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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22년(1992)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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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시론 : 現인류문제, 상제님의 無所不能하신 권능으로 해결해야

現인류문제,

상제님의 無所不能하신 권능으로 해결해야

      

전호덕 <교감ㆍ서울방면>

 

  세상에 댓가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 뜻한 바를 얻으려면 반드시 그에 대한 응분의 보상을 치루어야 한다. 주변의 일상생활을 둘러 보아도 사회에서의 대인관계는 물론이고 가정에서 물 한 방울 전등 하나를 사용하고자 해도 반드시 그에 상당하는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만일 누구라도 이러한 평범하고도 당연한 관례를 무시하게 되면 그 순간부터 그는 사회와 자연에 대한 권리행사에서 제외될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사회와 자연에 대해 행사하는 권리만큼 의무라고 하는 반대급부를 행해야만 되는 것이다.

  유사이래 인류가 걸어온 길을 돌이켜 이러한 논리를 확대 적용한다면, 인류가 누려온 그 모든 것들에 대하여 언젠가는- 이미 지불하고 있은 것도 있지만 – 필히 그 대가를 치루어야 할 것이다. 이는 인류역사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 하나의 진리라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흔히들 인류사회의 커다란 전환점이라고 하는 18세기 중엽의 산업혁명을 기점으로 하여 인류의 생활은 「발전」이라는 용어와 함께 말 그대로 물질의 풍요를 구가해 오고 있다.

  그러나 불길하게도 이러한 발전 일로의 여정에서 자주 세계 석학들의 입을 통해 「인류의 위기」라는 우울한 용어가 오르내리고 있다. 물론 이런 불길한 상황들이 초래되게 되는 배경에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복합적인 요인들이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인류가 이룩한 문명의 발전이란 주어진 인류의 환경으로부터 인류가 생존할 수 있느냐의 문제에 직면하여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과 투쟁의 소산이다. 

  또한 이러한 노력과 투쟁은 자연환경으로부터의 좀더 질 좋고 효율적인 에너지의 획득과 이로 인한 자원의 고갈과 환경파괴라는 일련의 과정으로 인식될 수 도 있다. 이러하다면 작금에 대두되고 있은 인류의 위기는 바로 이러한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파생되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연에 대한 인식은 동, 서양간에 있어서 커다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자연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동양은 자연을 유한한 존재를 인식하여 착취의 대상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인간이 자연 속에서 자연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방법을 모색하였다.

  즉 자연을 이용하되 자연이 스스로 재생, 순환할 수 있은 범위를 결코 벗어나지 아니하였다. 반면에 서양, 특히 기독교의 자연관은 자연을 무한한 것으로 인식하여 자연을 인간의 의지에 의한 수단으로 생각하고 착취의 대상으로 삼아왔다.

  이러한 동서양의 자연에 대한 뚜렷한 인식차이와 물질만능의 서구사조는 결과적으로 선천(先天)에서의 자연파괴와 자연의 고갈문제를 야기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제반상황은 근대에 이르러 노정(露呈)된 것이 아니라 인류역사의 시발과 함께 대두되었던 것으로, 단지 산업혁명 이후 근대 및 현대에 이르러 그 속도가 가속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심각성이 더하고 있는 것이다.

  그 예로 지난 40년 동안 미국이 소비한 자원의 양이 4천년 동안 인류가 소모했던 양과 맞먹는다고 한다. 실로 엄청난 양이며 커다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최근에 이르러 이러한 난제를 해결하고자 대체 에너지를 개발하고 있으나 이 또한 유한한 것으로서 궁극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물리학에서는 이를 열역학 제2의 법칙(일명 엔트로피법칙)이라 하여 인류는 사용 가능한 지구에너지의 고갈을 운명적으로 맞이할 수 밖에 없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지구자원은 유한하다는 것이다.

  실상이 이러하다면 이제는 지금까지 인식하여 왔던 「발전」의 개념 또한 재고 되어져야 할 것이다. 통상 경제적으로 부유한 나라는 상대적으로 빈곤한 나라에 대해 「발전」이라는 수식용어를 사용하여 우월감을 느껴왔다. 그러나 이러한 의미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자원의 소모와 고가를 동반하고 있으며, 이는 결국 인류멸망이라는 종착지로의 항진을 의미한다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하다면 단지 발전이란 명분으로 자행되는 더 이상의 무분별한 자연파괴는 지양되어져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인간과 자연은 정복과 피정복의 관계가 아닌 상호보완적 공생의 법칙을 유지하며 존속해 가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또 하나의 원한과 상극을 낳게 되며, 자연은 인류에 대해 보복하게 될 것이다.

