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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18년(1988)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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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라는 곳 : 모성의 포근함이 담긴 슬기의 고장

여주라는 곳

母性의 포근함이 담긴 슬기의 고장



 여주수도장 선무 이 광 동

 

국태민안 시화영풍
연연이 돌아들고
이씨(李氏)한양 등극후
삼각산이 기봉하고
왕심사는 청룡되고
동구재 만리재 백호로다.
동족강은 천금마(千金馬)요
봉학이 넌지 생겼구나
학을 눌러 대궐짓고
대궐 앞에 육조로다
육로에 애경문은
각도 각음 마련시
경기도 삼십칠간 마련하고
여주 같은 대무관이
이대동네 대동네
<여주 쌍룡 거줄 다리기>중 살풀이의 한구절.


 

▲ 여주군 강천면 가야리에 자리잡은 여주수도장과 道人들.


         
역사적인 요충지역
  들이 평평하고 멀리 큰 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여주는 남한강(여강)이 군의 중앙을 가로질러 예부터 수운(水運)의 중심지였다. 물줄기와 충적평야의 풍요로움과 포근함은 이중환의 “택리지”에서 보면 소양강이 있는 춘천과 더불어 가장 살기 좋은 곳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상고시대 건국이전부터 부족으로 흩어져 살아오다 고구려 장수왕 63년 “골내근현”이라 이름 붙혀진 후 이 지역을 차지하는 국가나 왕조에 따라 “황요” “황려” “영의” “여흥” “여주” 로 바뀌어 온 것을 보면 이곳이 시대적으로 역사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내륙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곡창지대라는 것이 이유중의 한가지일 것이다.
  옛날에 여주는 남한강의 수로를 이용한 교통의 중심지로 한양으로 보내지는 강원도의 산물은 모두 이 고장을 거쳐야 했고 비옥한 땅에서 생산되는 쌀, 대신면의 땅콩, 금사면의 참외 등 특산물은 지금까지도 그 명성을 잃지 않고 있다. 특히 쌀의 질이 좋아 진상미(자채쌀)로 바쳐져 밥맛을 인정 받고 있다.



도자기 문화의 원류 고장
  한편 팔당댐의 윗목인 여주는 남한강의 물이 깨끗하기로 유명해 현재 수도권 유역의 식수원이 되어지고 있다. 그러기에 여기서 잡히는 쏘가리, 잉어(진상품)등의 민물고기는 강바닥 전체가 모래이기에 흙 냄새가 나지 않고 달짝지근한 맛이 일품이다.

  또 한가지의 특산품이라 할 수 있는 도자기는 “동국여지승람” “세종실록”에 자세히 기록되어 전해지는 바, 예부터의 명성이 오늘에 이르러서도 도요단지를 이루고 찬연히 빛나고 있는 것이다.
  옛부터 도자기 문화를 접하여 오던 우리나라는 고려 때에 와서 도자기의 기술이 잘 발달되어 청자, 백자, 천목(天目)등의 작품들이 만들어 졌으며 이조의 도자기는 고려의 것을 계승한 것이라고 한다.

  고려의 자기는 형태가 단정, 정묘한데 비해 이조의 자기는 소박하고 순박하고 자연스러움을 특징으로서 중국의 영향을 하나도 받지 않은 독특한 형태의 작품이라고 한다.



선사유물도 출토된 곳
  이와 같이 우리의 삶과 역사와 맥을 함께 이어온 도자기는 흙과 불과 도공의 정성이 깃든 섬세한 손길의 삼합이 맞아 이루어진 변화 무궁한 공예품의 극치이다. 흙은 살이 되고 유약은 우아한 색이 되어 도공의 영혼이 불길을 타고 그 작품에 스며들 때 과학적으로도 설명될 수 없는 오묘하고 신비한 아름다움의 멋이 창출되는 것이다. 그 아름답고 다양한 도자기를 만드는 곳이 여주에는 북내면 오학리, 현암리, 청송리 일대에 도요단지를 이루고 있다.
  선사시대의 유적지인 여주군 점동면 흔암리 뒷산과 여주읍 용은리에서 무문토기등 선사시대의 유물이 다양하게 출토됨을 들어 이곳 여주가 도자기의 본고장이라는 것을 뒷받침 해주고 있다. 입지적, 지형적, 토지적 여건으로 볼 때 여주는 도자기의 주원료인 점토와 백토가 북내면 싸리산에 많이 매장되어 있고 능서면은 점토층이 남한강을 중심으로 이어져 있고 여주의 물토가 유약의 원료로 풍부하기 때문에 좋은 도자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한다.



