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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21년(1991)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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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연구 : 동학의 창시자 최수운

동학의 창시자 최수운

 

천 ∙ 인(天 ∙ 人)을 대도의 근원으로,
성 ∙ 경 ∙ 신을 도의 본체로,
수심정기(守心正氣)를 수도의 요결로 삼고 포교를 시작.

 

    

강 상 년 <연구위원>

     
  근대적 민족종교인 동학을 창시한 최수운, 제세구민(濟世救民)의 큰 뜻을 품고 물밀 듯 몰려 들어오는 이질적 서양문화 곧 서학(西學, 천주교)에 대하여 소박한 백성을 위하여 동학을 창시한 최수운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기로 한다. 
  천도교의 자료에 의하면 수운은 호이고, 아명은 제선(濟宣), 이름은 제우(濟愚)이다. 1824년 10월 28일 경주 가정리에서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동경대전의 노소문답가에 「금강산일협곡」이라고 수운이 직접 기록한 점을 들어 금강산에서 태어났다는 주장도 있다. 경주 가정리에서 성장한 수운의 선조는 신라말기의 유명한 석학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 (서기857 ~ ?)]이다. 수운 부친의 호는 근암(近庵), 이름은 최옥(崔鋈)이고 모친은 한씨부인이다. 근암은 63세의 노경에 들어 수운을 얻었다. 근암은 문장과 도덕이 높아 경상도 일대에서 사림(士林)의 사표가 되었으나 끝내 벼슬없는 선비로 불운하게 살다가 한평생을 마쳤다. 그는 특히 성리학의 연구에 힘쓰면서 주자와 퇴계의 학설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수운은 어려서부터 도량이 크고 사리가 밝을 뿐 아니라 얼굴이 관옥 같으므로 집안이나 이웃이 모두 이상하게 생각하였고 보는 사람마다 신동이라 이르지 않는 이가 없었다. 특히 눈에 광채가 있어 마치 샛별같은 눈이 보이는 이로 하여금 두렵게 하므로 남들이 희롱하기를 『너의 눈은 역적이 될 눈이다.』라고 하면 수운은 태연하게 답하기를 『나는 역적이 되려니와 너희는 어진 백성이 되라』고 하였다. 

  수운은 점점 성장함에 따라 매사를 범연히 보아 넘기지 않고 보통 사람들과는 달리 회의적이면서도 비판적인 시각을 가졌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는가 하면 반대로 비방을 받기도 했다. 이처럼 수운은 비교적 일찍부터 세상이 어지럽게 되어 감을 보고 이 세상은 『임금은 임금답지 않고 신하는 신하답지 않고, 아비는 아비답지 않고, 아들은 아들답지 않고 남편은 남편답지 않고, 아내는 아내답지 않다.(君不君, 臣不臣, 父不父, 子不子, 夫不夫, 婦不婦)』는 것을 탄식한다. 13세에는 부친 명에 따라 밀양 박씨 가문에서 부인을 맞아들였다. 다음해 14세 때에는 바깥 세상을 구경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 부친의 허락을 받고 여행길에 나섰는데 우선 경주 치술령(鵄鶐嶺)을 거쳐 금강산을 위시하며 여러 명산을 두루 찾았다. 이 여행에서 수운은 자연과 인생에 대한 근본원리와 시운시변하는 세상 이치를 수 없이 느끼고 그 때의 일들을 뒷날 「몽중 노소문답가」에서 상징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그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보면 양반 지배층의 부패, 무능한 정치와 가혹한 착취로 나라 안 각처에서는 크고 작은 민란이 일어나고 심각한 사회적 불안과 긴장이 고조되어 갔다. 따라서 도탄에 빠진 민생은 어찌할 바를 몰라 헤매었으며 이렇듯 소외 당하고 실의에 빠진 백성들이 찾을 곳은 신앙적인 안식처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시의 기성종교는 이미 쇠퇴하였고 밀려들기 시작한 서학은 오랫동안 유교적 윤리에 젖어온 일반 백성들에게는 쉽게 영합할 수 없는 이질적인 것이었다.

