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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22년(1992)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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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논단 : 대순사상 태동의 종교문화적 배경

大巡思想 태동의 종교문화적 배경

亂世救援위해 민중待望속 출현

 

                 

박병국 <보정ㆍ합덕6방면>

              

서언

  대순사상이 출현할 당시의 제사회상은 어느 특정분야를 예로 들어 설명하지 않더라도 세기말적 병폐가 모두 노출된 혼란기였다.

  사회의 가치기준이 모호하여 그 비판의 서열이 일정하지 아니할 때 기층의 민중들은 신념체계의 재확립을 요구하며 새로운 가치체계를 모색하게 된다. 이러한 민중의식이 고조되었을 때 선보인 대순사상은 회의와 절망에 빠진 당시의 민중들에게 그 치유책을 제시하면서 그들의 피부에 점점 가까이 하게 되었다.

  이렇게 성립된 대순사상의 배경을 종교ㆍ문화적(文化的) 측면에서 알아보기로 하겠다.

 

  

난세에 처한 조선 末

  19세기말의 조선사회를 뒤흔든 혼란은 문화적 측면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동학의 실패는 새로운 가치관과 지도이념을 요구했던 민중들에게 신종교로서의 매력과 기대 그 자체마저도 회의스럽게 만들었다. 원래 동학혁명은 고대로 전하여 오던 「궁을」과 「진인」사상을 동학군의 전쟁 의욕을 북돋우기 위해 전용하였으며, 동학의 선두주자였던 고부 사람 전봉준은 동학군들 사이에서는 「진인」으로 믿어졌었다.

  그러므로 일반 민중의 동학 혁명군에 대한 신뢰는 지대했었다.

  그러나 동학혁명이 실패로 돌아가고 전봉준이 체포되자 민중들의 동학에 대한 기대와 신뢰는 회의와 허탈감으로 바뀌었다.

  여기에 쇄국정책의 실패에 의한 문호개방과 본격적으로 유입되는 서구문화는 국내의 전통문화와 심각한 갈등현상을 일으켰다.

  이러한 갑작스런 문호개방으로 문화충격에 시달리던 일반 민중들은 급기야 외국과 외국인에 대해서 혐오와 저주를 가져다주게 했다.

  이러한 민중들의 감정과 반발의식은 1868년 대 박해 이후 1878년부터 다소 수그러졌던 서학(천주교) 뿐만 아니라 그 후에 들어온 개신교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나타났다.

  또한 전래적 종교인 유교와 불교 및 도교는 당시의 처해있던 극한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정신적 위안과 가치있는 이념을 기층민중들에게 전달하지 못했다.

  숭유억불(崇儒抑佛)정책에 의해 조선사회의 지배 종교였던 유교는 당쟁과 반상구별 등 계급의식의 조장으로 변질되어 일반민중과는 일정한 거리를 가지고 있었다. 불교도 조선의 종교정책에 의해 몰락의 길을 걸으며 산으로 산으로 은둔하였다.

  그리고 도교는 풍수도참화 하여 민간들에 전해지던 토속신앙과 결부하는 변질적 종교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렇게 볼 때 근세조선 사회에 있어서 대다수의 민중들에게 정신적 기반으로 제공되는 조직화된 종교체제는 존재하지 않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역사적 전환기와 사회적 급변기에 정국화의 혼란, 사회적 불안, 가치관의 붕괴, 지배종교의 부패, 기성종교의 화석화 등등의 사회병리는 당시의 기층 민중들로 하여금 새로운 지도 이념과 정신적 안식처를 갈망하게 만들었다.

 

 

종교ㆍ문화적 배경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 신종교는 어떠한 요인으로 억압 받는 민중을 살아남으려는 의지의 발로였으며 그들의 생애를 대변하는 요인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제반 문제들을 수용하면서 출현한 대순사상의 종교적(宗敎的)배경을 간략히 요약한다면 다음과 같다.

  그 첫째는 현실생활에 대한 위기의식이다.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등 제반 분야에 대한 불안과 사상적 혼란, 도덕적 가치의 퇴폐화 등이 민중들에게 생에 대한 절망감을 가져다 주었고 또한 위기의식을 유발시켰다. 구한말기의 우리 민족은 정치적 주권을 제국주의에 빼앗기고 경제적으로는 대공황을 맛보아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사회적 혼란은 수습될 가능성을 보여주지 아니하고 절망만을 가중시켰다. 민중들은 이것이 조선의 정치적 운명에 대한 종말을 예고하는 것이고 여기게 되었다.

