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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22년(1992)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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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절후 신명이야기 : 입춘(立春)절후 관장하는 위징(魏徵)

입춘(立春)절후 관장하는 위징(魏徵)

            

              

           

  황제가 문태의 수행인 염달흘간에게 명하여 그들을 맞이하도록 하였는데, 위징이 말하길 『지난번에 문태가 입조(入朝)할 때에 가지고 온 공물은 제대로 다 갖추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또 서역의 여러 나라의 재물을 가지고 온다면 주 · 현(州 · 顯)의 공물이 적어서 죄 짓는 것을 막게 됩니다. 그들이 장사꾼으로서 온다면 변방 사람들이 이익을 보게 되며, 그들이 빈객으로 온다면 중국이 손해를 보게 됩니다. 한(漢)의 건무(建武)때에 서역 여러 나라들이 도호부(都護部)를 두고 신하를 보내줄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으니 그 까닭은 오랑캐가 중국을 피폐케 하지 못하게 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황제가 말하길 『그대 말이 옳다.』 이리하여 그 명령을 중지하였다.

  이 때에 황제가 즉위한지 4년이 되었는데 그 해에 사형으로 판결 받은 자가 스물 아홉 명이었다.

  거의 집행할 때가 다되어 이에 앞서 황제가 일찍이 탄식하여 말하길『지금은 천하의 큰 난리가 지나간 직후이니 백성들을 다스리기가 어렵지 않겠는가?』

  위징이 말하길『큰 난리를 다스리기 쉬움은 마치 배고픈 사람을 먹이기 쉬움과 같습니다.』

  황제가 말하였다. 『옛말에 일컫기를, 선한 자가 나라를 다스린 지 백년이 지나야지만 백성을 죽이게 되는 상황이 없게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위징이 말하길『그것은 성인(聖人)의 말씀이 아닙니다. 성인이 나라를 다스리면 백성의 호응함이 마치 메아리와 같이 한 달이면 평안해질 수 있사오니 어찌 어렵겠습니까?』

  봉덕이가 말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 · 은 · 주( 夏 · 殷 · 周) 삼대(三代) 이후에 나라의 기강이 날로 무너짐에 진(秦)나라 때에는 법률에 의거해 다스렸고, 한(漢)나라 때에는 패도(覇道)와 왕도(王道)를 섞어 다스렸으니, 이 모두를 다스리고자 했으니 할 수 없었던 것이지 다스릴 수 있는데 하고자 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위징은 서생(書生)이라 공론(空論)을 좋아하여 헛되이 나라를 어지럽히니, 그의 말을 들어서는 아니 되십니다.』

  위징이 말하였다. 『삼황(三皇) 오제(五帝)는 가르쳐서 백성들의 마음을 바꾼 것이 아닙니다. 황제(皇帝)의 도를 행하여 황제가 되신 것이고 왕(王)의 도를 행하여 왕이 되신 것이니, 이는 그들의 행한 바가 어떠한 가를 볼 따름인 것입니다. 황제가 치우(蚩尤)를 쫓아 버리는데 일흔 번을 싸워서 그를 이길 수 있었으며, 이로 인하여 무위(無爲)의 다스림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구려가 덕(德)을 해치는 정치를 하니 전욱이 그를 쳐서 이긴 후에야 잘 다스려질 수 있었습니다. 걸왕(桀王)이 폭정(暴政)을 하자 탕왕(湯王)이 그를 내 좇았고, 주왕이 무도(無道)하자 무왕(武王)이 그를 처벌했습니다. 이리하여 탕왕과 무왕 때에는 태평시대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만약 사람들의 기강이 점점 무너져 박실(撲實)함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지금은 이미 도깨비나 귀신처럼 되었을 것이니, 어찌 그들을 교화할 수 있겠습니까?』

  덕이는 반박하지 못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위징의 말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황제는 위징의 말을 받아들여 의심치 않았다. 이렇게 하여 천하가 잘 다스려지게 되었다.

  오랑캐의 우두머리들은 한족(寒族)처럼 의관(衣冠)을 착용하고 칼을 차고 나라를 지켰다.

  동쪽으로 바다 끝까지 남쪽으로 산 너머까지, 사람들은 대문을 잠그지 않았으며 여객들은 식량을 준비하지 않고도 도중에서 얻어 먹을 수 있었다.

  황제가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길『이것은 위징이 내게 인의(仁義)의 다스림을 행할 것을 권하여 그 효력이 나타난 것이다. 봉덕이에게 보여주지 못함이 애석하다.』위징은 얼마 안 있어 시중(侍中)의 직책을 맡았다가 작군궁(綽郡公)으로 승진하였다.