역사적 인물이 즐비
  그런가 하면 여주에는 사대부 집안이 많고 대를 이어 산다고 “택리지”에 기록되어 있듯이 역사적 인물이 많다. 이를 살펴보면 고려 원종의 비 순경태후를 필두로하여 세종대왕의 어머니 원경왕후, 인현왕후, 정순왕후, 순조의 생모 현목수빈 박씨, 고종의 어머니 부대부인 민씨, 명성왕후, 순명효왕후 등 여덟 분의 왕후가 여주의 어머니 상으로 맥을 잇고 있다.
  한편 이에 대해 여주의 지기(地氣)는 새로움을 잉태하여 자아내는 어머니적 기운이 강하다고 한다. 또한 조선후기의 세도가였던 안동 김씨의 집안이 이곳 토호였고 명성왕후를 배출한 여흥민씨의 집안이 이곳 토박이 집안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개화파의 주요인물로 우정국(우체국)을 창성한 홍영식 선생이 태어나신 곳이기도 하다. 그는 현실과 타협하기 보다는 열강의 세력다툼 속에 있던 조선 말기에 자주독립을 갈구했으며 “사대배척”과 “백성을 위한 개척”을 주장했던 그의 깊은 마음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가슴을 뭉클케 한다. 이렇듯 여주는 사대부의 집안이 많아 벼슬길 또는 과거급제의 꿈을 갖고 학문을 연마하며 살던 고장이었던 것이다.



선인(先人)들의 얼 담긴 곳
  문화유산이 많은 고장이기도 한 여주에는 독창적이고 과학적인 우리나라의 글 『훈민정음』을 만드신 세종대왕과 왕비 소헌왕후를 합장한 영릉(英陵)과 북벌정책의 뜻을 품었던 효종대왕과 왕비 인선왕후의 능인 영능(寧陵)이 있어 후세들에게 선인들의 높은 뜻과 넋이 전해지고 있다.

  또한 남한강을 옆으로 하여 신륵사가 있다. 신륵사는 신라시대에 창건한 천년의 사찰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깊은 산속이 아닌 남한강의 푸른 물줄기와 드넓은 모래펄을 바라보며 자리잡고 있어 경관이 매우 아름답다. 사찰내에는 대웅전이 없고 이 반면에 미륵신전이 있다. 이 미륵신전은 특이하고 유일하게 우리나라 사찰 중에서 찾아볼 수 없는 따집으로 하여 입불로서 본불과 보조불을 모셔 놓았으며, 머리가 없는 용(龍) 즉 하반신 부분만으로 따집을 보호하는 형상으로 있으며 앞으로 용의 상반신으로만 따집을 보호하는 형태로의 사찰이 창건되면 새로운 세계 <극락세계>가 도래 된다는 야담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리고 북과 종이 한 곳에 나란히 안치되어 있으며 그 형상은 음과 양 즉 “남자와 여자”가 누워있는 형태라고도 한다.



산천경관 빼어난 곳
  여주읍에서 여주교를 건너 동편으로 약 1km에 위치한 신륵사는 충주의 월악으로 시작하여 흐르는 물이 오대산의 물과 합하여 흐르다가 여주에 이르러 남한강 상류에 붙은 봉미산 끝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 신륵사는 신라때 원효대사가 개창하였다고 전해지며, 고려 제32대 우왕때 중창하고, 조선 제9대 성종때에 영능(英陵)의 원찰로서 체모를 갖추기 위하여 대대적으로 확장 중수 하였다고 한다. 그 개창의 유래가 깊어 전하는 이야기도 많은데 사찰의 명칭을 신륵사라 칭한 것은 앞으로 사멸에 빠진 모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오실 새로운 미륵불을 모시는 곳이라 해서, 신륵사라 칭하였다는 설도 있다.

