 두 번째 별자리이다. 이 별자리의 주된 별(主星)은 6개로 동물은 소[牛]이다.01 우수의 속성(屬性)은 금(金)으로 이 별자리의 조합이 소뿔[牛角]과 같은 모습이어서 우수라 한 것이다. 우수는 천제(天帝)의 군진(軍陣)으로 인식된다. 우수를 의인화하여 북방우금우성군(北方牛金牛星君)이라 하는데 손에 대도(大刀)를 쥔 모습으로 표현된다. 우금성군의 신변을 호위하는 동물은 청우(靑牛)이다. 
 
 
후한의 창업공신 구순
  구순(寇恂, ?-36)은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 BCE 2-CE 58)를 도와 후한(後漢)을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운 창업공신이다. 구순의 자(字)는 자익(子翼)이고 상곡군(上谷郡) 창평현(昌平縣, 현재 北京) 사람이다. 이 지역에서 구씨(寇氏)는 대대로 이름 있는 가문이었다. 구순은 애초에 군(郡)의 공조(功曹)02를 지냈는데 태수 경황(耿況)이 그를 매우 중히 여겼다.
  23년 전한(前漢)을 타도하고 신(新)나라를 창업한 왕망이 패망하였다. 그러나 왕망 말엽의 혼란은 곧 수습될 것처럼 보였다. 낙양에 도읍한 경시제(更始帝)는 각 군(郡)과 제후국에 사자를 파견하면서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먼저 항복하는 자는 작위(爵位)를 회복시켜 주시오.”
  이때 파견된 사자는 경시제를 대리하여 관리를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져 있었다. 상곡태수 경황은 왕망에 의해 임명된 까닭에 자신의 지위가 어떻게 될지 노심초사했다. 경황은 군의 경계에서 경시제의 사자를 맞아들이면서 태수의 인수(印綬)를 바쳤다. 인수를 바친다는 것은 항복을 뜻하는 것이었다. 먼저 항복하는 자의 작위는 회복시켜 준다는 약속을 따른 일이어서 경황의 작위는 회복되어야 했다. 그런데 경황으로부터 인수를 받은 사자는 하룻밤이 지났는데도 돌려줄 뜻이 없었다. 당시의 상황을 보면 경시제 휘하의 여러 장수와 사자들은 각 구역을 관할하면서 마음대로 권력을 휘둘렀다. 이들에게 군수나 현령을 갈아치우는 것은 문제도 아닌 상황이었다.
  구순이 병사를 정돈하고 들어가 사자를 만나 인수를 돌려달라고 청하였다. 사자는 인수를 주지 않으면서 말했다.
  “천왕(天王, 天子)의 사자를 공조인 그대가 위협하려고 하는가?”
  구순이 말했다.
  “감히 사군(使君)을 위협하려 함이 아닙니다. 계책이 상서롭지 못한 것 같아 남몰래 근심하는 것입니다. 이제 천하가 비로소 평정되었으나 나라의 신의가 아직 펼쳐지지 못했습니다. 사군께서 관리를 임명하는 명을 받드시어 사방을 순행하심에 여러 군현들이 목을 늘어뜨리고 귀를 기울여 명(命)에 귀의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이제 상곡군에 이르시어 큰 신의를 실추시키고 충성하려는 마음을 막으며 모반할 틈을 생기게 한다면 장차 어떻게 다른 군현에게 다시 호령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경부군(耿府君, 경황)은 관리와 백성들이 친애하는 사람이니 지금 그를 바꾸어 버린다면 현명한 사람을 쓴다 해도 등급이 마땅치 않고 현명치 못한 사람을 쓴다면 더욱 어지러워 질 것입니다. 사군을 위해 계책을 세우자면, 다시 그를 회복시켜서 백성을 편안케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사자는 구순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이미 말이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구순은 사자의 명령이니 경황을 불러 오라면서 주변을 질책하듯이 소리를 질렀다. 경황이 도착하자 구순은 사자에게서 인수를 빼앗아 경황의 허리띠에 매어주었다. 사자는 어쩔 수 없이 경황에게 조서(詔書)를 내리니 경황이 받아서 물러났다. 병사를 동원하고, 소리를 질러 분위기를 조성한 후 태수의 인수를 회수하면서 사자에게서 조서까지 받아낸 것은 구순의 기지였다. 당시의 정황으로 볼 때 구순의 이러한 기지가 아니었다면 경황은 가만히 앉아서 태수직을 빼앗겼을 것이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당시의 많은 이들은 왕망 패망 이후 혼란은 경시제가 즉위하면서 곧 수습될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경시제는 혼란한 시국을 평정할 만한 지도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 주변의 사람들도 자신들의 권력 유지와 이익에만 몰두할 뿐이어서, 혼란은 점점 더 가중되어 갔다. 군주제 아래에서 혼란의 가장 큰 책임은 군주 그 자신에게 있다. 경시제 한 사람의 무능과 무위는 국정 전반에 급속하게 확산되었다. 이 과정에서 제대로 된 정치가 펼쳐질 리 없었다.