  황제가 구성궁(九成宮)에 행차하였는데 황제를 모시는 궁인(宮人)들은 위천(圍川)의 궁성아래 숙사를 정했다. 복야인 이정(李靖), 시중(侍中)인 왕규(王珪)가 잇달아 도착하자, 관리가 궁인들의 숙소를 다른 곳으로 옮기고 그곳에 이정과 왕규를 머물게 했다. 황제가 이 말을 듣고 노하여 말하길 『어찌하여 나의 궁인들을 경시하는가?』 그리하여 모두 문책하도록 명령했다.

  위징이 말하길『이정과 왕규는 모두 폐하의 심복대신(心腹大臣)이고, 궁인들은 단지 후궁을 청소하는 시종일 따름입니다. 대신들이 출정하면 궁성의 관리는 조정의 법식을 따라야 하고, 그들이 돌아오면 폐하께서는 그들의 노고를 위로하셔야 합니다. 무릇 관사(官舍)에서는 이정 등이 이르러면 관리는 응당 그들에게 예의를 갖춰 대접해야 하며, 궁인들은 이와는 달리 음식을 올리는 등의 일 이외에는 관여치 못합니다. 이와 같은 일로써 문책하시면 천하 사람들의 이목(耳目)을 놀라게 하시는 일이 됩니다.』황제가 깨닫고 다시는 문책하지 않았다.

  후에 단소루(丹宵樓)에서 연회를 하는데 황제가 술을 마시면서 장손무기(長孫無忌)에게 말하였다.『위징과 왕규가 은태자와 소왕을 섬길 때에는 정말 미웠는데, 내가 원망함을 버리고 그들을 등용했으니 고인(故人)에게 부끄럽지 않도다. 그런데 매번 위징이 간언 할 때마다 나는 그의 말을 따르지 않고 내가 발언을 하면 위징 또한 곧바로 응수하지 않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위징이 말하였다. 『저는 일의 옳지 못함이 있었기 때문에 간언 한 것입니다. 만약 마음으로는 옳지 않다고 여기면서 폐하의 말씀에 응한다면 폐하께서 곧 행동에 옮기실까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황제가 말하길『공손한 마음을 가진다면 나의 말에 응하고, 마음속으로는 따르지 않는 것은 다른 방법으로 진언(進言)하면 되지 않겠는가?』 위징이 말하길『너희들은 내 앞에서는 따르면서 물러나서 뒷말을 해서는 안 된다.』만약에 폐하의 앞에서는 따르면서 달리 진언을 하는 것은 바로 순임금이 말한 뒷말인 것입니다. 이것은 직(稷)과 우(禹)가 요임금과 순임금을 받든 것과는 같지 않습니다.

  황제가 크게 웃으면서 말하였다. 『사람들은 위징의 태도가 매우 버릇없다고 하지만, 나는 그가 매우 기특하게만 여겨진다.』위징이 거듭 절하며 말하였다. 『폐하께서 저로 하여금 말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기 때문에 감히 이럴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폐하께서 받아들여 주시지 않으면 제가 감히 이렇게 여러 번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정관(貞觀) 7년에 위징은 시중(侍中)으로 있었는데, 상서성(尙書省)의 아직 해결되지 않은 형사문제들을 처리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위징은 평소에 법률에 익숙치 않았지만 일반적인 상식만으로 상황에 맞게 일을 처리하니 사람들마다 탄복하여 따랐다.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 정국공(鄭國公)으로 승진하였다.

  병이 많아 사직하려 하니 황제가 말하길『그대는 금(金)이 광산에 있으면 귀하지 않다는 것을 모르는가? 그 금을 잘 단련해서 용기(容器)를 만들어야만 사람들이 그것을 귀중하게 여긴다. 짐은 방금 나 스스로를 금에 비유하였으니, 그대를 뛰어난 대장장이로 삼아 연금(鍊金)하려 한다. 그대는 비록 몸이 편치 않으나 아직 노쇠하지는 않았으니, 어찌 그대의 편의를 보아줄 수 있겠는가?』위징은 간청하였고 거듭 거절 당했으나 뜻은 더욱 굳어졌다.

  이에 특진으로 배수 받고 문하성의 일을 관장했으며, 나라의 전장(典章)을 제정하는 데에 관여하여 그 득실을 의논하고 봉록, 관직, 국방 등의 문제를 처리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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