  그것을 뒷받침 해주는 것은 신륵사에는 대웅전이 없고 미륵신전이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무학대사의 스승인 나옹화상과 고려말 대학자 목은 이색이 입적한 곳이라는 설도 있다. 나옹화상이 꽂은 지팡이에 싹이 나와 거목이 되었다는 은행나무(약6백년 추정)와 무학대사가 그의 스승 나옹화상을 추모하기 위해 심은 것이라는 조사당앞 향나무 등 역사적 사실과 불교에 관련된 유물이(보물 7점) 많아 우리나라의 유수한 가람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곳곳에 사적지 널려
  또한 북내면 상교리에는 신라 후기에서 고려초기쯤의 작품으로 고달사터에 남아있는 지부도(탑)가 있다. 부도로서는 탑 전체의 미려함과 세부조각이 섬세 화려하여 우리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부도로 알려져 있다. 지대석 4개의 돌을 8각으로 배치하고 기단에는 연꽃무늬를 조각 하였으며 그 위에는 네마리의 용이 두발로 버티고 서서 여의주를 물려는 모습으로 서 있고, 머리가 남다르게 거북이의 형태로 새겨져 있는 8각 모양의 부도로, 관심을 가지고 보는 이로 하여금 오묘한 이치를 자아낸다. 높이는 3.4m 이고 상대갑석에는 연꽃무늬로 받쳤고 8면 탑신 중 4면에는 보살상이 새겨져 있다.
  이에 대해 신라시대의 문화를 알 수 있는 사적지로 평가 받고 있으며 대신면 천서리에 있는 파사성과 이포면 금사에 있는 술천성 역시 고고학자들에게 깊은 관심을 갖게 하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천연기념물로는 제209호로 지정된 백로와 왜가리가 여주읍에서 동북방으로 약 9km거리에 있는 북내면 신접리에 서식하고 있다.


                  

어디든지 명당자리
  예로부터 마을에 백로나 왜가리가 찾아 들면 부자마을이 된다는 전설에 따르듯, 신접리는 여주 군내에서 부자마을로 소문난 곳이다. 이곳에 백로, 왜가리가 처음 날아온 것은 약 60여년전이고 먼저 황새 한 쌍이 날아왔는데 다음해에 날아든 왜가리 5쌍이 황새를 괴롭혀 떠나 보낸 뒤 차츰 왜가리와 백로의 보금자리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농경의식의 하나로 옛풍정 그윽한 여주 흔암리 “쌍룡거줄 다리기”가 전승되고 있다. 서무산을 중심으로 열두 동네가 옛날 포우였다고 한다. 그 전래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흔암리가 우리나라 오대선사 문화고장지중 한 곳이고 보면 흔암리 “쌍룡거줄 다리기”는 쾌나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외에도 여주에는 서희장군의 묘, 이완장군의 묘, 기천 홍명하 선생의 신도비외 8기(基)가 있고 우암 송시열 선생이 학문을 강론하던 강한사 또는 대로사 외 3개의 서원이 있다.
  여주의 지명은 다른 곳에 비해 특히 하다고 한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문막, 모두막골, 강천리, 도전리, 가정리, 지내리, 이호리, 가야리, 신접리, 상교리, 금당교, 삿갓봉, 봉미산, 대신의 우두산, 홍천의 천덕산 등이 있다.



수도장 자리도 빼어나
  이렇듯 여주는 예로부터 너무나 유명한 곳이다.

  훈민정음의 뜻이 서린 슬기의 고장이요, 북벌의 칼을 갈던 효종대왕 등의 얼이 서린 인걸의 고장이요, 우정국을 창성한 개화파의 홍영식 선생과 같은 선각자의 고장이요, 8왕후들과 같은 어머니적 자비로움과 포근함을 안겨주는 고장이요, 지기적인 위치로 새로움을 잉태하고 자아내는 고장이요. 예술의 극치와 완성된 결실을 이루는 도공들의 고장이다.

  또 이제는 우리들의 종단 대순진리회의 수도장이 자리잡게 되어 여주의 또 다른 자랑거리가 되었다. 이 글을 쓰는 순간 문득 떠오르는 속담의 한 귀절이 있어 적어 본다. 바로 “구슬도 꿰어야 보배다.” 라는 말이다. 너무나도 부족한 역사적 기록과 자료의 글이었지만, 수도인 여러분들에게는 귀중한 보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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