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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16년(1986)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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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 이마두, 서양 문운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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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두, 서양 문운을 열다


天主를 전하고 마음을 배우다
동서문명 교류의 주역
  

대순종교문화연구소 제공



동양에 오다


   서양인 이마두(利瑪竇). 동양에 와서 지상천국을 세우려 하였으되, 오랫동안 뿌리를 박은 유교의 폐습으로 쉽사리 개혁할 수 없어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도다. 다만 천상과 지하의 경계를 개방하여 제각기의 지역을 지켜 서로 넘나들지 못하던 신명을 서로 왕래케 하고, 그가 사후에 동양의 문명신(文明神)을 거느리고 서양에 가서 문운(文運)을 열었느니라. 이로부터 지하 신은 천상의 모든 묘법을 본받아 인세(人世: 편집자주)에 그것을 베풀었노라. 서양의 모든 문물은 천국의 모형을 본딴 것이니라…』 (교운 19).
  전경에 보이는 이마두, 그는 과연 누구인가. 본명은 마테오릿치(마테오는 세례명. 한자 이름 利瑪竇 또는 利西泰)이다.

  그는 1552년에 이탈리아에서 탄생 예수회(耶蘇會)대학에서 수학한 수사(修士)로 인도 마카오지나의 남부를 거쳐 중국 대륙으로 들어가 1610년 오십 팔세를 일기로 북경에서 사망했다. 당시 예수회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의 신앙 속에서 살고 그 신앙 속에서 이탈하지 말아야 한다.는 목표 아래 해외 포교 운동을 펼쳤다. 이 운동의 일환으로 이마두는 포교를 위하여 인도 - 마카오 - 남지나 - 북경으로 옮기면서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을 중국 땅에 옮겼다.
  이마두는 이십 세(1572)때부터 만 7년 동안 예수회의 대학에서, 유명한 독일 역학자(曆學者)로부터 역학을 비롯하여, 역사학, 어학, 인문학 등 다방면에 걸쳐 지식을 습득하였다. 이 지식이 지나(之那 中國을 지칭)에 있을 때 지나인들의 호기심을 크게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승려복을 입다.


   이십 팔세 때 인도로 건너가 사년동안 인도인들을 하나의 신앙에로 뭉치게 하는 운동에 몸을 던졌으나, 예수회가 생각하는 하나의 신앙만을 그들에게 강요할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서양 문명 속에서만 자란 그리스도교를 강요할 수가 없고, 유럽 세계와 구별하여 형제의 사랑을 심어 주어야 합니다고 예수회 총회장에게 서신으로 호소하였다. 여기에서 그의 외유내강한 성격을 엿볼 수가 있는데, 그는 이 성격을 어디에서나 발휘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인도를 떠나 마카오로 옮기게 되었고, 이곳에서 중국의 훌륭한 문물과 인심을 동경하여 배운다는 자세를 갖추고 중국으로 들어갈 계획을 진행시키게 되었다. 우여곡절을 겪은 후에 그는 광동의 관리를 만나게 된 자리에서 지나의 좋은 정치의 명성에 끌려 마카오 상인들과 속인들의 시끄러움을 피하여, 내륙에 조그만 집과 절을 세워 일생을 살며 보내고 싶습니다. 의식주에 조금도 수고를 끼치지 않겠습니다. 저는 천축(天竺=佛敎)에서 왔습니다. 허가를 해 주십시오라 간청하여 조경(肇慶)에 거주하게 되었다. 그는 승려의 복장을 하고 있었고, 이 복장이 신부의 복장과 다를 바가 없다고 스스로 확신하고 있었다.
  조경의 마을사람들이나, 관리들은 높이 이백척의 구층탑인 숭희탑(崇禧塔)근처에 마련된 서양풍 건물, 그 건물에 걸려 있는 서양풍의 그림 등에 호기심을 나타냈다. 특히 서양인 얼굴을 보려는 사람들이 집 주변에 매일같이 운집하였다. 이런 속에서 그는 붓글씨를 익히고, 예의를 배우면서 모범을 보이기 위해 생활을 조용히 보냈다. 이러자 마리아상 앞에 중국식 절을 하는 사람들이 생기게 되었는데, 그들의 입을 통해서 그곳(서양)신이 여자라는 소문이 확 퍼졌다. 당황한 나머지 마리아상을 예수의 초상으로 대체하였다. 이때 천주(天主)란 말이 생기게 되었는데, 릿치를 따르던 선량하고 양식(良識)있는 진이란 소년이 자기 집에 붓글씨로 천주(天主)라 쓴 목판(木版)을 안방 벽 복판에 걸어 놓고 모셨다. 즉 그 소년은 릿치가 예수를 설명할 때에 발음하였던 데우수(라전어로 신())티엥슈로 받아들인 것이다. 티엥슈를 한자로 쓰면 天主가 된다. 중국발음에서는 []음이 []가 되는 데에도 그 원인이 있다고 한다. 그러니 천주(天主)는 이탈리아의 띠이오(dio)를 그 내용으로 삼고 있다 할 것이다.
  조경에서의 또 하나의 업적은 한자로 십계명을 적은 것이다. 말하자면 서양어로 된 교리가 한문화된 것이다.

