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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수 신명의 생애 : 경감(耿弇) 神明열전
경감(耿弇) 神明열전
경감이 서안성은 비록 작지만 견고하고 또 장람의 군대가 날쌔다는 것과 임치는 비록 크기는 해도 실제로는 쉽게 공략할 수 있을 것임을 간파하고 칙서를 내려 여러 장교들을 불러모아 닷새 후에 서안을 공격하겠노라고 공공연히 얘기했다. 장람이 이 소문을 듣고 밤낮으로 삼엄한 경계를 폈다. 치기로 정한 날 꼭두새벽에 경감이 제장(諸將)들에게 칙서를 내려 모두 식사를 서둘러 마치고 날이 밝으면 임치성으로 향할 수 있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장보가 이를 듣고 크게 웃으며 말하길『우래(尤來), 대동(大彤)의 10여만 병력도 내가 그쪽 병영으로 나아가 깨뜨렸었다. 이제 경감의 군대가 그보다도 적고 또 모두 지쳐 있는데 두려워할 게 뭐 있으랴!』라 하고는 세 아우 장람, 장홍(張弘), 장수(張壽)와 옛 대동적(大彤賊)의 거수 중이(重異) 등의 군대와 함께 2십만 대군이라 일컬으며 임치의 큰 성 동쪽으로 와 경감을 공격하려고 했다. 『천제께서 장차 당도하시면 신하된 자는 마땅히 소를 잡고 술을 걸러 백관(百官)들을 대접해야 하는 것이거늘, 도리어 적들을 천제의 몫으로 남겨 두잔 말인가?』라고 하였다. 병사들을 내보내 큰 싸움을 벌여 아침부터 저녁까지 공방전을 벌인 끝에 다시 크게 이겼다. 벤 적들의 수가 얼마나 많았던지 성중의 개울과 연못이 모두 가득 찼다. 경감이 장보가 지쳐 퇴각할 것을 알고 좌우익의 병사들을 미리 풀어 매복해 있다가 퇴각할 때를 기다리라고 했다. 밤이 깊어지자 장보가 과연 군대를 이끌고 퇴주하기 시작했다. 복병들이 뛰어나와 공격하여 거매수(鉅昧水)까지 추격하였다. 8, 9십리의 길이 죽은 시체로 이어졌고 군대의 장비 2천여 량(兩)을 획득했다. 장보는 극으로 되돌아가고 그의 형제들은 각기 군대를 이끌고 흩어졌다. 『옛적에 한신(韓信)이 역하(歷下)를 격파하여 한(漢)의 기초를 열었었는데, 오늘 장군이 축아(祝阿)를 공략하여 제(霽)의 서쪽 경계로 삼은 것은 한신의 자취를 이은 것으로 그 공이 서로 비견될 듯 하오. 그러나 한신은 공격을 당하여 항복했고 장군은 강한 적을 꺾었으니 그 공이 오히려 한신의 공보다 이루기 어려울 것이오. 또 전횡(田橫)이 여이기(麗食其)를 죽인 뒤에 조서에 응하게 되었을 때 고제(高帝)가 여이기의 아우에게 조서를 내려 전횡을 건드리지 말라는 자신의 지시를 따르지 않으니 원수로 삼아버리겠다고 했소. 장보가 전날 복륭(伏隆)을 죽였으나 돌아와 명을 받든다면 복륭의 아비 대사도(大司徒)에게 조서를 내려 그 원한을 풀게 할 터인즉, 그일 또한 서로 매우 유사하오. 장군이 전날 남양에서 제지(齊地)의 평정이란 이 큰 뜻을 세웠을 때, 짐은 대충 이루기 어려운 일일 것이라고 늘 여겼었소. 그런데 뜻을 가졌던 자가 마침내 일을 해내었구려.』라고 하였다. 병사들을 흩어 귀향시키고 경감은 다시 군대를 이끌고 성양(城陽)으로 갔다. 여기서 오교적(五校賊)의 잔당을 항복시켜 마침내 제의 땅을 완전히 평정했다. 경감이 평정한 군(郡)이 46개, 함락시킨 성(城)이 3백여 개나 되었으며 일찍이 좌절한 적이 없었다. 진무 12년에 경감이 병이 들자 광무가 몸소 수차례나 다녀갔다. 광무는 다시 경국(耿國)의 아우 경광(耿廣)과 경거(耿擧)를 중랑장으로 삼았다. 경감의 형제 여섯 명이 모두 높은 벼슬을 지냈으며 몸수도 건강하게 당대에 영화를 누렸다. 경황이 죽자 시호를 열후(烈候)라 하고 막내, 경패(耿覇)로 하여 경황의 작위를 잇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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