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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23년(1993)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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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문단 : 성지순례를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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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를 다녀와서

 

부족한 마음 돌아보게돼

           

이성우 <교무ㆍ성동 3방면> 

             

 

             

  뜨거울 줄만 알았던 1993년 여름이었다. 하지만 올해 여름은 뜨겁지도 눈부시지도 않았다. 그저 알맞게 사람을 더운 느낌만 주고 갔다. 가을같이 선선했던 여름 그리고 벌써 겨울이다. 1993년 12월. 94년으로 넘어 가는 환절기에 서서 지난 여름을 돌이켜본다.

  머리 속에 깊이 남아 있는 기억이 하나 있다. 성지순례를 다녀왔던 기억이다.

  이번 성지순례는 여러 가지로 의미가 깊은 것이었다. 그것은 이번의 참석이 처음이었다는 것과 첫번째 순례에서 조장을 맡아 보았다는 점, 6년 가량 외수였다가 교무가 되었다는 점 등이다.

  이번 성지순례는 대학 4학년인 나에게는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순례였기에 꼭 가고 싶었다.

  대진연합회장인 안미선 선무로부터 조장을 맡아 보라는 얘길 듣고 어찌해야 잘 하는 것인지 몰랐던 기억이 난다. 조장은 전에 학교에서 MT나 간부 수련회쯤으로 어림잡고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는 그것과 달랐다. 그리고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것은 따뜻하게 헤아려주는 선각의 마음이다. 지금도 선각이신 김교정께서 어려운 가운데서도 회비를 주시며 성지순례를 잘 다녀오라고 웃으시던 그 모습을 나는 잊지 못한다. 특히나 조장을 맡은 사람이 경거망동 해서는 안 된다고 일러 주시고 많이 배워서 돌아 오라시던 그 모습에서 나는 지난 날의 과오를 씻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입도를 하고서도 의심하는 마음, 적극적이지 못하고 끌려가던 나의 수도생활, 선각을 피해 다니던 지난 날의 기억이 죄송하기도 했고 우습기도 했었다. 어리석었던 내 자신의 모습들, 자기 무덤 스스로 파는 줄도 모르고 맴돌던 시절이 있었다.

  성지순례를 떠나던 날부터 끝마치는 날까지 표현한다면 아마도 소풍 나온 유치원생의 호기심 같은 것이었다.

  내 나이가 27살인 『대학생 아저씨(?)』 축에 끼다 보니 20세 초의 어린 수도인의 모습과 생각, 사고방식 생활 등이 하나같이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내가 대학교 1학년으로 캠퍼스를 돌아다닐 때, 국민학교 6학년이거나 중학생으로 다녔을 사람들과 같이 생활한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고 즐거운 일이었다. 다른 방면의 대학생 도인은 어떻게 생활하는지 알아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나는 약 장사부터 시작했다. 『순례도중 머리가 아픈 사람은 게보린, 설사 나는 사람은 지사제, 소화제 등등이 있으니 필요한 사람은 오세요.』 반응이 좋았다.

  서로에 대해 알아야겠다고 생각해서 버스가 서울을 빠져나가는 동안 조원들과 통성명을 하고 입도 경위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특이한 것은 선무 한 분을 제외하고 모두가 내수, 외수이어서 얘기하기가 편했다. 조장인 나도 아직 외수였으므로… 그래서 방침을 바꿨다.
  지금에 와선 잘한 건지 판단이 안 서지만, 성지순례라고 해서 모두 점잔한 모습만 하고 있어서는 잠이나 자기가 십상일 것 같아 화끈하게 놀 때는 놀고 배울 때는 진지하게 배우게끔 해야 겠다고…

  근데 이게 자기 소개시간에 맞아 떨어졌다. 우리 6조가 맨 뒤에 앉아 있었는데 김대호 외수의 인사와 노래가 끝나고 두 번째로 나의 차례가 되었다.

  『안녕하십니까? 6조 조장을 맡은 이성우 외수입니다.』 노래는 잘 못하고 율동과 노래를 같이 해보이겠습니다. 이 시간 이후로 우리 6조는 본궤도로 올라 섰다. 성지순례에서 얻은 첫 교훈이었다. 즐거운 분위기에서 무엇을 배울 마음이 생긴다는 것.
  우리들이 여러 순례지 중 동학사를 찾았을 때 사육신을 모신 사당(삼은각) 입구의 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관리하시는 분이 마치 우리를 기다리셨다는 듯이 나와 계신 것을 보고 입을 모아 『아~!』하고 탄성을 낼 수 밖에 없었다. 동학사를 돌아 사육신과 여러 억울한 누명을 쓰고 돌아가신 충신들의 위패 앞에 두 손 모아 배례를 들였다.

  비록 억울하게 돌아가셨으나 자손들이 이렇게 다시 세월이 지나 찾아왔으니, 자손들이 도문에 들어와 천지간에 보은상생(報恩相生)의 길을 함께 걸어 가게 힘껏 도와주십사고 기원을 올렸다.

  생육신의 89위의 위패 중에는 나의 조상 선령의 위패도 계신듯하여 마음을 모아 기원했던 기억이 난다. 망국의 한이 있으시면 이제는 그 자손들이 천지공정에 일꾼으로 자리에 설 수 있도록 도와주시길 기원했다.

  그러자 일행이 동학사 본전으로 발길을 옮기는데 하늘은 해가 떠 있는데도 수백 년의 억눌린 눈물인냥 부슬 비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는 또 다시 탄성을 내었다.

  이런 일은 낙화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대학생 성지순례단이 지나가는 자리에서는 우연하면서도 당연스럽게 날씨의 변화가 눈에 띌 정도였다. 성지순례반이 도착하자 축축한 날씨에 여인이 눈물을 머금은 듯한 날씨가 이곳 사연을 아는 이의 마음을 숙연하게 가라않혔다. 백제의 몰락을 눈 앞에 두고 의자왕과 함께 꽃이 되어 떨어져 죽음으로써 절개와 충성을 지킨 삼천궁녀의 한이 머리에 떠올랐다.
  이제 성지순례를 다녀온지도 여러 달이 지났다. 성지순례를 다녀와서 달라진 점은 외수에서 교무 임명을 모셨다는 것(창피스럽게도 거의 8년만의 일이다)과 내 스스로 항상 마음 닦는 공부의 중요성과 선각의 고마움이 이젠 마음으로 느껴진다는 점이다.

  그 동안 이것을 알기 전까지 얼마나 선각 가슴에 못을 박아드렸었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부끄럽고 아쉬운 마음이 앞선다. 그렇게 하는게 잘하는 것인양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으니 말이다. 행여 이 글을 읽으시는 수도인 중 선각께 입도한 후에 걱정을 끼쳐 드리고만 있는 분이 계시다면 당장 고치라고 당부하고 싶습니다.

  수도를 거부하고 자기 무덤 자기 스스로 파는 자살행위를 사람들은 태연하게 하는 건 아닌지… 성지순례로 인해 내가 포덕사업을 하는데 많은 밑거름이 되고 있다.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성지순례에 참여하여 자신의 수도에 많은 배움과 깨달음을 얻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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