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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16년(1986)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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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의 생애와 사상 : 오룡허풍에 천지대도를 여시다.

오룡허풍에 천지대도를 여시다.


   

 교무부(敎務部)제공


  을미년 봄, 유생들의 두승산 시회에 참석하신 상제님께서는 한 노인으로부터 조용한 곳으로 안내되어 책 한 권을 받으셨다. 2년 후인 정유년에 상제님께서는 처남 정남기 집에 글방을 차리시고 유불선음양참위를 통독하신 후 세상을 널리 구할 뜻을 품으시고 인심과 속정을 살피시고자 주유의 길을 오르셨다.

  익산군 이리를 거쳐 띠울(茅村)에서 김일부를 만나시니 그는 상제님께 요운(曜雲)이라는 호을 드리고 매우 공경하였다.

  일부는 본명을 항(恒)이라 하며, 연담의 문하생으로 주역에 밝아 후에 정역을 주창하게 된다. 영가무도(詠歌舞跳)의 교법을 문도에게 펼치고 있던 어느 날 일부는 꿈을 꾸게 되었다. 그 꿈속에서 강사옥과 함께 옥경에 오르라는 천존의 명하심을 한 사자로부터 받고 함께 옥경에 올랐을 때에 천존께서 사옥의 광구천하의 뜻을 크게 상찬하고 극히 우대함을 보고 이상히 생각하던 중 상제님의 방문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사옥은 상제님의 자)

  상제님께서는 이곳에서 며칠 머무신 후, 경기, 황해, 평안, 함경, 경상도를 두루 유력하셨다. 주유하시던 중, 전주부에서는 신인(神人)으로 경대받으시기도 하셨고 함열(咸悅)에 이르셔서 만인함열(萬人咸悅)이라 하시며 기뻐하셨다.

  주유를 마치시고 객망리로 돌아오시니 그 때가 세수 30 이 되시던 해인 경자년이었다. 류서구의 보좌로 시루산에 있는 조모님의 묘를 면례하셨고, 그 후 시루산에 오르시어 공부에 전념하셨다. 호둔(虎遁)하고 계시는 상제님, 산밑의 샘터너머에서 우시는 상제님이 목격되기도 하였다.

  때로는 유덕안(柳德安)의 집에 오셔서 쥐눈이콩과 냉수를 드시기도 하셨고, 덕안의 아들 칠룡에게 「네가 나에게 살려달라고 애걸하는구나」 하고 말씀도 하셨다. 어떤 때는 산천이 울리도록 큰 소리를 지르시어 마을 사람들이 두려움을 느끼기도 했다. 상제님께서 공부하신다는 소문이 고부 경무청에까지 알려져 순검들이 상제님께서 요술 공부를 한다 하여 잡으러 왔으나 그때마다 삿갓을 쓰시고 길에 나가 안개를 짓고 앉아계시니 순검들이 몰라보고 지나치곤 하였다. 진법주를 외우시고, 48장, 28장 공사를 보신 후, 어느날 목에 붉은 수건을 두르시고 쌍정리 김기진의 집에 가셔서 여러 사람들에게 공사에 관하여 말씀하셨다.

  공부를 계속하시던 신축년 5월 중순부터 전주 모악산 대원사에서 불음불식의 공부를 시작하셨다. 5월이 지나 본격적인 여름으로 들어서게 되니 그야말로 가슴까지 숨이 차는 푹푹삼는 날씨가 계속되었다. 6월도 지나 7월에 접어들었으나 아직도 늦더위가 계속되었다. 초조히 기다리던 주지 금곡이 인기척이 있어 달려가니 그 날이 바로 상제님께서 불음불식하시며 공부하신지 49일째 되는, 신축년 7월 5일 마침내 오룡허풍에 천지대도를 열으셨던 것이다. 「나는 곧 금산미륵이라. 금산사 미륵전에 육장금신은 여의주를 손에 받았으나 나는 입에 물었노라」, 「내가 천지공사를 맡고자 함이 아니라 천지신명이 모여 상제가 아니시면 천지를 바로잡을 수가 없다 하므로 괴롭기 한량없으나 어찌할 수 없이 맡게 되었노라」고 이르시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시니 골짜기의 새와 짐승까지도 모두 모여 후천 해원을 구하는 듯 머리를 조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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