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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23년(1993)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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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절후 신명의 생애 : 우수(雨水)절후 관장하는 방현령(房玄齡)

우수(雨水)절후 관장하는 방현령(房玄齡)

 

현령은 漢광무제를 보필한 등우와 같은 인물로 평가돼

왕에게 天地神明의 은을 사뢰

              

             

  방현령(房玄齡)의 자는 교(喬)이고 제주(濟州) 임치 사람이다. 아버지 언겸(彦謙)은 수(隋) 나라 때 사예자사(司隸刺史)를 지냈다. 현령은 어려서 매우 총명하여 옛 성현들의 글을 모두 읽었고 문장을 잘 지었으며 초서(草書), 예서(隸書)에 능했다.

  개황(開皇) 연간 중에 천하가 통일되니 사람들은 이 수 나라가 오래 존속되리라고 여겼다. 그러나 현령은 아버지에게 은밀히 말하길,『임금은 공덕도 없이 공연히 주(周)와 가깝다고 여기고 살생을 함부로 하여 제왕의 지위를 빼앗았으니, 이는 후대 자손을 위한 장구한 계책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적자(嫡子)와 서자(庶子)를 섞어 두고서 서로 시기하여 격렬하게 싸우면서 눈을 흘리니, 중국에는 왕실 내에서 죽고 죽이는 싸움이 문제입니다.』이 말을 듣고 언겸은 놀라서『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했다.

  현령은 십팔 세에 진시에 합격하여 우기위(羽騎尉)를 배수 받고, 비서성(秘書省)에서 교감작업을 하기도 했다. 이부시랑(吏部侍郞)인 고효기(高孝基)는 사람을 잘 알아보기로 소문이 나이었는데, 그는 배구(裵矩)에게 『제가 이제까지 본 사람은 많았지만 현령과 같은 이는 없었습니다. 이 사람은 필시 국가의 큰 제목이 될 것이로되, 다만 그가 출중하게 우뚝 솟는 모습을 보지 못함이 안타깝습니다.』라고 말했다. 현령은 습성(濕性)을 보위하는 관리가 되었다. 한왕(漢王)인 량(諒)이 반란을 일으키니 이에 연좌 되어 현령은 상군(上郡)으로 옮겨졌다. 현령은 중원(中原)이 어지러워지는 것을 목격하고는 개연히 천하를 근심하는 마음이 있었다. 아버지가 아프시자 백일동안 옷을 풀지 않았고, 끝내 돌아가시자 닷새동안 물조차 마시지 않았다.

  태종(太宗)이 돈황공(燉惶公)으로 하여금 위북(渭北)을 순수(巡狩)토록 하였다. 현령이 책략을 품고 가서 돈황공을 알현하니, 그가 현령을 한번 보고는 오랜 친구처럼 여겨 곧 현령을 위북도(渭北道)의 행군기실참군(行軍記室參軍)으로 임명했다.

  돈황공이 진왕(秦王)이 된 후에는 다시 부기실(府記室)로 임명하고 일치의 제후로 봉했다. 정벌하러 가는 곳마다 좋지않음이 없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진기한 물건들을 다투어 갖느라고 여념이 없었지만, 현령만은 뛰어난 이들을 막부로 물러 모으고 장수들과 은밀히 맹약을 맺으니, 사람들은 목숨을 바쳐 현령을 따르고자 했다.

  진왕(秦王)은 일찍이 말하기를 『한(漢)의 광무제(光武帝)가 등우를 얻고 나서 아래 사람들이 더욱 화목해졌다는 말처럼, 내게 있어서 현령은 등우와 같다.』 막부에 거처한지 십여 년에 군대의 문서나 격문 중에 모든 것이 현령이 손을 대면 완벽해졌다. 고조(高祖)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이 사람은 재기가 있고 견식이 넓으니 잭책을 맡길만 하다. 매번 내 아들을 위해 일을 진술하는데, 천지 밖에 있어도 마치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은태자(隱太子)와 진왕(秦王) 사이에 틈이 벌어지자, 왕이 현령을 불러 의논했다. 현령은 『나라의 어려움은 대대로 있는 것인데 오직 성인(聖人)만이 이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대왕의 공이 천하를 덮으심은 비단 인간의 지략만으로는 부족하고 천지신명께서 이를 도와주셔서 입니다.』라고 대답하고는 두여회(杜如晦)를 불러 함께 큰 일들을 의논해 처리했다.

  현령은 거듭 성동노 지역의 대행대(大行臺) 고공랑중(考功郞中) 및 문학관(文學館) 학사(學士)로 진급했다. 그런데 태자(太子)가 이들 두 사람을 미워하여, 황제에게 참소하여 이들을 축출해 집으로 돌려보내고자 했다. 태자가 장차 음모를 꾸밀 것을 알고 왕(王)이 현령과 여회를 방사(方士)의 복장으로 들도록 하여 밤중에 이 일을 의논했다.

