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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22년(1992)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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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절후 신명이야기 : 대한(大寒)절후를 맡은 두여회(杜如晦)

대한(大寒)절후를 맡은 두여회(杜如晦)

 

          

<出典 舊唐書 卷 66>

 

  두여회(杜如晦)의 자는 극명(克明)이고 경조(京兆) 두릉(杜陵)사람이다. 할아버지인 과(果)는 북주(北周)와 수(隋)대에 이름을 날렸다.

  여회(如晦)는 어려서부터 영민하고 책읽기를 좋아하여 풍류(風流)로써 스스로의 업을 삼았고, 안으로는 큰 절개를 지녔으며 기회에 임해서는 용단을 내릴 줄 알았다.

  수(隋)의 대업(大業)중에 이부(吏部)의 선발에 응모하였는데, 시랑(侍郞)인 고효기(高孝基)가 그를 비범하게 여겨 『그대는 마땅히 국가의 큰 재목이 될 터이니, 부디 밝은 덕을 잘 보존하시오.』라고 말했다. 나중에 부양(釜陽)의 관리를 돕기 위하여 이부의 관직을 버리고 떠나갔다.

 

▲ 두여회에 관한 『구당서』기록

 

 

  고조(高祖)가 수도를 정비하는데 진왕(秦王)이 여회(如晦)를 데려다 부병(府兵)의 조참군(曺參軍)으로 임명했고, 이어서 섬주 총관부(總管部)의 장사(長史)로 옮기었다.

  이때에 부(府)에 속한 사람들 중에 외지(外地)로 옮겨가는 자가 많으니, 왕이 이를 염려했다. 그러자 방현령(房玄齡)이 말하길, 『떠나는 자가 아무리 많더라도 아까워하실 것 없습니다. 바로 여회(如晦)만이 왕을 보좌할 재목이니까요, 대왕께서 만일 변방을 지키는 일로 평생을 마치시려 하신다면 달리 할 일이 없으시겠지만, 천하를 지배코자 하신다면 여회를 버리고 누구와 더불어 공을 세우시겠습니까?』왕이 놀라서 답하기를 『그대가 말해 주지 않는다면 나는 그를 놓칠 뻔하였구나.』라고 하고는 이어서 여회(如晦)를 발탁하여 막부에 머물게 하였다.

  정벌하러 갈 때에는 항상 왕을 따랐고, 군중의 비밀 회당에도 늘 참여했다. 당시에 군중에는 일이 매우 많았는데 여회가 하나도 남김없이 다 잘 처리하니 군중의 사람들이 그를 인재로 여겼으며, 여회의 능력의 한계를 본 사람이 없었다. 섬동도(陝東道) 대행대(大行臺) 사훈랑중(司勳郞中)으로 봉해졌으며 문학관(文學館) 학사(學士)를 겸하게 되었다. 천책부(天策府)가 건립되자 그곳의 중랑(中郞)이 되었다.

  왕이 황태자가 되자 좌서자(左庶子)를 배수 받았고, 병부상서(兵部尙書)로 옮겨졌다가 채국공(蔡國公)으로 진급되니, 이 때에 식읍(食邑)이 삼천 호(戶)요, 별식이 익주(益洲) 천 삼백 호(戶)였다. 이윽고 시중(侍中)이 되었고 이부상서(吏部尙書)도 겸하였으며 동궁(東宮)의 병사를 총감독하였고, 상서를 우복사(右僕射)로 진급하였으며, 여전히 과거로 선발한 자들을 관리하였다.

  현령(玄齡)과 더불어 조정의 일을 보살피며 능력 있는 선비를 발탁하고 아래로는 불초한 자들에게도 다 직업을 주니 이때에 민심이 크게 후해졌다. 감찰어사(監察御使) 진사합(陳師合)이 「관리를 선발하는데 대한 논의(論議) 발사론(拔士論)」을 올려, 한 사람이 여러 개의 관직을 겸하지 못하도록 건의하면서, 은근히 여회 등을 비난했다. 그러자 황제가 말하기를 「현령이나 여회는 옛적의 공훈 때문에 진급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재능이 가히 더불어 천하를 다스릴 만함을 훌륭히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 사합(師合)은 이러한 글로 나와 신하간의 관계를 이간하는 것인가」라고 말하고 이에 사합을 영표(嶺表)로 평정했다.

  오랜 세월이 흘러 여회가 병으로 사직하게 되니, 황제가 명령을 내려 여회가 집으로 돌아가 쉬면서도 평상시의 봉급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의원과 안부를 묻는 관리들을 끊임없이 파견했다.

  병세가 더욱 악화되자 황태자로 하여금 문병 가도록 하고, 황제도 친히 여회의 집에 이르러 그를 위로함에 슬픔으로 목 메이었다.

  여회가 죽기 전에 황제는 그의 아들 좌천우(左千牛) 구(構)를 발탁하여 상사봉어(尙舍奉御)를 겸직하도록 하였다. 여회가 세상을 떠나니 그 때 나이 마흔 여섯이라 황제는 울며 애통해 했으며 그에게 개부의(開府儀) 동삼사(同三司) 벼슬을 내리고 장사 지냄에 이르러 다시 사공(司空)벼슬을 내리고 시호를 성(成)이라 했다.

  황제가 손수 우세남(虞世南)으로 하여금 비문(碑文)을 써서 군신(君臣)의 애도하는 뜻을 전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후일에 황제가 참외를 먹다가 그 맛이 특별히 훌륭하자, 먹던 것을 멈추고 그 참외의 나머지 반을 여회의 제단에 받치도록 한 적도 있었다.

  또 한번은 현령(玄齡)에게 황은(黃銀)으로 만든 띠를 하사하다가, 문득 「여회가 그대와 더불어 짐을 보좌하더니만, 이제 여회의 모습은 볼 수 없구려」라고 말하고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전하는 말에 황은(黃銀)은 귀신들이 무서워 한다지」라고 하고는 금으로 띠를 만들어 현령으로 하여금 여회(如晦)의 집에 그것을 보내도록 했다.

  후일에 홀연히 꿈속에서 여회를 보고는 이튿날 현령(玄齡)에게 그 사실을 말하며, 황제가 먹는 음식을 내려 여회(如晦)의 제사에 쓰도록 했다. 그 다음해의 제삿날 상궁을 보내어 여회의 처자(妻子)를 위로토록 하니, 국부관좌(國府官佐) 또한 그 제사를 멈추지 않았으며, 황제의 은혜 또한 줄어들지 않았다. 후일에 공훈 있는 신하들은 그 벼슬을 세습토록 명령을 내리면서 여회에게도 소급하여 다시 밀주자사(密州刺史)를 내리고 봉국(封國)을 래(來)로 옮겼다.

  바야흐로 여회(如晦)가 재상으로 있을 때에 천하는 막 평정된 상태였는데 내각제도(內閣制度)와 문물(文物), 전장(典章)들을 현령과 여회 두 사람이 모두 의논하여 결정했었다.

  매번 현령은 반드시 「여회가 오기 전에는 결정을 내릴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곤 했는데, 여회가 와서 끝내는 현령의 책략이 채택되곤 했으니 이는 여회는 결단력에 있어서 훌륭하고 현령은 일을 도모하는데 있어서 훌륭했기 때문이었다.

  여회와 현령 두 사람은 서로를 깊이 이해했고, 그래서 일을 도모하는데도 마음을 합해 잘 결정하여 황제를 보좌할 수 있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을 훌륭한 재상을 말할 때에는 반드시 방현령과 두여회를 칭하곤 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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