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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27년(1997)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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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절후 신명의 생애 : 寒露절후 관장하는 우세남(虞世南)

우세남(虞世南)

           

                

  우세남(虞世南)은 월주(越州) 여요(餘姚)사람이다. 숙부 진중서시랑(陳中書侍郞) 우기(虞寄)에게 양자로 가서 뒤를 이었다. 자(字)는 백시(伯施)였으며 성격이 침잠하고 욕심이 적었다. 형 세기(世基)와 함께 오(吳)의 고야왕(顧野王) 문하에서 10년을 넘게 배우면서 생각을 가다듬고 학업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어떤 때는 여러날이 지나도록 세수와 빗질을 잊기도 했다. 분장이 곱고 아름다웠으며 복야(僕射) 서릉(徐陵)을 흠모했다. 서릉이 세남의 문장이 자기의 것과 비슷하다고 말해 문명(文名)이 있게 되었다.

  진(陳) 천가(天嘉) 연간에 아버지 우여가 죽자 너무도 슬퍼하여 상(喪) 조차 제대로 입기가 어려웠다. 문제(文帝)가 우여의 행실을 고매히 여기고 또 그의 두 아들이 모두 박학(博學)하다는 것을 알아 사신을 보내 보살펴주도록 하다가 두 형제를 불러들여 건안왕(建安王)의 법조참군(法曹參軍)으로 삼았다. 이때 세남의 양아버지 우기가 진보응(陳寶應)에게 억류되어 있어 탈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세남은 여전히 베옷을 입고 고기를 먹지 않았다. 우기가 돌아오자 그제서야 베옷을 벗고 고기를 먹었다. 지덕(至德)초에 서양왕(西陽王)의 친구가 되었다.

  진이 멸망하자 세남은 형 세기와 함께 수(隋)나라에 들어갔다. 세기의 문장은 청경(淸勁)한 면에서는 세남보다 나았으나 섬박(贍博)한 면에 있어서는 세남에게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두 형제는 당시에 문명을 떨쳐 그들을 논하는 사람들이 진(晋)의 육기(陸機), 육운(陸雲) 형제에 비기곤 했다. 양제(煬帝)가 진왕(晋王)으로 있을 때 진왕(秦王) 준(俊)과 함께 교대로 세남을 불러들이곤 했다. 대업(大業)연간에 누차 비서랑이 되었다. 양제가 세남의 재주를 아까와 하였으나 세남의 성품이 곧음을 싫어하여 그다지 신경써 임용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칠품(七品)으로 10년동안 지내게 되었다. 반면에 형 세기는 말재주가 있고 영민하여 양제의 마음에 쏙들어 날로 귀하게 되었다. 형의 처첩들이 왕자(王者)에 버금가는 복식(服飾)을 하게 되었을 때도 세남의 궁빈(窮貧)하고 검약하는 생활은 여전하였다. 우문화급(宇文化及)이 양제를 시해하고 세기를 죽이려 했을 때 세남은 형을 껴안고 형 대신 자기를 죽여 달라고 했으나 우문화급은 곧이 듣지 않고 마침내 세기를 죽였다. 이 일이 있은 뒤로 세남은 애통해하여 뼈만 앙상히 남게 되었다.

  세남이 요성(聊城)으로 갔다가 두건덕(竇建德)에게 잡혀 황문시랑(黃門侍郞) 이라는 벼슬을 하게 되었다. 진왕(秦王)이 건덕을 멸하고 세남을 데리고와 부참군(府參軍)으로 삼았다가 기실(記室)로 전보하고 다시 직급을 올려 태자중사인(太子中舍人)으로 삼았다. 진왕이 천자(天子)의 위(位)에 오른 뒤 세남을 원외산기시랑(員外散騎侍郞) 홍문관학사(弘文館學社)에 배수했다. 이때 세남은 이미 늙었고 기력이 쇠진하였으므로 누차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가 쉬겠노라고 애걸했지만 듣지않고 직급을 올려 태자우서자(太子庶子)로 삼으려 했다. 세남이 한사코 사양하자 비서감(祕書監)으로 직책을 고치고는 영흥현자(永興縣子)에 봉했다.