  혹자는 「자연이 인류에게 보복할 수 있는 것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상제님을 신앙하고 있는 대순진리회의 수도인들은 다음의 구절을 상기해야 한다.

  『천지에 신명이 가득 차 있으니 비록 풀잎 하나라도 신이 떠나면 마를 것이며 흙 바른 벽이라도 신이 옮겨지면 무너지리라』(교법 3장 2절) 즉 우주의 삼라만상(森羅萬象)하나 하나에는 모두 신명이 깃들어 있다. 다시 말해 자연계조차도 지성과 이성을 구비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일찍이 「인간이 자연에 대한 경외감을 상실할 때 바로 자연재해가 닥친다.」라고 피력한 노자(老子)의 말은 이러한 상제님의 말씀과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물질문명의 선두주자로 달려온 서구인들은 자연을 인간과 조화의 대상이 아닌 정복의 대상으로 파악하고 자연에 대한 정복에서 인간의 위대함과 존귀함을 찾아 왔으며 이것을 지고(至高)의 가치로 삼아왔다. 이러한 서구인의 가치관과 그 결과에 대해 상제님께서는

  『- 그 문명은 물질에 치우쳐서 도리어 인류의 교만을 조장하고 마침내 천리를 흔들고 자연을 정복하려는 데서 모든 죄악을 끊임 없이 저질러 신도의 권위를 떨어뜨렸으므로 천도와 인사의 상도가 어겨지고 삼계가 혼란하여 도의 근원이 끊어지게 되니 원시의 모든 신성.불보살이 회집하여 인류와 신명계의 겁액을 구천에 하소연하므로 - 』(교운 1장 9절)라고 말씀하시어 다시 한번 인간의 자연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이로 인한 폐해에 대하여 경계하셨다.

  현재의 인류문명은 구조적으로 자원의 고갈을 가속화할 수 밖에 없으며 이것은 「인류멸망」이라는 시나리오의 서막과 직결되고 있다. 그러하다면 이러한 암울한 상황에서 벗어날 길은 없는 것인가. 여기에 바로 첨단 과학문명의 시대라고 하는 현대 인류의 고민과 심각성이 있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이란 무한한 것으로서 이를 인간이 자율적으로 억제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것이다. 설령 그것이 개별적, 부분적으로 가능하다고 하여도 그러한 의식변화가 인류 전체에 확산되어야 한다는 난점 또한 도사리고 있다.

  결론적으로 현재의 상황은 기존의 어떠한 종교, 윤리, 도덕 그리고 학술적 이론체계로서도 대응할 수 없다는 것이 인류의 불행인 것이다. 그렇다면 인류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천, 지, 인 삼계(三界)에 대한 기존의 모든 질서체계를 변혁시키는 이른바 「판 밖의 법」을 구하는 데서 모색되어질 수 있다. 인류를 구할 수 있는 법방과 이러한 법방을 무소불능하게 용사할 수 있은 권능, 또 이러한 권능을 소유한 절대자를 이 시대는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계와 이를 중심으로 운회하는 천계(天界), 지계(地界)의 선천운로를 변혁시킬 절대자의 강림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비추어 본다면 1871년 동토의 이 땅에서 이루어진 구천 상제님의 강세(降世)는 역사적 필연성이라는 측면에서 그 시사성이 매우 크다 할 것이다. 

  상극으로 인해 진멸지경(盡滅之境)에 처한 선천 인류에게 전무후무한 상생(相生)의 새로운 법방을 천명하시고, 아울러 인간 스스로의 정신개벽(精神開闢)을 홍포 하신 상제님의 진리야말로 현대의 암울한 터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법방 일 것이다.

  또한 선천의 자기 중심적인 인간욕망으로 인하여 단절의 위기에 처했던 인류역사를 후천선경이라는 새로운 장(場)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천지공사를 행하신 바, 이는 선천의 상극지리(相克之理)를 상생지도(相生之道)로 전환하여 궁극적으로 재겁에 빠진 천지인 삼계를 광구(廣求)하기 위한 일대 역사(役事)였다고 하겠다. 이와 같은 현대의 위기 상황에서 우리 수도인들은 상제님께서 강세하신 역사적 필연성을 다시 한번 직시 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광구천하 하고자 하신 상제님의 유지를 계승함과 동시에 화평의 세계인 후천선경을 이루기 위해 수도인들은 각자가 성, 경, 신을 다하여 실천수도에 진심갈력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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