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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26년(1996)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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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수 신명의 생애 : 경감(耿弇) 神明열전

경감(耿弇) 神明열전

 

              

                

  경감이 서안성은 비록 작지만 견고하고 또 장람의 군대가 날쌔다는 것과 임치는 비록 크기는 해도 실제로는 쉽게 공략할 수 있을 것임을 간파하고 칙서를 내려 여러 장교들을 불러모아 닷새 후에 서안을 공격하겠노라고 공공연히 얘기했다. 장람이 이 소문을 듣고 밤낮으로 삼엄한 경계를 폈다.

  치기로 정한 날 꼭두새벽에 경감이 제장(諸將)들에게 칙서를 내려 모두 식사를 서둘러 마치고 날이 밝으면 임치성으로 향할 수 있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호군(護軍), 순량(荀梁) 등이 간언하기를 의당 서안을 먼저 공격해야지 않느냐고 했다. 경감이 말하길『그렇지 않소. 서안은 내가 공격하리라는 말을 듣고 밤낮으로 수비를 철통같이 하고 있소. 우리가 임치로 뜻하지 않게 가면 반드시 놀랄 것이니 하루 정도만 공략해도 함락시킬 수 있을 것이오. 임치를 함락시키면 서안은 고립되어 장람과 장보가 서로 구원할 수 없게 되므로 장람이 반드시 도망치게 될 것이오. 이렇게 되면 이른바 하나를 쳐 둘을 얻게 된다는 것과 같아지는 셈이오. 만일 서안을 먼저 공격하였다고 할 때 곧바로 함락시키지 못하면 적들은 더욱 굳게 수비에 임할 것이고 이로 인해 우리측의 사상자(死傷者)가 많아질 수밖에 없을 것이오. 비록 함락시켰다고 해도 장람은 군대를 이끌고 임치로 달려가 임치의 병력과 합세하여 우리측의 허실(虛實)을 주시하게 될 것이오. 우리가 적지(敵地) 깊숙이 들어가 뒤에서 보급로가 차단되면 한달 남짓 되어 우리는 싸우지도 않고 곧 곤궁에 처하게 될 것이오. 여러분들의 말은 이점을 헤아리지 못한 것이오.』라고 하였다. 마침내 임치를 공격하여 반나절 만에 함락시키고 입성(入城)하였다. 장람이 이 사실을 듣고 크게 놀라 그 무리들을 이끌고 장보가 있는 극으로 도망쳤다.
  경감이 군중(軍中)에 영(令)을 내려 극 아래지역을 함부로 건드리지 말도록 했다. 장보가 오면 이 지역들을 취하여 장보를 격노케 할 심산이었다.

  장보가 이를 듣고 크게 웃으며 말하길『우래(尤來), 대동(大彤)의 10여만 병력도 내가 그쪽 병영으로 나아가 깨뜨렸었다. 이제 경감의 군대가 그보다도 적고 또 모두 지쳐 있는데 두려워할 게 뭐 있으랴!』라 하고는 세 아우 장람, 장홍(張弘), 장수(張壽)와 옛 대동적(大彤賊)의 거수 중이(重異) 등의 군대와 함께 2십만 대군이라 일컬으며 임치의 큰 성 동쪽으로 와 경감을 공격하려고 했다.
  경감이 먼저 치수(淄水)가로 나가 중이와 마주치게 되었다. 돌기(突騎)를 내보내려다 상대방의 선봉을 꺾어 장보로 하여 머뭇거리게 할 것 같아, 고의로 약한 척하여 적들의 기세를 부추겨 놓고는 병사들을 이끌고 소성(小城)안으로 들어와 진을 쳤다. 장보가 기세가 등등해져 곧바로 경감의 병영을 공격하였는데 유흠 등이 이들을 맞아 교전하였다. 이때 경감은 왕궁의 대(臺)에 올라 싸움을 지켜보고 있다가 유흠 등이 치열하게 싸우는 것을 보고 직접 접병들을 이끌고 나가 동성(東城) 아래에서 장보의 진영 측면을 돌파하여 크게 이겼다. 나는 화살이 경감의 허벅지에 꽂혔으나 패도(佩刀)로 잘라내 아무도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싸움이 끝났다. 경감은 그 이튿날 아침에 다시 병사들을 이끌고 성문을 나갔다.
  이때 광무는 노(魯)에 머물고 있었는데 경감이 장보에게 공격을 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와서 구원하려고 했으나 아직 임치까지 못미쳐 있었다. 진준이 경감에게 이르길『극의 적병들이 기세가 등등하니 병영을 닫고 병사들을 쉬게 했다가 천제(天帝)께서 오시면 다시 싸우도록 합니다.』라고 하자 경감이 대답하길,

  『천제께서 장차 당도하시면 신하된 자는 마땅히 소를 잡고 술을 걸러 백관(百官)들을 대접해야 하는 것이거늘, 도리어 적들을 천제의 몫으로 남겨 두잔 말인가?』라고 하였다.