  일은 잘 매듭지어졌고 왕은 황태자(皇太子)가 되었는데, 서자(庶子)들도 등용했다.황태자에서 황제로 즉위하니 현령은 중서령(中書令)이 되었다. 황제가 신하들의 공로에 따라 상을 내리는데, 현령은 여회(如晦), 장손무기(長孫無忌), 울지경덕(尉遲敬德), 후군집(侯君集) 등과 더불어 공이 제 일등급이었으며, 나아가 한국공의 작위를 받으니 식읍(食邑)이 천 삼백호(戶)였다. 나머지 사람들은 차서에 따라 봉해졌다.

  황제가 신하들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짐이 그대들의 공로를 등급 매겨 작위를 봉하고 식읍을 내리는데, 혹 잘못된 점이 있지 않을까 염려되니, 어그러짐이 있거든 짐을 위해 말해 보시요.』 그러자 회안왕(悔顔王), 신봉이 말하기를 『의병을 일으키심에 신(臣)의 군대가 제일 먼저 달려왔습니다. 지금 현령 같은 이들은 책이나 읽는 관리일 뿐인데 공이 제 일등급이라 하시니, 신은 알지 못하겠나이다.』 황제가 말하기를 『숙부(叔父)의 군대가 제일 먼저 달려온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숙부의 군대는 힘써 싸우지 않았기 때문에 건덕(建德) 남쪽에서는 크게 패하여 사기를 잃었고, 혹달의 반란을 토벌할 때에는 오히려 바람부는 것만 보아도 놀래 달아났습니다. 지금 현령 같은 이들은 장막 안에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사직(社稷)을 세운 공이 있으니, 이것이 소하(蘇何)가 장군들보다 공이 앞서는 까닭입니다. 숙부와 공신(功臣)들의 서열을 바꿀 수는 없지요.』 

  당초에는 장군 구사리(丘師利) 등도 소매를 걷어 부치고 삿대질을 하며 자기 주장을 하였으나 신통(神通)하게도 참괴히 굴복하는 것을 보고 이내 말하기를, 『폐하께서 혈육의 정에도 이끌리지 아니하시니 우리가 망령되어 하소연할 수 있는가』하였다.

  현령은 다시 상서(尙書) 좌복사(左僕射)로 승진되어 국사(國史)를 감독 관리하게 되었다. 황제가 『그대는 복사(僕射)가 되었으니 마땅히 짐을 도와 이목(耳目)을 넓히고 현인(賢人)들을 방문토록 해 달라. 그러나 처리해야 될 소송안건이 하루에도 수백이니, 어느 겨를에 인재를 찾으려고?』하시고는 칙명을 내려 사소한 일들을 좌우승(左右丞)이 처리하도록 하고 큰 일만 복사(僕射)가 담당하도록 했다.

  황제가 묻기를 『나라를 세우는 것과 전대(前代)의 법을 이어 나라를 잘 다스리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어려운가?』 현령이 대답하기를 『바야흐로 나라가 교체될 때에는 군웅(群雄)들이 각축전을 벌이며, 격파되면 항복하고 격파하면 승리하게 되나니, 역시 창업(創業)이 어렵지요.』 위징(魏徵)이 대답하기를『천하의 왕 노릇 할 사람이 나타나는 것은 세상의 어지러움을 틈타 어리석고 잔악한 이들을 뒤엎는 것이니, 이는 아마도 하늘이 인간에게 부여한 것인 듯 합니다. 그러나 일단 천하를 평정하고 나면 사치와 안락에 젖게 되어 백성들이 하고자 해도 부역으로 그들을 괴롭히고 세상이 피폐한 데도 가혹한 세금으로 백성을 더욱 곤궁케 하여, 이에 나라가 쇠망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역시 나라를 잘 다스리는 것이 어려운 듯 합니다.』 황제가 말하기를 『현령은 나를 좇아 천하를 평정하여 여러 위험을 무릅씀에 구사일생(九死一生)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므로 나라를 세우는 것이 더 어렵다고 본 것이다. 징(徵)은 나와 더불어 천하를 안위(安慰) 함에 부귀(富貴) 해지면 교만하게 되고, 교만해 지면 태만하게 되며, 태만하게 되면 망하게 되므로 나라를 잘 다스리는 것이 쉽지 않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나라를 세우는 일이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그것은 이미 지나간 연이니, 이제 그대들과 더불어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신중히 하리라.』

  마침 벼슬을 대대로 세습(世習) 받는 대신(大臣)들을 불러 모아, 현령에게 송주자사(宋州刺史)를 배수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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