  같은 시기 유수는 경시제의 명령으로 하북 평정의 임무를 띠고 있었다. 그런데 한단에서 스스로를 성제(成帝)의 아들이라 사칭한 왕랑(王郞)이 세력을 급속하게 확대하고 있었다. 왕랑의 지지자들에게 그는 이미 한나라의 적통을 이은 천자였다. 게다가 왕랑이 유수의 목에 거액의 현상금을 걸면서 다급해진 쪽은 유수였다. 유수에게는 실질적인 병력 지원이 필요했다. 경황의 아들 경감 또한 이때 유수의 휘하에 있었다. 유수는 경황에게 급히 병사를 징발하도록 요청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구순과 문하연(門下掾) 민업(閔業)03이 함께 경황에게 진언했다.
  “한단은 갑자기 일어나서 믿고 따르기가 어렵습니다. 지금 듣건대 대사마 유공(유수)은 백승(伯升)04의 동생으로 아래의 사(士)들을 높여 우대하여, 사(士)들이 그에게 많이 귀의하니 우리도 그에게 귀부(歸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경황으로서는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다. 자구책으로 장안으로 보낸 맏아들 경감이 유수의 휘하에 들어간 후에 한단을 공격해야 한다고 하였지만 왕랑의 세력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단이 바야흐로 강성하고 우린 홀로 저항할 만한 힘이 없으니 어떻게 하오?”
  구순이 대답했다.
  “지금 상곡은 완전하고 충실합니다. 활 쏘는 1만 기병이 있으니 온 군(郡)의 물자를 가지고 상세히 살펴 거취를 택할 수 있습니다. 저 구순이 청컨대 동쪽으로 가서 어양(漁陽)과 약속하게 해 주시어 그들의 마음을 가지런히 하고 무리를 합친다면 한단이라도 우리를 도모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경황이 그의 말을 옳게 여겨 구순을 파견하여 어양태수(漁陽太守) 팽총(彭寵,?-29)05과 결탁하였다. 구순은 돌아오다가 창평현(昌平縣)에 이르러 왕랑의 사자를 습격하여 그의 군대를 탈취했다. 이후, 구순은 경감과 함께 남쪽으로 달려가 광아(廣阿)에서 유수를 만났다. 유수는 구순을 편장군(偏將軍)에 임명하고 승의후(承義侯)라 불렀다. 구순은 유수를 수행하여 적을 격파하였다. 등우(鄧禹)와 구순이 여러 차례 논의하였는데, 등우는 구순을 특별히 여겨 쇠고기와 술로 그를 접대하면서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렇게 유수의 큰 걸림돌이었던 왕랑을 격퇴하는 데 구순은 큰 공을 세웠다.
 
 
유수의 소하(蕭何), 구순
  하북에 근거를 마련한 유수가 남쪽의 하내(河內, 하남성 武陟縣)를 공략하니 하내 태수 한흠(韓欽)이 항복했다. 하내는 험한 요새 지대이며 부유한 지방이었다. 자신의 근거지를 하나씩 확보해 가던 유수로서는 휘하 장수들 가운데 누구에게 이 지역의 방위를 맡겨야 할지가 고민이었다. 이때 경시제 휘하의 주유(朱鮪)는 대사마였는데 하내와 가까운 낙양에 주둔하고 있었다. 적지 않은 병력을 보유한 주유의 낙양 주둔은 유수에게는 작지 않은 고민거리였다. 유수는 병주(幷州)로 출병하기 전에 등우에게 자문을 구했다.
  “여러 장수들 가운데 누가 하내를 지킬 만한가?”
  등우가 대답하였다.
  “옛날 고조가 소하(蕭何)에게 관중(關中)을 맡기니 다시 서쪽을 돌아볼 만한 우환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고조는 산동(山東)에만 정력을 쏟을 수 있어서 마침내 대업을 이룬 것입니다. 지금 하내는 하수(河水)를 끼고 있는 견고한 요새이고 인구도 풍부하며 북으로 상당(上黨)과 통하고 남쪽으로는 낙양에 가깝습니다. 구순은 문무가 겸비한 사람으로 백성들을 다스리고 병사들을 제어할 재목입니다. 이 사람이 아니면 이 일을 감당할 사람이 없습니다.”
  유수는 등우의 진언을 받아들여 구순을 하내 태수에 임명하고 대장군의 일을 겸하도록 했다. 유수가 구순에게 말하였다.
  “하내는 부유하고 견고하니 나는 장차 하내로 말미암아 일어나리라. 옛날 고조께서는 소하를 남겨 관중에 머물게 하였지만, 나는 이제 공에게 하내를 맡기려 하오. 공은 굳게 지키고 군량을 충분히 공급하고, 사병과 병마를 훈련시키고 다른 군대를 막아 그들이 북쪽으로 넘어오지 않도록 하라.”
