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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41년(2011)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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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누고 싶은 이야기 : 복마(伏魔)의 발동을 잘 견디어야 해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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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마(伏魔)의 발동을 잘 견디어야 해원하리라.

 

 

 

구의10 방면 선감 류병무

 

 

 

  수도를 하다가 어려움은 누구에게나 온다. 어려움은 누구에게나 오지만 그것을 겪는 과정들의 모습은 천차만별인 것 같다. 나에게 어려움이 올 때 하나의 지침이 될 만한 경험이 있어서 소개하고자 한다. 물론 나의 이야기가 다른 사람이 어려움을 이겨내는 데 직접적인 힘이 되지 못할 수도 있지만 간접 경험을 통하여 그러한 과정을 이겨내는 데 보탬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방면에서 회관을 지을 때이다. 공사가 한창 진행될 때 외수들이 많이 필요하다고 해서 포덕사업을 하다가 갑자기 회관 작업에 투입되었다. 특별히 가지고 있는 재주가 없어서 처음에는 작업하고 남은 자재들을 정리하고 옮기는 작업을 했다. 건축에 쓰이고 난 자재들을 정리하기 위해 목자재를 차에 실어가서 다른 곳에 정리하는 것이었다. 차에 올라가 한참 자재를 내려주고 있다가 어느 순간 발밑에 커다란 못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아뿔싸! 나의 몸은 이미 멈출 수 없는 상황이었다. 눈으로 대못이 있는 것을 보면서도 이미 나의 몸은 움직이고 있었고 발바닥을 통하여 못이 찔리는 기분 나쁜 느낌이 그대로 전해 왔다. 쓰윽…. 잠시 왼발 바닥을 통해 고통이 전해 왔다. 하지만 작업 중이어서 내색도 하지 못하고 그냥 참으면서 작업을 했다. 이러한 경험이 없었던 나는 조금 지나면 괜찮을 것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발바닥을 통하여 전해지는 고통은 점점 커져 갔다. 참다 참다 할 수 없이 작업 책임자에게 이러한 상황을 말씀드렸다. 책임자분께서 깜짝 놀라면서 소독은 했냐고 하셨다. 안했다고 하니까 어디서 망치와 성냥불을 가지고 와서 소독을 할테니 아파도 참으라고 하면서, 성냥을 상처 부위에 대고 불을 붙였다. 화끈. 맨살을 불로 지지니 순간적인 아픔에 눈물이 핑 돌 정도였다. 불로 소독한 후에 죽은 피를 빼야 된다고 하면서 상처 부위를 망치로 두드렸다. 상처를 통해서 피가 나왔다. 발바닥이 얼얼할 정도로 한참을 두드렸다. 더 이상 피가 안 나올 때까지… 그리고 한마디 해주신 말이 지금도 생생히 내 가슴에 남아 있다.
  “수도를 하다보면 어려움이 많이 와요. 이것이 그 작은 어려움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세요. 발을 디디면 디딜수록 아플 거예요. 아프다고 안 딛고 다니면 오히려 발이 점점 붓고 나중에는 더 악화될지도 몰라요. 아파도 참고 더 힘껏 딛고 다니다 보면 오히려 독이 빠져서 괜찮아질 거예요. 열심히 하세요.”
  정말 한발 한발 딛는 것이 너무나 아팠다. 너무 아프다 보니 나도 모르게 아픈 발에 힘이 덜 가게 하느라 절뚝절뚝 걷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점점 더 아파오는 것이었다. 그때 갑자기 전경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나는 해마(解魔)를 위주하므로 나를 따르는 자는 먼저 복마(伏魔)의 발동이 있으리니 복마의 발동을 잘 견디어야 해원하리라…”(교법 2장 15절). ‘그래, 수도인이 이 정도의 고통도 이겨내지 못하면서 무슨 도통을 바라겠느냐’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는 어릴 때의 상처가 있다. 