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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26년(1996)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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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절후 신명의 생애 : 장량(張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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立秋절후 관장하는

 

장량(張亮)

 

          

          

  장량(張亮)은 정주(鄭州) 영양(榮陽) 사람이다. 농부로 태어났고 뜻이 훌륭했으며 비록 겉으로는 온화했으나 내심은 정(情)에 구애되지 않았다.

  수(隋) 대업(大業) 말년에 이밀(李密)이 영(榮), 변땅을 공략할 때에 장량이 그를 좇았으나 특별히 눈에 뜨이지는 못했다. 그 당시 군중에 반역하여 떠나려고 꾀하는 자가 있었는데 장량이 곧 보고하니 이밀이 그의 성실성을 어여삐 여겨 이에 표기장군(驃騎將軍)으로 임명하여 이적(李勣)의 부대에 예속시켰다. 이적이 여양(黎陽)땅으로부터 돌아올 때에 장량이 자못 그를 도우니 정주자사(鄭州刺史)로 발탁되었다. 때마침 왕세충(王世充)이 정(鄭)지역을 탈취하자 장량은 소수의 군사를 이끌고 감히 들어갈 수가 없어서 공성산(共城山)으로 망명했다. 얼마 있다가 정주 별가(定州別駕)를 맡게 되었다.

  방현령(房玄齡)이 장량을 침착하고 결단력있고 지략이 있다고 여겨 진왕(秦王)에게 아뢰니 발탁하여 거기장군(車騎將軍)으로 삼았다. 은태자(隱太子)가 장차 난을 일으키려고 함에 장양에게 좌, 우 천명의 병사를 통솔하고 낙양(洛陽)으로 가서 은밀히 산동(山東)의 호걸들과 결탁하여 변고에 대비하라고 명령했다.
  왕이 즉위한 후, 우위장군(右衛將軍)을 배수하고 장량을 장평군공(長平郡公)으로 봉했다. 거듭 어사대부(御使大夫)로 옮겨졌고, 진급하여 우국공으로 봉해졌다. 식읍이 익주(益州) 500호였다. 빈주·하주·녹주 삼개주의 도독과 상주장사(相州長史)를 역임하고 운국(隕國)으로 옮겨졌다. 다시 불러들여 공부상서(工部尙書)를 배수했다.
  장량은 정치를 할 때에 살핌성이 강하여 사전에 일을 적발하여 현명함을 드러냈고, 강자를 누르고 약자를 구휼하여 가는 곳마다 업적을 쌓았다. 태자첨사를 배수받고 낙주도독(洛州都督)으로 나갔다가, 후군집이 죽은 후에 형부상서(刑部尙書)가 되어 조정의 일에 참여했다.

  이 때에 무주(茂州) 리현(俚懸)의 동(童)인 장중문(張中文)이 스스로 천자(天子)라고 칭하자, 유사(有司)가 천자에게 해를 끼치니 마땅히 사형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논죄 했다. 그러나 형부상서(刑部尙書)를 맡고 있던 위정(韋挺)이『동(童)이 요사스러운 말을 했으나 죽을죄는 아닙니다.』라고 상주했다. 임금이 노하여 말하기를『너는 아랫사람에게 복을 짓고 짐에게는 모욕을 주는구나.』라고 하자, 위정이 논거 점을 잃고 바삐 퇴궐했다. 장량이 위정을 위하여 직간(直諫)하자, 임금이 말하길『공은 굳세고 바르다는 이름을 얻고자 하오?』장량이 사양하지 않자 임금이 깨닫고 말하기를『비록 나를 굽혀서라도 그대의 청을 들어주겠다.』이리하여 동(童)은 죽음을 면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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