  병사들을 내보내 큰 싸움을 벌여 아침부터 저녁까지 공방전을 벌인 끝에 다시 크게 이겼다. 벤 적들의 수가 얼마나 많았던지 성중의 개울과 연못이 모두 가득 찼다. 경감이 장보가 지쳐 퇴각할 것을 알고 좌우익의 병사들을 미리 풀어 매복해 있다가 퇴각할 때를 기다리라고 했다. 밤이 깊어지자 장보가 과연 군대를 이끌고 퇴주하기 시작했다. 복병들이 뛰어나와 공격하여 거매수(鉅昧水)까지 추격하였다. 8, 9십리의 길이 죽은 시체로 이어졌고 군대의 장비 2천여 량(兩)을 획득했다. 장보는 극으로 되돌아가고 그의 형제들은 각기 군대를 이끌고 흩어졌다.
  며칠 후에 광무가 임치에 당도하여 군영(軍營)의 노고를 치하하고 군신(君臣)들을 크게 회집(會集)하였다. 광무가 경감에게 이르길,

  『옛적에 한신(韓信)이 역하(歷下)를 격파하여 한(漢)의 기초를 열었었는데, 오늘 장군이 축아(祝阿)를 공략하여 제(霽)의 서쪽 경계로 삼은 것은 한신의 자취를 이은 것으로 그 공이 서로 비견될 듯 하오. 그러나 한신은 공격을 당하여 항복했고 장군은 강한 적을 꺾었으니 그 공이 오히려 한신의 공보다 이루기 어려울 것이오. 또 전횡(田橫)이 여이기(麗食其)를 죽인 뒤에 조서에 응하게 되었을 때 고제(高帝)가 여이기의 아우에게 조서를 내려 전횡을 건드리지 말라는 자신의 지시를 따르지 않으니 원수로 삼아버리겠다고 했소. 장보가 전날 복륭(伏隆)을 죽였으나 돌아와 명을 받든다면 복륭의 아비 대사도(大司徒)에게 조서를 내려 그 원한을 풀게 할 터인즉, 그일 또한 서로 매우 유사하오. 장군이 전날 남양에서 제지(齊地)의 평정이란 이 큰 뜻을 세웠을 때, 짐은 대충 이루기 어려운 일일 것이라고 늘 여겼었소. 그런데 뜻을 가졌던 자가 마침내 일을 해내었구려.』라고 하였다.
  경감이 다시 장보를 추격하자 장보는 평수(平壽)로 도망했다가 사죄의 표시로 군문(軍門) 앞에서 육단(肉袒)을 하고 죄인을 죽이는데 쓰는 도끼를 메고 서있었다. 경감이 장보를 광무가 있는 곳으로 보내고 장보의 군대를 통어하여 입성시켰다. 열 두 군(郡)의 깃발을 세우고 명령을 내려 자기군의 깃발 아래로 가게 했다. 병사들이 그때까지도 10여만이나 되었으며 군대의 장비는 7천여량(兩)에 달했다.

  병사들을 흩어 귀향시키고 경감은 다시 군대를 이끌고 성양(城陽)으로 갔다. 여기서 오교적(五校賊)의 잔당을 항복시켜 마침내 제의 땅을 완전히 평정했다.
  건무 6년에 서쪽으로 가 외효(隗囂)를 막고자 칠(漆)에 둔병(屯兵)하였다. 9년에 중랑장(中郞將) 내흡(來歙)과 부(部)를 나누어 안정(安定), 북지(北地)의 여러 영보(營保:도적들의 근거지)들을 순시하면서 모두 항복시켰다.

  경감이 평정한 군(郡)이 46개, 함락시킨 성(城)이 3백여 개나 되었으며 일찍이 좌절한 적이 없었다. 진무 12년에 경감이 병이 들자 광무가 몸소 수차례나 다녀갔다. 광무는 다시 경국(耿國)의 아우 경광(耿廣)과 경거(耿擧)를 중랑장으로 삼았다. 경감의 형제 여섯 명이 모두 높은 벼슬을 지냈으며 몸수도 건강하게 당대에 영화를 누렸다. 경황이 죽자 시호를 열후(烈候)라 하고 막내, 경패(耿覇)로 하여 경황의 작위를 잇게 하였다.
  건무 13년에 경감의 식읍을 늘렸다. 경감이 대장군의 인수(印綬)를 바쳐 군인의 길을 끝내고 열후(列侯)로서 조정의 청(請)을 받들었다. 이견(異見)이 분분한 때마다 불러들여 책략을 묻곤 하였다. 영평(永平) 원년에 죽었는데 시호를 민후(愍侯)라 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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