  구순에게 하내를 맡긴 유수는 다시금 북쪽의 연(燕), 대(代) 정벌에 나섰다. 유수의 명령대로 구순은 휘하 현(縣)의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활쏘기를 익히게 하였다. 또한 기원(淇園)06의 대나무를 베어다가 화살 백만 개를 만들게 했으며, 말 이천 필, 곡식 4천만 말을 거두어 유수의 원정군에 공급했다. 유수의 군대가 정벌을 나섰으나 군수품의 공급이 모자라거나 끊기는 일이 없었던 것은 구순의 공로였다.
  이때 주유는 유수가 북쪽으로 정벌 갔다는 소식을 접했다. 유수의 정예군이 떠나고 하내는 홀로 남은 것이다. 주유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즉시 군대를 일으켰다. 주유 휘하에 있던 토난(討難)장군 소무(蘇茂)와 부장(副將) 가강(賈彊)이 3만을 이끌고 공하(鞏河)를 건너 온성(溫城)을 공격했다. 주유군이 침공한다는 보고를 접한 구순도 즉시 군대를 발동하면서 각 현의 군대는 온성 아래에 모이라고 명령하였다. 군리(軍吏)들이 모두 간언하였다.
  “지금 낙양의 군대가 하수를 건너 끊이지 않고 몰려오니 마땅히 많은 군사들이 모두 모일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렇게 한 후에 나갈 수 있습니다.”
  많은 적군을 상대하기에는 열세이므로 충분한 군대가 모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 군리들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구순으로서는 한시가 급했다.
  “온성은 우리 군의 울타리이다. 온성을 잃게 되면 군을 지킬 수 없다.” 하고는 마침내 전장으로 나갔는데, 전투는 다음 날 아침에 전개되었다. 때마침 편장군(偏將軍) 풍이(馮異)의 구원병과 여러 현에서 파견한 병사들이 적절한 시기에 도착하였다. 사방에서 모여든 병사와 말들로 온성 아래는 각 군대의 군기(軍旗)가 들을 뒤덮을 정도였다. 구순은 병사들을 시켜 성에 올라가 북을 두드리면서 크게 소리치게 했다.
  “유공(劉公)의 군대가 도착했다.”
  소무의 군사들이 이 말을 듣고 그의 진영에는 동요가 일어났다. 유수의 주력군이 빠진 하내는 손쉽게 공략할 수 있다는 계획에 차질이 생긴 것이다. 구순은 적군의 동요를 놓치지 않고 공격하여 그들을 대파하고 낙양까지 추격하여 가강을 베었다. 구순은 풍이와 함께 황하(黃河)를 건넜고 낙양성을 한 바퀴 돌고서야 돌아왔다. 이 패전으로 주유는 낙양성의 성문을 대낮에도 굳게 닫아둘 정도로 두려움에 떨었다. 주유가 파견한 3만의 병사들 가운데 황하에 빠져 죽은 자가 수천이고 포로로 잡힌 자는 만여 명이었다. 파견군의 절반 이상이 죽거나 포로로 잡힌 것이다. 또한, 구순과 풍이가 낙양성을 한 바퀴 돌고 돌아간 것은 언제라도 낙양을 공격할 수 있다는 무력시위였다. 주유로서는 하내는 고사하고 이제 낙양을 지켜내는 것이 당면과제였다. (다음 편에 계속)
 
 

01 萬民英(明) 原著, 『圖解 星學大成 第一部: 星曜神煞』, 北京; 華齡出版社, 2009, p.417.
02 군(郡)의 인사, 행정담당관으로 군리(郡吏)의 임면(任免) 및 상벌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리.
03 민업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광무제에게 충언을 올렸다. 그는 후한 개국 이후 관내후(關內侯)에 봉해졌고, 관직은 요서(遼西)태수에 이르렀다.
04 유수의 큰 형인 유연(劉縯, ?-23)을 말한다. 백승은 그의 자(字). 경시제 옹립에 큰 공을 세웠으나, 오히려 경시제와 군신(群臣)들의 견제를 받았고 끝내 처형되었다.
05 남양(南陽) 완(宛, 현재 河南省 南陽) 사람. 왕망 말기에 대사공(大司空) 왕읍(王邑)을 좇아 한군(漢軍)에 저항했다. 경시(更始)가 즉위하고 그를 편장군(偏將軍)에 임명하고 어양(漁陽)태수의 일을 보게 했다. 뒤에 광무제(光武帝)에게 귀부(歸附)하여 건충후(建忠侯)에 봉해졌고, 대장군(大將軍)이라는 칭호가 내려졌다. 광무제를 좇아 왕랑(王郞)과 동마군(銅馬軍) 평정에 종군하여 자신의 공에 대한 자부가 컸었다. 그런데 휘하 장수였던 오한(吳漢)과 왕양(王梁)보다 자신의 처우가 못하다는 불만을 품고 26(건무2)년에 반란을 일으켜 우북평(右北平), 상곡(上谷), 계(薊, 현재 北京 西南) 등을 차지하고 스스로 연왕(燕王)에 올랐으나 피살되었다.
06 하북성(河北省) 기현(淇縣) 서북에 있는 원(園)으로 대나무의 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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