  세남의 모습은 유자(儒子)의 풍모에 근엄하였는데 겉보기는 걸친 옷도 이기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마음은 고상하고 충렬(忠烈) 하였으며 의론(議論) 또한 곧고 정확했다. 태종(太宗)이 일찍이 이르기를, 『짐이 세남과 함께 고금의 일을 논할 때 어쩌다 한마디 실수를 하게 되면 매우 한스러워 했는데 그의 간절한 정성이 그와 같았다』라고 하며 칭찬하였다.

  정관(貞觀) 8년에 직급이 올라 현공(縣公)에 봉해졌다. 이때 농우산(농右山)이 무너져 큰 뱀이 자주 나타나고 산동(山東)과 양자강(揚子江), 회수(淮水)에 홍수가 나 태종이 이를 걱정하며 세남에게 물었다. 세남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춘추(春秋)대에 양산(梁山)이 무너져 진후(晋候)가 백종을 불러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를 물었습니다. 백종이 이르기를, 「국가(國家)는 산천을 위주로 하는 까닭에 산이 무너지거나 내(川)가 마르게 되며 군주(君主)는 그를 위하여 생일을 거행치 아니하고 복식의 등급을 내리며, 거친 수레를 타고 음악을 듣지 아니하며 행차를 할 때면 예로서 산천에 제사하여야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양산은 진이 주재(主宰)하던 산이었으므로 진후가 백종의 말을 그대로 이행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해가 없었다 합니다. 한문제(漢文帝) 원년(元年)에 제(齊), 초(楚)지방의 산 스물아홉 개가 같은 날에 무너지고 물이 엄청나게 솟아 나왔습니다. 문제가 군국(君國)에 조서들 내려 공물(貢物)을 바치러 오지 말도록 하고, 천하에 은혜로움을 널리 펴 원근(遠近)의 백성들이 모두 흡족해 했습니다. 이리하여 또한 재앙이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후한(後漢)의 영제(靈帝)때에 푸른 뱀이 천자(天子)의 자리(座)지방에 나타났다가 저잣거리를 거쳐 종묘(宗廟)로 들어갔습니다. 뱀은 의당 초야(草野)에 있어야 하는 것인데 저잣거리에 들었으니 이것이 괴이하게 여기는 까닭인 것입니다. 오늘에 뱀이 산택(山澤)에 나타난 것은 살 장소에 알맞은 것이므로 이상한 것은 없습니다. 또 산동과 양자강, 회수에 큰 물이 진 것을 보니 아마도 억울한 옥사(獄事)가 있는 듯합니다. 마땅히 죄수들의 명부(名簿)를 살펴 형량을 줄여주시면 혹 하늘의 뜻에 부합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태종이 그럴 듯하게 여기고 사자(使者)들을 시켜 주린 백성들을 구제케 하였다. 또 옥(獄)의 송사(訟事)를 살펴 많은 죄수들을 사면해 주었다.

  후에 발허성(勃虛星)과 위성(危星)이 저성을 지나 100여일 넘게 머물자 태종이 군신들에게 물었다. 이때 세남이 말하길, 『옛날 제경공(齊景公) 때에 혜성이 나타나 경공이 안영에게 물었습니다. 안영이 대답하기를, 「공께서 못을 팔 때는 깊지 않을까 걱정하시고, 대(臺)를 쌓을 때는 높지 않을까 걱정 하시고, 형벌을 행할때도 무겁지 않을까 걱정하셨습니다. 이런 까닭에 하늘이 혜성을 보내어 경계토록 하신 겁니다.」라고 하자 경공이 두려워하며 치덕(治德)에 힘썼는데 열엿세 뒤에 제대로 되었습니다.

  신(臣)이 원컨대 폐하께서는 공(功)이 높다고 자긍(自矜)하지 말며, 태평시절이 오래간다고 자만하지 말고 그 끝을 신중히 하기를 처음 시작할 때처럼 하시면 비록 혜성이 나타난다고 해도 걱정하실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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