내가 자란 시골의 냇가는 수영하기에 알맞은 깊이와 적당한 넓이의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었고 그래서 간간이 서울 사람들이 와서 놀다가곤 했다. 내 어린 시절의 여름은 대부분이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초등학교 6학년 때로 기억한다. 그때도 언제나처럼 시냇가로 놀러 갔다. 한참을 수영하고 모래사장에서 놀다가 갑자기 따끔해서 발을 보니 왼발 바닥에 깨진 병이 박혀 있었다. 누군가가 깨진 병을 안 보이게 모래로 덮어 놓고 간 것이었다. 깊숙이 찔렸는지 박힌 병을 빼고 나서도 피가 계속 나왔다. 병원이 따로 없는 시골이라 쑥을 짓이겨 지혈을 하고 칡덩굴로 상처를 감쌌다. 그런 후 얼마 지나서 상처는 나았지만 신경이 다쳤는지 발가락을 잘못 움직이면 쥐가 나서 한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러한 증상은 한 달에 한 번 꼴로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되었다.
  공교롭다고 해야 할까 못에 찔린 부위가 어릴 때 다친 그 부위였다. 이것은 확실히 나의 복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내 자신이 이겨내야 할 복마라는 생각이 드니 아픈 것을 참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아플수록 이를 악물고 더욱 세게 딛고 다녔다. 일부러 더욱 딛고 다닐려고 열심히 뛰어다니다 보니 처음엔 참을 수 없이 아픈 고통이 나중에는 점점 참을 만해졌다.
  아픈 발로 하루를 지내고 다음날이 되었다. 여전히 발은 부어 있었고 아팠지만 바쁜 일정 속에서 부지런히 움직이다 보니 아프다고 느낄 시간조차도 없었다. 바쁘게 움직이다가 어느 순간 깜짝 놀랐다. 언제부터인지 내가 정상적으로 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발을 디뎌도 하나도 안 아팠다. 생각보다 상처가 빨리 나은 것이다. 상제님의 덕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속담에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좋은 일일수록 마가 많게 마련인가 보다. 회관 작업에 들어오기 전에 입도시킨 학교 후배가 도를 알아보고 있었다. 후각은 도를 모르는 상태에서도 매일 작업 현장에 와서 선각인 나를 보고 갔고 특별하게 도담도 해주지 못했는데 방면 사람들의 보살핌 속에서 점점 도를 알아갔다. 도를 알아보던 그 후각이 나중에 도인이 되어서 도의 공사에 기여를 했고, 또 지금 복지법인에서 일하고 있는 것을 보니 새삼 도가 물샐틈없이 짜여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왼발바닥의 상처로 인하여 생기던 쥐가 나는 증상이 이 일을 겪고 나서는 없어졌으니 상제님의 덕화에 감사할 따름이다. 그때는 못에 찔린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도 몰랐는데 나중에 누군가를 통하여 그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다. 무모하게 달렸던 수도의 시절을 지금 다시 돌아보면, 만약 지금 그와 같은 일이 똑같이 일어난다면 병원부터 달려가지 않았을까 하는 부끄러운 마음에 그때의 무모함이 그리운 것은 왜일까?
  만약 그때 아픔을 참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결과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할지라도 수도하는 모습에서는 많은 차이가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누구에게나 어려움은 온다. 하지만 어려움을 이겨내는 모습은 누구나 다르다고 본다. 그것의 선택은 결국 자신의 몫이지만 선택으로 인하여 생기는 결과는 다르다. 만약 누군가가 어떤 선택의 기로에 있다면 몸의 편안함 보다는 힘든 것을 선택하라고 하고 싶다. 그것은 나의 경험이 나에게 준 교훈이다. 다시 한번 상제님의 말씀을 되새겨 본다. 

 
“나는 해마를 위주하므로 나를 따르는 자는 먼저 복마의 발동이 있으리니 복마의 발동을 잘 견디어야 해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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