  1840년 부친 마저 세상을 뜨니, 수운의 나이 17세였다. 양친을 모두 잃고 외로운 몸이 된 수운은 자기의 고독을 통하여 한층 더 명상에 젖어 들고 세상 인심과 더불어 인생에 관한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비록 군신부자의 상하관계가 뒤흔들리는 속에서도 낡은 도덕과 타락한 윤리를 탄식하면서 스스로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 잡고 도탄에 빠진 민생을 건지기로 굳게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선대로 부터 전해오는 경서(經書)를 연구해 보았으나 아무 소득없이 『이 세상은 요순의 정치로도 다스리지 못할 것이며 공맹의 도덕으로도 또한 건지지 못하리라』고 단정했다. 다시 불서(佛書)를 깊이 연구했으나 역시 얻은 것이 없어 『유도 불도는 수천년에 운이 역시 다했던가』라고 안타까워 했다. 또 다시 도가의 신선술도 연구했지만 그도 역시 병든 세상을 살릴 수 있는 도리가 못된다고 단정했다. 이는 수운으로 하여금 과거의 모든 종교를 부인하게 했고 따라서 새로운 가르침은 찾는 의지를 발휘하게 한 원인이 되었다. 수운은 부친이 별세한 뒤 20세(1843년)되던 해 큰 화재를 당하여 가산과 모든 유물이 타 버리고 말았다. 이로 말미암아 마음에 충격적인 상처를 입고 삶의 의욕마저 잃게 된다. 이처럼 자책하는 마음에 후회 막급한 생각마저 겹친데다가 가정을 이끌어갈 생업조차 막연한 형편이었다. 그러나 보다 큰 뜻을 품고 있던 수운은 전래의 가업을 버리고 구도(求道)의 길을 나서기로 결심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집은 이미 불타버렸기 때문에 부득이 처자를 울산 처가에 맡기고 드디어 도를 구하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고행길에 오르게 됐다.

  그 후 세상 인심과 시운시변하는 사회환경을 힘써 살피면서 동으로는 금강산, 서쪽으로는 구월산, 남으로는 지리산, 북으로는 묘향산 등 널리 산천을 두루 돌아다니며 큰 절에 이르러는 고승들과 불경을 토론하고 큰 마을에서는 서당에 들러 선비들과 정담을 벌였다. 이처럼 세상을 두루 돌아 다니는 동안에 수운은 보고 들은 것도 많거니와 느끼고 깨달은 바도 많았다. 어수선한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직접 보고 들은 수운은 이 세상 뿌리채 무너져 간다고 느꼈다. 그 무엇보다 이 세상을 뿌리로부터 바로 잡을 수 있는 원천적인 진리를 갈망하게 된다. 수운은 세상 사람이 「하느님(상제)의 뜻 즉, 천명(天命)」을 돌보지 않으므로 이처럼 세상이 어지럽게 되었다고 진단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상제의 뜻을 알고 따르기만 한다면 어지러운 세상도 바로 잡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수운은 무엇보다 앞서 상제의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아내야 한다고 결심하게 된다. 수운은 20세에 집을 떠나 천하를 두루 다니다가 31세되는 갑인년(1854년)에 돌아와 처자가 기거하고 있는 울산을 찾아 그 곳 유곡동(경남 울산시 유곡동)「여시바윗골」에 초가 3칸을 마련하고 살게된다. 이듬해 을묘년 춘삼월 초순 수운이 홀로 토당에 앉아 이치를 생각하고 있는 중에 문득 눈을 들어보니 어떤 이상한 도인이 앞에 나타나 책 한권을 주고 합장 사배한 다음 사라지니 이것을 일러 「을묘천서(乙卯天書)」라고 한다.

  을묘천서 속에 적힌 『지극한 정성을 하느님께 49일 기도를 드려야 한다』는 뜻에 따라 1856년 천성산(千聖山) 내원암(內阮庵)에 들어가 술수(術數)를 터득했으며, 이듬해 가을 천성산 적멸굴(寂滅窟)에서 지성으로 49일간의 기도를 드렸지만 역시 불가사의한 이적과 영험이 있을 뿐이요 세상을 건질만한 큰 도는 얻을 수가 없었다. 드디어 1859년 수운이 생각하기를 『내 창생을 건질 도를 얻기 위하여 10여년의 긴 세월을 주유천하 하였을 뿐 아니라 수련과 기도를 계속하여 왔으나 아직 조그마한 이적(異蹟)을 얻었을 뿐이요 제세안민의 대도를 찾지 못하였으니 내 선조의 유산을 탕패한 보람이 어디 있으며 내 가산을 돌보지 않은 면목이 어디 있는가. 내 이제로 부터 고향에 돌아가 제세안민의 큰 도를 얻지 못하면 깊이 숨어 세상에 다시 나오지 않으리라』고 결심하고 처자를 데리고 고향인 경주로 돌아와 구미산(龜尾山) 아래에 있는 용담정(龍潭亭)에 은거하면서 침사명상을 계속했다. 또한 그 큰 뜻을 이루기 전에는 다시는 이 산에서 밖으로 나가지 않겠다는 중한 맹세를 하고 「불출산외(不出山外)」의 뜻을 밝힌 시를 써 붙였다.