  祖傳天主十誡
. 要誠心奉敬一位天主 不可祭拜別等神像
. 勿呼請天主 而虛發誓願
. 當禮拜之日禁止工夫謁寺誦經禮拜天主
. 當孝親敬長
. 莫亂法殺人
. 莫行滔邪穢等事
. 戒倫益諸情
. 戒讒謗是非
. 戒戀莫他人妻子
. 莫眉貪非義賤物
右誡十條係古時天主親書 降令普世遵守順者則升天
堂受福逆者則隨地獄加刑 


 
   이 십계와 서양말로써의 그것과 일치하는지 알 수 없지만 혼합된 그 무엇만을 남긴 것이다. 그가 세운 교회의 이름도 동양의 절 이름처럼 천화사(遷花寺)(서내청사:西來淸士)라 하였다. 천국과 정토도 일치하지 않을 뿐더러 교회가 절로 비쳤을 런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천주실록(天主實錄 1584년간 다른 修士가 쓴 것. 이마두가 쓴 것은 天主實義 1603년간)은 서문에서 嘗謂五常之序. 惟仁義爲最先, 故五倫之內, 以君親爲至重, 受於父母. 爲人子之報父母者. 皆出於良知良能. 不待學而自然親受者也라 써서 천주 신앙이 마치 유교나 선도(仙道)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내세웠다. 양지(良知) 운운한 것은 도가 풍이고, 부모 운운한 것은 유교의 효경(孝經)에 있는 사상이다. 이러므로 유교의 폐습을 쉽사리 개혁하지 못했다고 상제께서 지적하신 것이다.
  조경에 머물고 있는 동안 이마두는 산해흥지전도(山海興地全圖)를 만들어 천문지리만을 알고 있던 지나(支那) 사람에게 지리학(地理學)을 알렸다. 지나는 정방형에 가깝고, 북위 이십 삼도에서 오십도, 경도로는 백 이십도에서 백 삼십도에 위치한 크기에서 첫째로 뽑힐 나라이고, 수향풍물(水鄕風物) 지대물박(地大物博)하다고 지나를 소개하고 있다.
  육 년 동안의 조경체재를 청산하고, 1569년에 서서히 북상하기 시작했다. 북상 도중에 소주(韶州)에 들렀다. 이곳에서 도적을 만나 지나인들의 도벽을 알았다. 이곳에서도 충실한 친구 구태소(瞿太素)를 얻었다. 태소는 릿치에게 수은(水銀)에서 은()을 뽑아내는 기술을 청하기도 하였으며, 서양의 수학(數學)과 과학의 지식을 습득했다. 태소는 연금술에 능통했었다. 그러나 그것과는 다른 유럽의 자연과학, 유크릿트기하학을 지나어로 번역했다. 그로 인해서 태소는 나중에 여러 종류의 태양시계를 만드는 법과 높이, 길이를 재는 측량방법도 습득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컴파스, 운천의(惲天儀), 천문관측기, 상양의(像陽儀), 시계, 나침판 등을 나무, 유기 혹은 은을 써서 만들었다.
  이마두에게 있어서는 종교와 과학이 분리되지 않은 하나였음을 알 수가 있다. 전경선도 불도 유도와 서도(西道=천주교(天主敎))는 세계 각 족속의 문화의 바탕이 되었나니…』 (교운 165)라 하여 상제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이것 역시 문명의 뿌리가 종교에 있고, 문명과 종교가 갈라지는 것이 아님을 일깨워 주고 있다


    
유복(儒服)으로 바꾸어 입다.