  다시 말하여 이러한 위기의식은 새로운 종교의 출현을 재촉한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 민족에게 전래적으로 민간 신앙화 되어 온 정감록 비결과 같은 도참적 예언과 이사상에 있어서의 운도설등의 말대사상과 이에 대응하는 선경대망사상이 이들의 심리에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민중들의 마음 속에는 위와 같은 비결에서의 예언과 같이 조선왕조의 국운이 다하고 세계를 통일할 수 있는 새 왕조가 세워질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이것은 「선천」의 현실세계가 「후천」의 신세계로 바뀌어지는 시점에 처해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이며, 「관계」에 의한 비판이 절박했다는 사실을 나타낸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현상은 이 땅에서 초강력 힘(Meta – power)의 소유자인 절세의 도인이나 진주가 출현하여 외세를 누르고 세계를 지배할 수 있기를 민중들에게 희망하게 한 것이며, 그것을 신앙화한 것이다.

  두번째의 원인은 기성 종교의 고착화에 대한 불만의식이다.

  기성의 종교전통에 대한 불만과 천주교의 유입등 동서종교사상의 교류로 인한 영향이 민중들로부터 새로운 종교의 출현을 요구하게 되었다.

  당시의 정치, 사상의 주체가 되었던 유교는 그 이념인 수기치인으로 지선한 도덕을 실천한다는 근본정신을 뿌리째 상실하고 오직 도학, 예학 등의 공리론에만 빠져 학파, 당파 등의 파벌형성을 일삼고 명분과 권력, 재리를 찾는 데에만 급급하였다.

  더구나 한국 종교사에서 오랜 동안 서민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던 불교마저도 산속으로 불교, 무속적 축복 불교로 전락 되었으며 이에 때를 맞추어 들어온 서학(천주교)의 확산은 민중들에게 위기감을 고조시켜줌과 동시에 말세사상과 같은 메시아의 출현을 기다리는 새로운 종교의식을 형성하는데 일조하였다.

  그리고 민중들은 서학에 대항하고 서학을 능가할 만한 우리의 민족종교가 나와 온 세계를 주도하여야 한다는 서민의식이 발원하게 되었다.

  세번째 요인은 신앙에 대한 자유개방이다.

  당시의 조선사회는 유교를 국가의 지도이념으로 설정하여 그것만을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했으며, 더구나 유교 내에서도 정주학 이외의 학문은 이단으로 취급하였다. 뿐만 아니라 유교의 경전을 새롭게 해석만 하여도 사문난적으로 몰아서 참형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조선사회 종교계의 현실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완강했던 유교가 정치의 혼란과 더불어 사상통일을 고집할 능력을 잃게 됨으로서 서구 사상의 유포와 함께 민중들은 어떠한 종교든지 신앙 할 수 있다는 진취적 신앙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여기에서 조선 초기부터 전해 내려오던 정감록은 일반 민중사이에서 크게 성행하였으며 1868년과 1870년에는 이를 이용하여 반란을 도모하는 사건도 발생하였다.

  원래 정감록에는 진인사상, 신도읍사상, 십승지사상, 남조선사상 등이 포함되어 있는데, 진인사상은 메시아적 구세주의 출현에 대한 대망이고, 신도읍 사상이란 시운에 의한 낡은 왕조는 물러가고 새 왕조가 들어서서 새 도읍지를 건설한다는 믿음이며, 십승지사상은 난시(亂時)에 안전을 보장하는 피난처에 대한 신앙이고, 남조선 신앙이란 낙원이 남방, 즉 조선에 세워진다는 신앙이다.

  이러한 것은 조선 후기의 쇠약한 국가정세(regime)와 사회적 혼란을 계기로 민중들에게는 더욱 강하게 부각되어졌다.

 

 

결어

  조선후기의 종교, 문화적 상황은 사회구조의 제 분야와 마찬가지로 궤도수정을 필요로 했으며 또한 기층 민중들에게는 생의 혼란에서 인간에로의 방향을 제시하여 보다 안전한 현실을 추구할 수 있도록 하는 표상체계와 신념체계를 요구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이와 같이 소박한 신앙적 전통으로 일관했던 우리 민족은 내우외환의 사회적 환경 속에서 삶의 의미와 방향을 절실하게 흐느끼며 새로운 종교의 출현을 기다렸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대순의 종교사상은 출현했으며 기층민중의 심의(心意)에 서서히 다가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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