  『도기장존사불입 세간중인부동귀(道氣長存邪不入 世間衆人不同歸)(도의 기운이 오래도록 함께 있으니, 나쁜 기운이 들어오지 못하고,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들과는 같은 길로 가지 않으리)』(동학경전, 입춘시 p.57 ~ 58)

  수운은 기필코 세상을 건질 무극대도(無極大道)를 구하겠다는 비장한 결심을 하고 용담에 돌아와 산밖에 나가지 아니하고 세상과 같이 돌아가지 않기로 맹세한 다음 상제께 지극한 정성을 드림으로써 도를 구하기 위하여 전력을 다했다. 이제 수운은 너무도 절망적인 그의 처지를 오로지 어떤 절대적인 존재의 뜻에 걸었다. 그의 모든 것을 절대적인 존재 곧 상제께 걸고 이처럼 절대적인 경지에서 수운은 드디어 그 어떤 결정적인 종교적 체험을 하게 된다.

  수운의 나이 37세[1860, (경신년)]에 무극대도를 득도하였다. 지극한 정성을 드리면 상제의 뜻도 움직일 수 있다고 확신한 수운이 일심으로 수도에 최선을 다한 끝에 드디어 뜻을 이루고 만고에 없는 무극대도를 얻게 된 것이다. 

  이로써 만고 없는 무극대도 곧 새로운 종교가 탄생하게 되는데 수운은 이를 동학(東學)이라 일컬었다. 

  수운사상에 있어서 핵심은 시천주사상(侍天主思想)이다. 이는 상제님을 지극한 정성으로 모심으로써 후천선경과 지상신선을 실현하고 세계개벽을 이룰 수 있다는 후천개벽 사상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수운은 상제님을 모시는 올바른 태도가 성 ∙ 경 ∙ 신에 있다고 말한다. 이 속에서 힘써 공부하면 진리를 통달하여 저절로 알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성 ∙ 경 ∙ 신의 도덕을 밝히는 노력을 넘어서 상제님을 모셔야 한다고 가르치는데 바로 수운사상의 핵심이 있다. 이렇게 수운이 도달한 경지는 도덕의 경지를 넘어선 종교 또는 도의 경지요. 상제님을 모시는 종교적 헌신에 의해서라야 성 ∙ 경 ∙ 신이라는 도덕이 비로서 그 생명력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천 ∙ 인(天 ∙ 人)을 대도의 근원으로 성 ∙ 경 ∙ 신을 도의 본체로, 수심정기(守心正氣)를 수도의 요결(要訣)로 삼고 포교를 시작하여 도를 천도(天道)라 하고 농민 ∙ 천민 ∙ 유생에 이르는 광범한 계층에 침투했다. 62년 도수사(道修詞) 권학가(勸學歌)를 짓고 동학론(東學論)을 집필하며 포교에 전심, 각 지방에 접소(接所)를 두어 관내의 교도를 관장하게 함으로써 1863년에 교세가 교인 삼천여명, 접소 14개소에 이르렀다. 같은해 최시형(崔時亨)을 북접 대도주(北接大道主)로 앉히고 8월 도통(道通)을 계승시켜 교주로 삼았다. 1864년(甲子年), 각 접소를 순회하다가 용담정에서 동학을 사학(邪學)으로 단정한 정부에 의해 체포되어 사도난정(邪道亂正)의 죄목으로 3월 대구장대(大邱將臺)에서 참수되었다.

  수운은 『나는 도시 믿지 말고 하느님만 믿어서라 네 몸에 모셨으니 사근취원하단 말가』(교훈가)라고 말한 바와 같이 시천주를 통한 후천개벽을 부르짖었다. 그는 결국 개벽의 첫 소식을 세상에 전하는 선지자였다고 볼 수 있다. 수운은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개벽이란 대변화의 시기를 예고했던 것이다.

  한편 전경에는 최수운에 대한 상제님의 말씀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선도(仙道)와 불도(佛道)와 유도(儒道)와 서도(西道)는 세계 각 족속의 문화의 바탕이 되었나니 이제 최수운을 선도의 종장(宗長)으로 세우노라…』(교운 1장 6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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