   지나의 남부에서 활동을 끝내고 이제 북상(北上)하기에 분주했다. 이마두는 승복(僧服)을 유복(儒服)으로 바꿔 입게 되었다. 그것은 천주교의 입장이 불교의 입장보다는 유교에 가깝다는 지식에 도달하여, 유교와 친해진다는 태도에 기인된 것이었다. 유복을 입은 이마두의 과학과 종교에 대한 태도를 보자.
  1595416. 마카오에 도착해서 십 삼년이 되는 해에 북경을 향해 소주(韶州)를 떠났다. 북경에 처음으로 도착한 것은 15899월이었다. 삼년여 동안 지나의 각 도읍을 거쳤던 것이다. 그 중 중요한 도회지는 남창(南昌), 남웅(南雄), 남경(南京), 소주(韶州)등이었다. 어떤 곳에서는 쫓겨나 되돌아가야 할 때도 한 두번이 아니었다. 북경에서도 쫓겨나 되돌아가서 죽고 싶어했던 곳으로 가지 못하고 생애를 마쳐야 했다.
  유복으로 바꿔입은 이마두는 유학으로 접근하려고 했다. 릿치는 한문으로 교우론(交友論)을 써서 동양 사람을 놀라게 하고, 고전인 논어(論語)의 첫머리에 있는 친구가 원방(遠方)에서 오니, 어찌 즐겁지 않으리요.의 구절에서 교우론에 삼우를 언급하였다. 삼우도 논어의 익자삼우에서 딴 것이다. 이 익자삼우는 상제께서 쓰신 현무경 속에도 익자삼우 손자삼우가 나온다. 릿치는 익자에 세 친구, 손자에 세 친구가 있다. 多聞을 벗으로 삼는 것이 익()이고, 변벽(便辟: 마음만 앞세움)을 벗으로 삼는 것은 손()이다.고 말한다. 이래서 그는 지나의 사서오경(四書五經)은 예수교 이전 서양인들의 최고 작자의 글과 같다고 보고, 세례를 받진 않았지만, 현자(賢者)로서, 지옥에 떨어지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릿치는 도덕적으로는 그러하였으나 종교적으로는 달랐다. 토론의 여지를 지나인들에게 남겨 놓았다. 그것은 불교와 도교를 우상숭배로 몰고, 유교를 칭찬하면서도, 공자를 그는 내세(來世)를 모르고, 전적으로 이 세상을 잘 되게 하는 법()에 관해서만 말하고 왕국을 평화 속에 통치 유지하려는 법을 가르치기만 했다.고 비판했다. 이 주장이 지나인들의 마음에 걸린 것이다.
  우상숭배로 가리킨 것은 천지와 모든 창조물의 주인인 천주(天主)를 인정하지 않는 것과 이성(理性)을 등한시하는 사고방식을 말한다.릿치는 삼회(三淮), 화상(和常)과의 토론에서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은 태양이나 달이 아니고, 그것은 그것들의 상()이고, 상은 먼저 진짜 태양이나 달을 보지 않고는 만들 수도 상상할 수도 없다.고 말한다. 이에 화상은 천주는 무엇을 먼저 보고 만들어진 상인가고 묻는다. 그 결말은 지어지 않았으나, 화상이 이성(理性)적인 사고방식을 배웠고 릿치는 천지의 작자(作者)를 인간의 마음속에 그린다는 사실을 배웠다. 이로써 서로가 넘나들지 못했던 신명의 왕래를 틔웠다. 또 릿치는 사서오경, 사고전서 등을 서양말로 옮겨 후에 서양에 전하게 함으로써 동양 문명신을 서양에 옮겼다. 이마두는 명나라 남부지방에서 임진왜란에 동원되는 명나라 증원군의 동원상태도 목격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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